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년을 나는 육림고개를 넘나든다. 고개 꼭대기에 올챙이국수집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따금씩 어머니가 생각날 때마다 올챙이국수를 먹는다. 어머닌 여름날 햇옥수수를 따서 올챙이국수를 해주시곤 했다.
올챙이국수는 메옥수수를 갈아 구멍 난 체에다 내려 먹는 음식이다. 내린 모양이 딱 올챙이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육림고개 올챙이국수 집은 2대째 영업을 하고 있다.
홍천·원주 방면에서 시청 쪽으로 오르는 길을 마가리고개라 한다. 그 고개턱 왼쪽으로 춘천에서 제일 큰 극장이 있다. 육림극장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중앙시장으로 오르는 고갯길을 육림고개라 불렀다.
하지만 그토록 번성하던 육림극장이 문을 닫은 지는 꽤 오래되었다. 지금은 육림영화전시관으로 바뀌어서 당시의 스튜디오나 영사기, 필름, 포스터 등이 골동품처럼 전시되고 있다.
육림극장만 쇠락한 것이 아니다. 2000년대 들어 재래시장 들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곳곳에 거대한 대형마트가 생겨나자 시장은 숨이 막혀갔다. 춘천에서 제일 흥성하던 중앙시장도 사정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중앙시장에 의지하여 명맥을 이어가던 육림고개는 빈 가게가 늘어났다. 사라진 것들은 다시금 돌아오지 않았다.
장거리에 남은 가게라곤 기름집이나 떡집, 야채가게, 빈대 떡집, 강냉이집, 짙은 원색의 이불집 정도였다. 골목길은 스산하고 괴괴했다.
그러나 그런 거리에도 재생의 꿈틀거림이 있게 마련이었다. 낡고 고루한 풍경이 새로운 기운에 의해 서서히 변모해 갔다. 어디선가 봄내음이 끼쳐왔고, 설렘이 왔고, 눈빛이 다른 젊은이들이 이 황량한 골목과 거리를 누비기 시작했다.
달라짐은 늘 젊음과 함께 이루어져 과거의 얼굴들을 새롭게 바꾸어 놓았다.
낯선 거리에 하나둘씩 낯선 이름들이 생겨났다. 청년몰이란 이름으로 모여든 젊은이들은 서로가 낯설었다.
이 육림고개에 어떤 애환이 있었는지, 이 육림고개에 어떤 예술인이 배회했는지, 청년들은 몰랐다.
어두운 골목길 허름한 주점에서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를 이야기하던 때가 있었음을 몰랐다. 소설가 이외수가 다방 DJ를 했던 일, 어느 날 그가 술이 떡이 된 채 육림고개를 오르다가 휘영청 뜬 달을 향해 팔뚝질을 한 일도 알 턱이 없었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하던 시절엔 육림고개 골목 고리끼주점엔 젊은이들로 북적였다. 독재정권에 항거하던 그때 그 시절, 그곳에서 그들은 울분과 투옥과 좌절을 이야기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그들이 투쟁해야 할 길을 이야기했고, 다가올 미래의 불확실성을 이야기했다. 그렇게 밤새도록 통음했던 그 거리를 지금의 젊은이들은 까마득히 몰랐다. 그들에겐 이 육림고개가 그냥 신천지일 뿐이었다.
바로 그 거리, 그 자리에 깔끔한 현대풍의 디자인이 들어섰다. 낡은 문과 낡은 창, 실내의 어둑한 곳이 물러나고, 음습하고 어둑했던 골목에 반딧불이 같은 불들이 켜졌다.
이제 이 육림고개는 고리끼의 어두웠던 거리에서 심플 하고 밝고 발랄한 거리로 변모해 갔다. 깔끔한 서구적 감각의 거리는 젊은이들의 무대가 되었다.
그래서일까.
육림고개 올챙이집도 ‘내부수리 중’이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살아왔던 좁고 어둡고 고루했던 집을, 뒤를 이은 아들 며느리가 밝고 넓고 쾌적한 현대적 감각의 올챙이집으로 바꿀 모양이었다.
