

춘천시는 매년 춘천 시민의 날(11월 8일)을 기념해 지역 사회 발전과 공동체 가치를 위해 헌신해온 시민을 대상으로 ‘춘천시민상’을 수여한다.
올해도 ▲사회공헌 ▲산업경제 ▲행복가정 ▲농업발전 ▲문화체육 ▲장애복지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온 시민들이 수상자로 선정됐다. 춘천을 더 아름다운 도시로 만든 수상자 6명을 소개한다.




이동선 후평3동 지역사회보장협의체 위원은 현재 고깃집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주변에서 “봉사가 본업, 장사는 부업”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에게 봉사는 특별한 활동이 아닌, 일상이다.
40년 전, 이동선 위원은 엄마 없이 장애가 있는 아빠와 사는 남매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반찬 만들 때 조금 더 해서 나눠 주자’는 생각으로 시작해 이웃에 혼자 사는 어르신들까지 챙기게 됐다. 이후 후평3동 새마을부녀회 회장으로서 본격적으로 봉사에 뛰어들었다. 사람도 없고 돈도 없던 시절, 한 달에 한 번 마을과 가정 청소를 위해 직접 몸으로 뛰었다. 이후에도 이 위원은 김장이나 연탄 나눔은 물론 어르신 경로잔치 등 후평동 봉사에 두 손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이동선 위원은 손도 크고, 요리 솜씨가 뛰어나다. 이 위원은 “맛이 있든 없든,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표정에 계속 반찬나눔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최근 열린 후평동 효 잔치에서는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인 잡채를 어르신들께 대접해 큰 호응을 얻었다. 또한 재롱잔치로 직접 한복을 차려입고 품바 공연을 펼쳤다. 이 위원의 흥겨운 무대에 어르신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이후 공연 문의가 쇄도했다는 후문.

이동선 위원은 솔선수범하는 리더다. 이 위원은 “내가 먼저 하면, 사람들이 보고 같이한다.
직접 눈으로 보여주는 게 최고”라고 말했다. 요즘은 고민이 하나 있다. 같이 활동하는 봉사자들이 대부분 고령이라는 점이다. 이 위원은 “내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봉사할 계획이다. 더불어 사는 세상, 따뜻한 나눔의 손길이 끊기지 않도록 젊은이들이 더 많이 동참했으면 좋겠다”고 소신을 밝혔다. 이어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삶이 무료하거나 힘들다면, 봉사해 보세요! 긍정 에너지가 넘쳐나고 삶이 풍요로워집니다.
”마지막으로 바쁜 엄마이자 아내를 배려해 준 가족들과 식당 일을 함께하는 김희진 이종사촌 언니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맙고, 사랑합니다!”

춘천시는 매년 11월 ‘양성평등대회’를 통해 성평등과 다양성의 가치를 지역의 중요한 원칙으로 되새긴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시민상을 받은 이금선 세원개발·세원산업 대표의 이야기는 더욱 뜻깊게 다가온다.
남성 중심의 건설업계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수많은 벽을 마주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직접 발로 뛰며 신뢰를 쌓아왔다. 품질·기술 혁신으로 강원 최초의 여성기업 인증을 획득했으며, 여성기업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전용 단지를 조성하고 공공 조달 시장을 개척했다. 경제 단체의 대표를 맡아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지원, 경제 활성화에도 힘썼다. 지금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쉽지 않은 길이었다. 이 대표가 건설업을 시작하게 된 건 남편의 갑작스러운 부재 때문이었다. 사무실은 컨테이너 하나뿐, 현장은 낯설었다. 하지만 그는 잠도 포기한 채 현장을 돌았다.

여성 기업인으로서 겪은 차별과 혼자 감당해야 했던 책임 속에서, 그는 때때로 깊은 고비를 마주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주변을 돌아보았고, 누군가를 돕는 일이 오히려 자신에게 위안이 된다는 걸 깨달았다. 전문성과 책임감을 겸비한 여성 기업인으로 입지를 굳힌 이 대표는 이제 지역과 이웃을 위한 봉사에도 누구보다 앞장서고 있다.
“제가 도운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분들이 저를 지탱해준 거죠.” 그렇게 시작한 봉사와 나눔은 그의 삶을 버티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이후 그는 범죄 피해자 지원 활동부터 여성 기업인 권익 보호,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지원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지역을 위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청년들을 위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되, 기회를 잡으려면 실력을 갖추려는 노력을 항상 해야 합니다.” 청년들과 실무를 잘 아는 선배 기업인의 지속적인 멘토링이 이뤄진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 대표는 자신의 신조를 밝혔다. “주변이 잘돼야 나도 잘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우리 이웃과 지역이 잘 될 방법을 고민하고 실천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취재를 마칠 즈음엔 책상 뒤에 놓인 수많은 감사패와 표창장도 이 대표의 이런 마음을 온전히 담기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자와 한 약속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대표님, 너무 주변만 챙기지 마시고 본인 건강도 꼭 챙기세요. 그래야 제가 10년 뒤에도 또 취재하러 오죠.”

