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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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51

2020.4
#봄내를 품다
최돈선의 골목이야기 4
그리운 명동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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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는 움직인다


봉의산은 춘천의 얼굴이다. 그 봉의산 기슭으로 강원도청 건물이 하얗게 둥지를 틀고 있다. 봉의산은 봉황이 날개를 접고 앉은 형상으로 호수 건너편 삼악산과 마주하고 있다. 삼악산도 봉우리가 세 개고, 봉의산도 봉우리가 세 개다. 춘천은 동쪽의 대룡산에서 해가 뜬다. 해는 봉의산 정수리를 둥글게 건너 삼악산 봉우리로 넘어간다. 석양은 노을기둥을 호수에 깊이 박은 채 강원도청의 하얀 건물을 주황색으로 물들인다. 그 도청에서 직선으로 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중앙로 5거리와 만나게 되는데, 춘천시청과 은행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다.


중앙로 5거리는 춘천의 심장이다. 5거리 밑 지하광장을 중심으로 사방 통로가 뻗어 있다. 그곳은 춘천에서 유일한 지하상가도시다. 이 지하상가 도시를 통해 춘천시청, 중앙시장, 명동거리, 낙원동가구골목이 혈관처럼 연결되어 있다.


이 중 명동거리는 가장 번화한 상업중심지이다. 원래 명동은 행정구역이 아니었다. 서울 명동처럼 화려한 상업의 중심지라 해서 사람들 입으로 불린 이름이다. 조양동이란 옛 이름이 지금은 약사동과 명동을 합친 약사 명동이란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다. 명동거리는 춘천에서 제일 큰 중앙시장과 맞닿아 있다.


옛날엔 <예맥>이나 <보리수> 같은 음악다실이 있었고, 춘천에서 제일 큰 청구서점과 학문사가 있었다. 학문사 자리는 춘천에서 으뜸으로 비싼 금싸라기 땅이었다. 바로 위쪽으로 법원이 있었는데, 지금은 헐리고 명동 cgv란 영화관이 들어섰다.








- 안개꽃처럼 사라진 것들


사라진 것들은 추억 속에서만 존재한다. 청구서적과 학문사도 사라졌고, 예맥과 보리수 다실도 이젠 만날 수 없다. 옛날 옛적엔, 교모 쓴 남학생들과 단발머리 여학생들이 학교가 파하자마자 이 명동거리로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그들은 지금의 중 · 고등학교 학생들의 아버지 어머니였을 터이다. 서점은 책을 뒤적이는 학생과 군인과 젊은 대학생들로 늘 붐볐다.


그때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것은 명동은 젊은이들의 거리이고, 연애담이 꽃피는 낭만의 거리라는 사실이다.


눈이 펑펑 쏟아지던 1968년 말, 시청 앞 명곡사 스피커에선 어김없이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왔다. 그때 예맥다실에선 짧은 머리의 비쩍 마른 청년이 식물처럼 앉아서 클래식 레코드판을 돌렸었다. 몇 년 후 그는 우리나라 최고의 인기작가가 되었다. 당시 그가 쓴 소설 <훈장>과 <꿈꾸는 식물>이 청구서점과 학문사에서 불티나게 팔렸었다. 또한 1970년 보리수 다실에선 춘천에서 제일 먼저 시인이 된 청년의 시화전이 열리기도 했다. 그 청년시인과 자취를 하던 <꿈꾸는 식물>의 작가는 하룻밤 사이 뚝딱 마법의 방망이처럼 붓과 펜을 들어 구름빵 같은 시화詩畫그림들을 그려주었다. 그때가 겨울이어서 명동거리는 밤만 되면 안개가 짙게 깔리곤 했다.


가난한 학생시인의 몽롱한 시화전엔 늘 식은 커피잔들과 겨울꽃들이 다탁에 가득 쌓여 있었다. 축하의 꽃다발은 시인을 우울하게 했다. 그 우울을 걷어가는 한 소녀가 있었다. 가난한 시인은 그 소녀에게 ‘라쿰파르시타’란 이름을 붙여 주었다.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저는 농아聾啞인 소녀. 소녀는 마치 가장행렬처럼 뒤뚱거리며 걸었다. 그 소녀는 다탁에 놓인 겨울꽃을 한아름 안고 2층 계단을 내려가 안개 낀 거리로 나서곤 했다.


그 소녀는 희미한 가로등 아래서도 있었고, 그 소녀는 어두운 중앙로 플라타너스 밑에서도 있었고, 그 소녀는 밝고 화려한 옷가게 진열창 앞에서도 있었다. 소녀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꽃을 팔 았다. 문득 어느 날, 사람들은 그 소녀가 영원히 사라져 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50년이 흘렀다. 소녀는 어느 곳에서 몽롱한 안개꽃이 되어 흔들리고 있을까.





- 꿈꾸는 식물


라쿰파르시타가 꽃을 안고 걸었을 명동거리의 뒷골목. 이 골목엔 <꿈꾸는 식물>의 작가가 보낸 한 통의 편지가 술꾼들의 화젯거리로 떠돈 적이 있었다.


