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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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50

2020.3
#봄내를 품다
김길소의 그때 그 사건 39
성금 모금운동
걸핏하면 벌였던 성금 모으기

춘천교대부속국민학교 학생들이 수재의연금 모금함에 성금을 기부하고 있다.(1984.9.5.)


우리 속담에 ‘보리 안 패는 삼월 없고, 나락 안 패는 유월 없다’는 말이 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찾아오는 절기節氣 속에 넘기 힘겨웠던 가파른 보릿고개길이 가로 놓여 있음을 넌지시 시사한다.




춘천 명동거리에 설치된 구세군 자선남비에 오가는 시민들마다 자선의 손길을 베풀고 있다.(1984.12.19)


식량난 극복 위한 돕기운동이 효시


‘보릿고개’는 겨우내 아껴온 묵은 곡식이 다 떨어져 햇보리가 여물기 이전까지 나락을 보기조차 힘들었던 어려운 시기를 가리킨다. 일제강점기가 끝난 8·15광복 이후부터 1970년대 이 전까지는 이 시기를 춘궁기春窮期 또는 맥령기麥嶺期라고 불렀다.


정부는 양식이 떨어져 굶주림에 허덕이는 가정을 절량絶糧농 가로 분류해 온 국민과 손을 맞잡고 구호대책을 세워 가난을 견뎌냈다.

비단 식량난 극복을 위한 불우이웃돕기뿐만이 아니었다. 우리 사회를 지탱해 나가는데 난관에 부딪힐 적마다 십시일반十 匙一飯으로 티끌을 모아 ‘나눔의 문화’를 실천하는 미덕美德을 가꿔 나갔다.





도여성단체협의회 체육성금 모금을 위한 간이음식점 운영.(1978.6)


언론사 창구가 주도


우선 설과 한가위 같은 명절을 앞두고는 해마다 △불우이웃돕기 성금 창구가 어김없이 개설됐다. 가난과 질병을 비롯, 우리 사회의 그늘에서 시달리고 있는 어려운 이웃에게 온정을 베푸는 운동이었다.

지난 1959년 전국을 강타한 사라호 태풍이 몰아친 후 정부는 전국적으로 △수해의연금품을 모아 수해의 아픔을 극복했다. 치수治水사업이 미흡했던 터라 장마나 태풍이 할퀴고 지나간 상처를 의연금품을 모아 복구에 나섰다.


어느 해에는 초여름 장마에 이어 가을 장마까지 겹쳤던 적 도 있었다. 이와 반대로 가뭄이 극심했던 해에는 △한해대책 성금 모금운동까지 벌였다.

개발연대의 전국체육대회 위상은 대단했다. 전국 각 시·도 단위의 선수들이 고장의 명예를 걸고 기량을 겨뤘던 국내 최대의 체육잔치였다. 전 국민이 열광했던 이 대회에서 강원도는 항상 최하위권에 머물렀다. 선수층이 얇은 것은 그다음 문제였다. 기량이 뛰어난 팀과 선수가 있는데도 훈련출전비 마련이 힘들어 출전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래서 시·도 단위 순위에서 항상 꼴찌로 처졌다. 이에 강원도와 강원도교육청을 비롯한 도체육회가 주축이 되어 해마다 △체육진흥성금 모금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춘천시 등 도내 각 시·군 단위와 각급 학교 차원에서도 훈련비와 출전비 염출을 위해 성금을 거뒀다. 온 도민의 적극적인 참여가 1960년대 초반부터 1990년도 초반까지 이어졌다. 이것이 밀알이 되어 전국체전 중위권 진출에 이어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테스트 이벤트 성격을 띠었던 제66회 전국체전을 강원도에서 개최하는 꿈을 이뤄 성취감과 자신감을 품을 수 있었다.(봄내지 2017년 8월호 참조)


이런 향토 차원의 성금 모금운동의 중심에는 항상 봄내골 에 포진하고 있는 언론사들의 역할이 컸다. 활자나 전파 매체를 가릴 것이 없었다. 따뜻한 지원의 손길을 호소하는 대문짝만한 사고社告를 1면에 게재하거나 방송에 내보내면 언제나 첫날부터 성원의 발길이 이어졌다. 심지어 코흘리개들이 과자값을 들고 오거나 교도소 재소자들의 속죄의 뜻을 담은 훈훈한 이야기들이 꼬리를 물었다.