“받을 사람이 받았다!” 동네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엄현자 사북면 지역사회보장협의체 위원은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를 함께 모셨다. 결혼 후 줄곧 시어머니와 함께 살았고, 어느 날 집에 놀러 온 친정어머니가 “공기도 좋고 경치도 좋다”며 눌러앉았다. 그렇게 두 노모와의 동거가 시작됐다. 두 어머니는 무려 15년 동안 한 방을 쓴 룸메이트이자, 절친이었다. ‘어떻게?’라는 물음에 엄 위원은 “치매를 앓으신 시어머니가 사돈을 친구로 생각하고 좋아했다”고 설명했다.
엄현자 위원은 두 어머니의 모습을 회상하며 환히 웃었다. 두 분이 건강하실 땐 같이 동네를 돌아다니며 풀을 뽑고, 날이 좋으면 마당에 자리를 펴고 부침개를 만들어 먹곤 했다. 마늘밭에서 시어머니가 춤을 추고 친정어머니가 맞장구를 치던 모습, 엄 위원이 친정어머니와 티격태격하면 시어머니가 꼭 사돈 편을 들었던 그날도 엄 위원은 생생하게 기억하는 듯했다.

엄현자 위원은 어머니들을 알뜰히 살폈다. 특히 식사에 집중했다. 옆에 있던 남편이 “잘 드시게끔 아내가 요리를 참 잘했다. 삼시세끼 그리고 오전, 오후 간식까지 정성스럽게 챙겼다”고 칭찬하자, 엄 위원이 “잘 드시고 잘 웃으시고 잘 주무실 때 가장 뿌듯했다”며 웃었다. 엄 위원은 요양보호사 자격증은 물론, 한식조리·식품가공 기능사 자격증을 보유한 능력자다.

안타깝게도 친정어머니는 올해 1월, 시어머니는 10월 엄현자 위원의 곁을 떠났다. “엄마, 나랑 사는 거 어땠어?” “참 좋았지~!” 엄 위원이 병상에 누운 친정어머니와 나눴던 대화다. 그는
“짧은 대화였지만, 이날 많은 위로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래도 그땐, 시어머니가 계셔서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시어머니가 돌아가실 땐 엄 위원의 마음도 무너져 내렸다. 그는 “두 어머니를 만질 수가 없다는 게 제일 슬프다. 매일 볼을 쓰다듬고, 뽀뽀했는데…”라며 눈물을 흘렸다.
엄 위원에게 효란 무엇일까? “별거 없어요. 옆에 같이 있어 주는 것 아닐까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같이 먹어야 더 맛있잖아요.

11월 11일 농업인의 날, 춘천수변공원에는 농업인과 시민들이 함께 어우러져 늦가을을 즐기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 신성호 춘천시농업인단체협의회 회장은 쉴 틈 없이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농업인, 행정 담당자, 농협 관계자까지 누구와 이야기를 나눌 때든 그는 늘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고,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부터, 그가 올해 춘천시민상 수상자로 선정된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신 회장은 복숭아 과수원을 운영하며 가축 퇴비를 활용한 친환경 농법으로 복숭아를 재배하고 있다. 손이 더 가더라도 “내 가족이 먹는다”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키운다. 일교차가 큰 춘천의 기후까지 더해져, 그는 “춘천 복숭아는 전국 최고”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러나 그의 진짜 자부심은 복숭아 그 자체보다, 우리 지역 농업인의 권익을 지키는 일에 있다. 신 회장은 한국후계농업경영인 춘천시연합회장, 춘천시농업인단체협의회 회장 등 여러 직책을 맡으며 농업 현장의 목소리를 행정과 정책에 전달하는 다리 역할을 해왔다. 녹록지 않은 농업환경 속에서, 그는 농업인의 소득과 판로를 넓히는 일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
로컬푸드 직거래 장터 확대 역시 그가 오랫동안 강조해 온 과제다. 신 회장은 그동안 농업인단체의 의견을 모아 춘천시에 꾸준히 건의해왔다. 농업인이 제값을 받고, 소비자는 신선한 농산물을 만날 수 있는 유통 기반이 더욱 탄탄해지기를 바라고 있다. 특히 올해 삼악산 케이블카 승강장에서 열린 ‘농부의 장터’에 대해서는 “외지인들에게 지역 농산물을 알리고, 도심 상권과의 마찰도 줄인 좋은 사례”라고 평가했다. 그는 이 성과를 “농업인과 행정이 함께 만들어낸 결과”라고 말했다.


신 회장의 배우자와 아들이농장에서 복숭아 재배를 하고 있다.
그의 시선은 농촌 일손 문제에도 닿아 있다. 신 회장은 외국인 계절근로자 제도의 현실을 짚으며, 품종별로 바쁜 시기가 달라 배정 기간 내내 일을 맡기기 어려운 농가의 고민을 전했다.
“업종과 작목이 다양한 현실을 고려해 배정 기간 내 농가 간 이동을 유연하게 할 수 있는 방안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런 고민과 제안 모두 농가와 일손, 그리고 우리 지역 농업이 오래도록 제 자리를 지켜가기를 바라는 그의 진심 어린 마음에서 나오는 듯했다.
친환경 복숭아 한 상자를 정성껏 길러내는 농부이자, 농업인과 행정을 잇는 중심으로서 제자리에서 묵묵히 역할을 다하고 있는 신성호 회장. 듣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지만 인터뷰를 오래 이어 갈 수는 없었다. 그를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농업인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짧은 대화를 마치고 다시 군중 속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그의 뒷모습에서, 오늘도 농업의 답을 현장에 찾으려는 한 사람의 진심을 조용히 느낄 수 있었다.