닭갈비골목엔 유일하게 2층 횟집이 하나 있었는데, 복천횟집이라 불렸다. 권투선수 출신의 몸집 단단한 40대 주인이 회를 떴다. 어느 날 저녁 그 횟집에 한 청년이 편지를 들고 나타났 다. 그 청년이 건넨 편지엔, 저는 회가 몹시 먹고 싶습니다. 그러나 돈이 없습니다. 회 한 접시 보내주시면 참으로 고맙겠습니다, 라는 내용과 함께 무명소설가의 이름 석 자가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횟집 주인으로선 전혀 생소한 이름이었다. 횟집 주인은 아무 말 없이 회를 정성스레 떴다. 그리고 뜬 회를 심부름 온 청년에게 들려 보냈다. 그 후 가난했던 무명소설가는 <꿈꾸는 식물>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소설가는 당연히 외상값을 갚았고, 그 이야기는 오랫동안 술꾼들의 안줏거리로 닭갈비골목을 떠돌았다.






- 그리운 골목엔

일러스트 호비(신혜빈)


춘천 명동 뒷골목이 닭갈비로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1982년 1월 5일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되고부터였다. 통금이 있을 때는 밤 11시30분에 예비사이렌이 길게 울었다. 그때면 골목골목마다 장사꾼들과 술꾼들이 거리로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고, 한산했던 택시정류장은 금세 긴 줄을 이루었다. 12시 자정, 길고 무거운 통금사이렌 소리는 일순 춘천을 깊은 침묵 속에 잠기게 했고, 미군부대 유도탄기지에서 쏘아 올리는 탐조등 만이 밤하늘을 길게 핥았다.


그때부터 골목골목마다 방범대원의 호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미처 귀가하지 못한 사람들과의 추격전은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 억압과 통제의 시간이 멈추고 실시된 통금해제는 골목의 자유를 부여했다. 새벽 1시, 비틀거리며 거리를 걷는 주정뱅이가 자유를 얻었다. 장사를 하는 상인들이, 약국에서 약을 사서 바삐 귀가하는 시민들이, 밤에 경제활동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신체의 자유를 얻었다.


누구나 명동에 가면 활기와 생동감을 느꼈다.

2002년 방영된 인기드라마 ‘겨울연가’로 명동거리는 더욱 유명해졌다. 배용준과 최지우가 연기하는 첫사랑의 무대가 명동거리였기 때문이다. 한류 붐이 일자 중국, 대만, 일본인들이 닭갈비골목을 찾기 시작했고, 골목은 늘 흥청거렸다. 좁고 허름했던 뒷골목은 주황색과 녹색으로 산뜻해졌고, 명동거리 뒷골목은 명물닭갈비골목으로 유명세를 탔다.


닭갈비는 원래 뼈가 있었다.

연탄불 화덕에 둥근 무쇠철판을 얹어 굽던 뼈 있는 닭갈비는 가스불 위 무쇠철판에 뼈를 발린 닭고기로 바뀌었다. 그래도 이름은 닭갈비였고, 둥근 무쇠철판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닭갈비는 둥글게 앉아 먹어야 정이 들고 이야기 나누기에도 좋다. 그래서 무쇠철판은 둥글게 만들어졌다고들 말한다.


닭갈비는 추억의 음식이라고 한다. 값이 저렴하고 푸짐해서 여럿이 먹기에 안성맞춤이다. 이젠 술꾼보다 가족이 함께 먹는 외식문화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닭갈비는 양배추, 양파, 고구마, 떡, 가락국수사리에다 매콤한 양념장을 버무려 지글지글 굽는 요리이다. 이 독특한 요리는 막국수와 더불어 춘천의 중요한 브랜드가 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 명동거리도, 명동닭갈비골목도, 젊은이들이 북적여야 할 영화관도, 화려한 옷가게나 음식점도, M백화점도 모두 모두 조용할 뿐이다. 작년 12월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코로나는 흥청거리는 골목과 거리의 인파를 잠재웠다.


거리엔 사람의 발길이 뜸해지고, 다니는 사람들은 마스크를 하고 다닌다. 이따금씩 골목 닭갈비집 안을 기웃거리는 시늉이라도 할라치면, 이내 문이 열리면서 호객행위가 벌어진다.


단 한 번이라도 이런 적이 있었던가. 문 앞 골목에서 줄을 서서 대기하던 손님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석 달 가까이 불경기의 연속이다. 휴일임에도 인적이 끊긴 골목은 주홍빛 석양夕陽만이 바람에 펄럭일 뿐이다.



문득

‘늘 그리운 편지처럼 그 골목에 가고 싶다’ 는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이제 봄이다. 우린 그 골목에서 편지를 읽듯 어깨가 따뜻한 사람들과 이야기할 날을 기다린다. 사람들은 언젠가는 분명, 그리운 골목으로 돌아올 것이다.

봄은 춘천이 아니던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