신문사는 성금 기탁자의 이름과 사진을 액수와 함께 1면에 큼직하게 게재했다. 방송사들은 첫날부터 뜨거운 접수 창구의 모습을 현장 중계해 모금 열기를 북돋웠다. 이 시기에는 “누가 얼마를 냈다”는 이야기가 화젯거리가 되었던 추억이 삼삼하다.


그리고 다른 시·군에 비해 이런 성금모금운동을 성공으로 이끄는 데는 언제나 봄내골 주민들의 관심과 참여가 가장 큰 몫을 차지했다.



농협 중앙로지점 금 모으기 운동 (1998.1.12)


부조처럼 상례화됐던 모금


거국적擧國的으로 이뤄진 성금모금운동도 시대의 흐름에 맞춰 봇물을 이뤘다. 지난 1960년대 후반부터는 해마다 △방위 성금 모금운동이 이어졌다. 모자라는 국방비의 여백을 각종 성금으로 채워 나가며 국군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1970년대는 새마을운동이 전국적으로 요원爎原의 불길처럼 일어났다. 초기의 농가소득 배가운동 성격이 성과를 거두자 도시 직장 공장까지 사회전반으로 확대됐다.

정부 주도하의 근대화 운동이 경이적인 성과를 거두게 된 이면에는 전국적으로 이뤄졌던 △새마을성금·성품 모집 운동의 몫이 컸다.


민족의 수난사를 자손만대에 전할 수 있는 애국의 도장道場인 △독립기념관 건립기금 모금운동이 지난 1982년 전국적으로 펼쳐졌다.

국난을 극복하고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 헌신한 조상들 이 남긴 자취와 사료를 모아 후손들에게 민족의 얼과 자존심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행정조직은 물론 반상회 단위까지 동원됐던 이 모금운동에는 ‘한 장의 벽돌을 쌓자’는 마음으로 웬만한 기업들이 거의 참여했다.

평화의 댐은 봄내골에서 가까운 화천읍 동천리 북한강에 지난 1987년에 세웠다. 북한이 금강산댐을 지어 수공水攻에 나선 것을 막고 홍수를 예방하려는 것이었다. 2차 완공 후 현재는 높이 125m, 길이 601m에 저수량이 26억3,000만 톤에 이르는 큰 규모가 되었다.


북한의 금강산댐에서 “물폭탄을 쏟아낼 경우 서울 63빌딩의 허리까지 채운다”는 그래픽에 국민들이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전 국민이 △평화의 댐 모금운동을 벌여 무려 733억원이라는 거금을 모아 댐을 건설할 수 있었다.

성격은 약간 다르지만 지난 1997년에는 △금 모으기 운동도 벌였다. IMF 구제금융으로 생긴 국가부채를 갚기 위해 국민들이 가지고 있던 금을 자발적으로 내놓는 운동이었다. 전국적으로 펼쳐진 이 운동에는 351만명이 참여해 21억3,000만 달러 치의 금을 모아 국가경제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정부와 한국신문협회와 같은 언론단체들이 손을 맞잡고 벌였던 전국 단위 성금모금운동 가운데는 광주사태(현재는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통칭)의 비극을 돕기 위한 △광주 시민돕기운동도 펼쳐졌다. 그리고 소년소녀가장 돕기나 결식아동 돕기와 같이 사랑의 손길을 기다리는 불우이웃돕기 운동의 불길은 연중 꺼질 줄 몰랐다.

어쩌면 관혼상제冠婚喪祭의 부조금扶助金이 개인적인 것이라 면 성금은 공적이고 사회적인 미덕美德으로 여겨질 정도로 상례화常例化돼 있었다.