도시의 아침을 깨우는 수영장의 잔파동처럼, 17년 동안 춘천시수영연맹을 이끌어 온 한 사람의 변화는 조용히 시민들의 일상에 스며들었다. 올해 춘천시민상을 받은 김응래 춘천시수영연맹 고문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우리 연맹과 춘천시체육회의 영광이고, 제게도 큰 기쁨입니다”라며 담담히 소감을 전했다.

김 고문은 2008년부터 2024년까지 춘천시수영연맹 회장을 맡아 춘천에 아마추어 수영 문화를 정착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10여 년 전만 해도 춘천의 수영 환경은 지금과 달리 기반이 약했다. 몇 개의 동호회만 존재하던 상황에서 그는 “동호인들이 제대로 운동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연합회 창립을 추진했고, 2012년 정식 회원단체 인준까지 하나씩 토대를 쌓아갔다. 이 기반 위에서 ‘제1회 춘천 소양강배 마스터즈 수영대회’를 개최했고, 춘천은 점차
‘수영 도시’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의 활동은 수영장 안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이웃돕기 성금을 마련하기 위해 매년 ‘나눔 자선 수영대회’를 진행했다. 2024년에는 수영대회에 참가한 시민들의 정성을 모아 성금 800만 원을 지역 사회에 전달했다.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기에, 수영으로 누군가에게 보탬이 되고 싶었다”는 그의 말은 이 행사의 따뜻한 의미를 잘 보여준다.
17년 동안 무보수로 연맹을 이끌 수 있었던 동력에 관해 묻자, 그는 “수영을 통해 만난 좋은 분들, 그리고 가족의 응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회장직에서는 물러났지만, 여전히 수영을 즐기며, 필요하다면 언제든 연맹을 돕겠다고 전했다.

시민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부탁하자 그는 다시 ‘우리’를 강조했다. “이 상은 개인이 아니라 춘천시수영연맹과 춘천시체육회 모두가 함께 받아야 할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춘천 체육이 더 좋은 방향으로 가는 데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수영으로 시작된 그의 여정은 한 종목을 넘어 사람을 잇고, 도시의 일상에 따뜻한 숨결을 더했다. 김응래 고문의 17년은 화려함보다 꾸준함으로, 큰 목소리보다 다정한 실천으로 춘천의 변화를 만든 시간이었다. 그의 발자취는 지금도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춘천의 물결을 움직이고 있다.


김민주 강원특별자치도지체장애인협회 춘천시지회 운영위원은 30여 년간 장애인 복지와 자립 지원을 위해 헌신해 온 인물이다. 그녀는 현재 춘천시장애인체육회 이사로도 활동하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녀는 1990년 결혼 후, 1992년에 이란성 세쌍둥이를 출산했다. 정부의 지원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지만 시부모님의 도움 덕분에 아이들을 양육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여섯 살이 되던 1997년 겨울, 아르바이트 출근길에 블랙아이스로 인한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그녀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흉추 3~4번 골절로 지체 2급 판정을 받았고, 휠체어 생활이 시작됐다.
갑작스러운 장애와 함께 세 아이를 키워야 하는 현실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김 위원은 포기하지 않았다. 컴퓨터그래픽과 웹디자인을 배우며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고, 장애인 기능경기대회에서 동상과 은상을 수상했다. 이후 춘천시장애인근로사업장에 취업하면서 경제적 안정을 찾았고, 세 아이를 책임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춘천시장애인근로사업장에서 19년간 사회복지사로 근무한 김 위원은 장애인들의 직업 재활과 원예치료 프로그램을 지원하며 복지 향상에 기여했다. 동시에 강원특별자치도지체장애인협회 춘천시지회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며 지회 발전과 회원 복지를 위해 힘썼다. 원예 프로그램 후원, 행사 지원, 물품 전달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왔으며, 지체장애인 체육대회와 한마음 전진대회 등 연례행사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맡아왔다.

그녀의 삶에서 빠질 수 없는 또 하나의 존재는 시어머니다. 결혼 후 시할머니, 시부모, 시동생과 함께 살았던 김 위원은 시부모님의 도움으로 세쌍둥이를 키울 수 있었다. 교통사고 이후에는 시어머니가 그녀와 아이들을 돌보며 큰 힘이 되어주었다. 현재 시어머니는 85세로, 이제는 전동휠체어 없이는 생활이 어려운 상황이지만 여전히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김민주 위원은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도움이 필요한 장애인들이 많다”며 “장애에 대한 편견과 차별 없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녀의 삶은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은 한 여성의 이야기이자, 장애를 넘어선 도전의 기록이다. 그녀는 오늘도 조용히, 그러나 강인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이어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