왠지 허망했다. 과연 어떤 모습의 국수집으로 변모하게 될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갑자기, 사라지는 것에 대한 깊은 시름이 왔다.
하지만 받아들여야 했다. 사람이 바뀌면 환경도 바뀌는 법이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문화는 과거의 추억을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들르고 싶었던 올챙이국수집의 과거에서 바로 건너편 돈가스집의 현대적 공간으로 옮겨 점심을 먹기로 했다. 돈가스를 주문했고, 돼지고기 육수의 우동을 주문했고, 양송이버섯스프를 주문했다.
자리를 함께 한 일행들은 식사를 하며 서빙하는 젊은이에게 음식점 이름 <수플레>에 대해 물었다. 이 집에선 수플레를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플레는 없지만 수플레처럼 15분 내에 음식이 조리되어 나온다는 뜻이라고 했다. 바삭한 돈가스와 쫄깃한 면발의 우동은 손님들 입맛에 맞았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다. 식사를 마쳤으니 거리를 어슬렁거려 볼 참이다. <수플레>골목 바로 앞엔 <철든식탁> 이 마주 보고 있고, 그 위로 <육림객잔>이 있었다. 부추깐풍기와 갈비짬뽕을 파는 <육림객잔>. 입구로 들어가면 <수아마노>라 이름한 이탈리안 요리집도 성업 중이었다. 커다란 집 한 채를 사이좋게 나누어 조성된, 미니 음식점타운인 셈이다. 이곳을 지나 골목을 지나가면 명동으로 통하는 제법 큰길이 보인다. 오른쪽으로 가면 춘천에서 제일 멋지고 화려한 명동거리가 나온다. 하지만 나는 방향을 반대편 육림고개 골목 쪽으로 틀었다.
첫눈에 띈 것이 사거리 전봇대였다. 아니 전봇대의 피에로였다. 전봇대마다 고깔을 썼거나 검은 안경을 쓴 남자 피에로가 그려져 있었다. 어느 전봇대엔 검은 안경을 벗고 웃는 피에로 곁에 예쁜 애인 피에로가 서 있었다. 어쩌면, 어쩌면 아이 피에로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거리를 눈여겨보며 내려갔다. 역시 아이 피에로가 있었다. 아마도 육림고갯길 피에로는 한가족임에 틀림없다.
앞으로 이 거리는 피에로의 거리가 될 터이다. 안개가 짙은 날이라면 더욱 좋다. 골목골목마다 마법의 피에로가 나타나 하얀 새를 날리리라. 문학을 이야기하던 시인과 소설가는 없어도 피에로의 하얀 새는 꿈의 시가 되고 추억의 소설이 되리라.
1980년대 민중미술을 선도했던 인형화가 황효창의 전봇대 그림은 육림고개의 전설로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육림고개는 변화된 거리다. 청년들이 낯설게 돌아온 거리다. 그들이 이젠 여기 주인인 것이다.
장신구 만드는 공방이 있고, 인형이 진열된 소품가게가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고, 닭강정을 볶는 집이 있고, 막걸리 대신 수제맥주를 만들어 파는 조그만 독일풍 가게가 있는 거리. 무지개빵 냄새가 구수하게 퍼지는 거리, 외딴 골목의 홍차전문집, 진한 커피를 내리는 조선커피집, 그 바로 위 <1988>의 경양식집, 케이크와 마카롱을 만들어 파는 과자 굽는 집, <현대한약방>과 <처방전>이 나란히 붙은 이색적인 찻집, 유명한 거울집이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달랑 거울 하나만 울타리에 남은 주차장 건너편 서민주막집, 하지만 이 서민주막도 새로 들어선 가게임을 금세 알 수 있다.
밤이 되었다.
정월보름달이 떴다. <1988> 경양식집에만 불이 환하고 대부분의 가게는 불이 꺼졌다.
<조선커피>집 벽면에 걸린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도 깊은 어둠에 잠겨 있으리라.
불쑥 어느 골목에선가 피에로의 요정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통금사이렌은 밤이 깊은데도 울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