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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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54

2020.7
#봄내를 품다
최돈선의 골목이야기 7
요선시장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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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요선시장의 초여름 골목



그림 이형재


지금은 사라졌지만

강원일보 사거리에서 서부시장으로 가는 오른쪽 길섶엔 삼층집 조그만 건물이 있었다. 1986년 3월 2일 이른 봄이었다. 꽤 쌀쌀한 날씨였다.


저녁 무렵 그 건물 지하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산내방’이라 이름한 불교문화원은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 꽉 들어찼다.

그날 부끄러운 몸짓과 떨리는 음성으로 시인들은 자신의 시를 조심스레 낭송했다. 이제는 노시인이 된 그날의 풋풋한 시인들은 그때의 낯붉힘과 설렘을 어찌 잊겠냐며 미소를 지었다.


제1회 수향시 낭송회.

그것이 어언 34년. 300회를 훌쩍 넘겼다.




막다른 골목집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낭송회는 청운靑雲의 대금 소리로 시작되었다. 청운은 나중에 스님이 되어 중국으로 건너갔다.

낭송회가 끝나면 사람들은 으레 길 건너편 요선시장 주점으로 몰려가곤 했다.


술꾼이 된 문인들과 예술인들은 문학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꽃으로 밤이 깊어 갔다.

때로는 창밖으로 내리는 빗소리를 듣기도 했고, 때로는 골목길로 쏟아지는 탐스러운 눈을 맞으며 귀가하기도 했다. 어느 때는 푸른 달빛에 젖어 구성진 가락 한 곡조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그렇게 자주 홀로아리랑을 부르던 시인은 이제 노인이 되었다. 그 홀로아리랑을 작사 작곡한 가인歌人이 이곳 요선동에서 살았다는 걸 그는 까마득히 몰랐다.


가인 한돌이 춘천에서 10년을 살다 서울로 간 이야기는 작년 그가 춘천에 왔을 때 우연히 알게 되었다. 네이버 인물검색에 한돌은 강원도 춘천 출생으로 되어 있었다. 노시인과 한돌은 호형호제하기로 약속하고 막걸리를 밤늦게까지 마셨다.



지금은 많이 퇴색했지만 지금도 요선동은 유난히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도청과 시청이 가까워 공무원들이 퇴근길에 목을 축였고, 신문기자들이 들러 예술가들과 자주 어울리곤 했다.

누군가 요선동을 밤의 안테나라 불렀다. 사람들은 이 요선동 골목에서 춘천의 비하인드 뉴스를 다 들을 수 있었다.


목불 장운상 화백의 원숭이 그림이 요선동 표구사에서 도난당했던 이야기는 오랜 시간 술안주가 되었다. 시간이 흘러 그 그림이 어느 미술교사의 집 장독대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 또한 빅뉴스였다.(그 뒷이야기를 여기에서 다 옮길 수 없음은 매우 유감이다.)


무명에서 일약 인기작가로 우뚝 선 이외수 작가의 소설 <꿈꾸는 식물>도 자주 술꾼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시인은 시를 읊었고, 소설가는 허구의 이야기를 꾸몄으며, 화가는 몽환의 그림을 펼쳤고, 음악가는 지나는 모든 소리를 다 들었다.

어느 누군가는 요선동 골목은 술이 흐르고, 그 술은 이내 시가 된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80년 간판의 흔적 번성했던 기억




요선동 골목


지금도 요선동은 도청과 시청을 곁에 두고 코앞에 강원일보와 은행들을 즐비하게 거느린 요지 중 요지이다.


두 개의 긴 골목을 품고 있는 요선동은 밤문화가 번성하던 곳이었다. 쭉 뻗은 골목길은 낙원동 인성병원에 닿았다. 한국전쟁이 휴전된 후 1955년에 개원한 병원이다.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 병원은 노년을 모르는지 자꾸 부피가 커져 갔다. 그것은 아픈 이가 많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더불어 요선동이 시름을 앓아 간다 는 의미도 되었다.


어느 날 요선터널이 사라지고, 언덕 위 반딧불이 같은 수백 채의 판잣집들이 헐렸다. 그 자리에 거대한 아파트가 들어섰으나 웬일인지 요선동 주점과 식당가는 폐허가 되어 갔다.

오래된 간판이 고물처럼 생겨났다.