소낙동에서 주민들이 반상회를 하는 자리에서 독립기념관 성금을 걷고 있다.(1982.9)


준조세 지적과 부작용 극성


성금 모금운동은 굴곡의 역사에 얹혀져 나름대로 그 당시 사회의 흐름에 한획劃을 그어 온 만큼 부작용과 뒷얘기도 적지 않았다.

기업이나 개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성금을 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강제는 아니라고 하여도 서로의 이해와 권유에 못 견뎌 참여함으로써 준조세準租稅에 가깝다는 비판의 소리까지 나왔다.


실제 1970년대에 어느 경기단체 회장을 지낸 종합건설회사 사장은 필자 앞에서 이런 넋두리를 여러 번 털어놓았다. “협회나 회사 차원에서 거액의 성금을 기탁해도 관허업을 하다 보면 여기에 그칠 수 없어요. 성금을 받는 기관마다 기탁을 바라고 직장이나 가족 구성원들이 모두 참여해야 하기 때문에 아예 연초에 합리적으로 예산을 짤 때 미리 준비해 둬야 해요.”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집권층이 민심을 다잡아 나가는 데 정치적으로 이용된 사례도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름대로 흐트러진 국방의식을 다질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휴전선 발치에 북 한강의 흐름을 막고 있는 평화의 댐이 지금도 을씨년스러운 모습으로 서 있다.

더러는 자선慈善을 앞세운 허울 좋은 모금운동이 우리 사회 전반에 극성을 부린 시기까지 있었다. 돕기 상품(생활용품과 학용품 등)을 강매하거나 성금함을 들고 가정과 직장, 거리 곳곳을 찾아다니는 것은 약과였다.


아예 남의 다방을 빌려 일일찻집을 차려 티켓과 물품 구매를 반강제로 떠맡기는 행위가 사회적으로 극성을 부리기도 하였다.

결국 남의 힘을 빌리거나 폐를 끼치는 자선 일일찻집 운영은 1984년 이후 관계 당국이 전면금지령을 내리고 단속에 나서 그 이후 자취를 감춰버렸다. 오죽 민폐가 극심했으면 이런 조치를 했을까 당시를 뒤돌아보게 만든다.

심지어 돈을 내놓겠다고 애드벌룬을 띄운 후 감감무소식이 어서 모금을 주관하던 측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경우도 왕왕 빚어졌다.


이런 성금 모금의 성과는 민선 자치단체장 치적의 잣대가 됐던 시절도 있었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기업이나 개인이 공익활동에 돈을 쾌척하면 누구나 존경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풍토가 자리 잡혀 있다. 반면 우리는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색안경을 끼고 보는 좋지 못한 경향까지 남아있다.

유난스럽게 호들갑을 떨거나 잦았던 개발연대의 각종 모금 운동이 우리 사회 곳곳을 훈훈하고 따뜻하게 만들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역기능도 만만치 않았음을 읽게 된다.





나눔문화 실천할 제도적 장치 개선


세월이 많이 변했다. 요즘은 보릿고개도 사라졌다. 기부 운동도 많이 성숙되고 달라졌다. 수많은 NGO단체의 건실한 활동도 활발해져 기여의 폭도 커졌다.

빨간 사랑의 열매가 상징인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운영되고, 기부금품을 내면 기업은 법인세, 개인은 소득세 감면혜택 을 받는 등 ‘나눔의 문화’를 실천할 제도적인 장치도 많이 마련됐다.

툭하면 벌어졌던 모금운동도 정부의 복지정책과 공익법인의 확대와 더불어 많이 자취를 감춰 버렸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누군가의 도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아직도 남아있다.

지금도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19 확산 사태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 가운데 자원봉사와 성금·성품이 답지해 훈 훈한 ‘나눔의 불길’이 꺼지지 않고 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거나 ‘밥 열 술이 한 그릇의 밥이 된다 (십시일반十匙一飯)’는 상부상조相扶相助 정신의 구현을 위해 사회적 기금의 투명성과 공정성, 신뢰성을 보다 넓혀 나가야 함 을 깨닫게 한다.

‘열정은 성공의 열쇠이고, 성공의 완성은 나눔이다’는 세계적 투자가 워런 버핏의 말이 더욱 새롭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