색이 바랜 간판은 칠이 벗겨지고, 글자가 떨어져 나갔다. 80년 된 얼음집, 30년 된 강촌집과 굴레 극단, 50년 된 춘천 찻집, 그리고 70년을 지켜 온 요선제면소집…그것들 모두는 희미해진 사진처럼 변색이 되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시나브로 잊혀져 가고 있었다. 몇몇의 집은 간신히 그 명맥을 이어 가고 있긴 했지만, 그 옛날 명성을 떨치던 유명간판들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왼쪽) 노인들의 천국 춘천커피 / (오른쪽) 내부수리 중인 평창이모집



들장미와 흰 벽



오약국이 그랬다.

오약국은 한약으로 꽤 유명했다. 화가 박수근과의 인연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아 있다. 박수근은 오약국의 신세를 많이 졌던 모양으로 은박지 그림이나 스케치를 약국에 여럿 남겼다.


그 이야기는 호사가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박수근의 은박지 그림값이 수십억 원으로 뛰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박수근 그림이 그 약국엔 없다고 했다. 지금은 아예 약국이 없어져버렸기 때문에 은박지 그림은 술꾼들의 말 속에 남아 떠돌았다. 그 누군가가 그 은박지 그림을 팔아버렸다 고 했다. 골목은 엉뚱하게 생성된 이야기를 퍼 나르느라 늘 바빴다. 그러나 이 뜬소문의 진위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춘천1호점 투다리가 아직도 성업 중인 요선동. 오래된 것들은 사라져 버리고 새것이 그 자리에 들어섰다. 제일극장 자리엔 번듯한 신축 건물이 유리창을 빛내며 석양을 맞이한다. 골목은 더욱 그늘져 보였다.

주황색 노을이 깔린 골목길 모퉁이엔 옛날 미닫이유리문이 달린 요선제면소가 있고, 최소한 80년은 되었을 국수틀에 기대어 앉은 늙은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옛날엔 우리 제면소에서 다 나갔지요.

과거를 회상함은 그리움 같은 것이 밀물 되어 오는 법이다. 그것은 고통도 아름다워지는 마법의 ‘희미한 사진’일 뿐이다.


제면소집 곁엔 평창이모집 이모가 나와서 반가이 인사를 한다. 춘천의 유기택 시인이 자주 들르는 곳이다.



제면소 주인과 국수틀


세 평 정도의 공간에 탁자 두 개가 놓여 있고, 그 비좁은 자리에 앉아 시인과 화가들이 시를 이야기하거나 시절 이야기를 한다. 전국의 시인들도 철새처럼 심심찮게 찾아드는 곳이다. 마침 내부의 벽을 새로 페인트칠을 하는 중이어서 들어갈 순 없었다.


이제 어디로 갈까.

거대한 인성병원 뒷골목엔 장미꽃이 피어 있을까.

오 헨리의 소설 ‘마지막 잎새’를 바라보듯 어느 집 울타리에 핀 유월의 장미를 환자는 내려다보고 있을까.

하얀 시트가 덮여지고, 마지막 목례가 끝난 죽은 자는 과연 어디로 가는 걸까.

병원 뒷골목은 깊고 좁고 멀었다.

나는 퇴원한 환자처럼 석양 속을 걸었다.


저쪽으로 길이 있을까 궁금했을 때 길이 가늘고 희미하게 꺾여 있었고, 집 한 채가 허물어져 밭이 되어 있었고, 기어코 막다른 집 철문은 굳게 자물쇠를 물고 있었다.

어느 집 철문 안 저쪽엔 거울 같은 풍경이 여름을 예고하고 있 었다. 플라스틱 슬리퍼 한 짝이 놓여 있는 시멘트 복도를 고양이가 지나갔다.


돌아 나와 골목을 꺾어들자 들장미 한 줄기가 흰 벽을 넘고 있었다. 그 빨간 장미가 유월이었다.

하늘엔 가느다란 전선줄이 뻗어 있고, 어쩌면 그것이 혈관이 되어 인성병원 어느 환자에게 몰래 공급되는지도 모른다. 유월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계절이다.


안녕. 유월이 간다.

안녕. 2020년 유월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굿바이. *








최돈선 시인. 춘천문화재단 이사장. 춘천의 골목엔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그것이 궁금한 시인은 골목순례를 결심했다. 골목은 춘천시민의 가장 깊은 내면이며 참모습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