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옛날 신문에 나온 춘천의 기사와 사진을 보면서 그 시절 춘천사람들의 모습을 기억해 보는 코너입니다.
6·25 때 소실됐다가 1958년 새로 완공된 춘천역사의 모습. 2005년 경춘선 복선전철 공사로 철거된 후 지금의 현대식 역사가 지어졌다.
타지에서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 춘천에서 왔다는 말을 하면 대부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외지인의 뇌리 속에 춘천은 낭만이라는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는 듯하다. ‘춘천 가는 기차’란 노래를 따라 부르며 기타를 멘 젊은이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 춘천이었다. 낭만의 도시란 이미지가 생겨난 요인은 많겠지만 호수의 도시라는 지형에 더불어 경춘선이란 철로가 큰 영향을 주었다.
서울의 성동역과 춘천역을 연결하는 93km의 경춘선이 만 2년 간의 공사를 거쳐 1939년 7월 22일 개통식을 거행하였다. 전쟁 수행에 있어 절대적 핵심산업이 철강 제조이고, 철강 제조에는 전력 공급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경춘선은 철강 생산에 필요한 전력 공급을 목적으로 화천발전소 건설 기반시설로 부설됐다. 즉, 일제강점기 국토자원의 수탈을 목적으로 한 철도였다.
경춘선의 종착지인 춘천역 역사는 경춘선 개통 1개월 전에 완성되었고, 124평의 건평에 평가목조平家木造의 일본식 건물구조였다.(매일신보, 1938.12.28. 기사 참조) 1936년 역사가 들어설 장소로 소양강과 가까운 전평리前坪里가 선정됐다. 당시 전평리는 앞뚜루라고 불리던 완만한 구릉지였고, 화천으로 연결되는 소양강 상의 주요 지점이었다. 거주민 대부분은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던 빈민이었다.
100여 호에 달하는 거주민이 강제로 이주해야 할 처지에 놓였는데 이주지와 보상 비용에 대한 협의가 제대로 진척되지 못했다. 당시 손영목 강원도지사가 직접 나서서 달콤한 사탕발림으로 만주로 이주할 것을 권하기도 했다.(매일신보, 1937.2.11. 기사 참조) 일제강점기 국내 거주민의 만주 이주사는 수탈 현장에서 국외로 내몰리는 일반 백성의 뼈아픈 고통의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지어졌던 춘천역사는 6 · 25전쟁 초기에 소실됐고 1958년 12월에 새로운 역사가 완공됐다. 1977년 한 차례 증축 공사를 거쳤다가 2005년 경춘선 복선 전철 공사로 다시 철거되고 이후 새로운 현대식 역사가 건설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일제강점기 춘천역은 화천댐 공사 자재와 인부의 집합소였고, 60년대에는 월남전 파병 장병의 집결지이자 출발지였다. 70~80년대 젊은이들의 청춘과 낭만이 넘쳐났다면 현재는 수도권 전철망으로 진입하여 서울에서 통학하는 학생들과 직장인, 여가를 즐기는 노년층들이 주로 이용하고 있다.
앞으로 춘천역이 종착지가 아니라 화천, 철원을 거쳐 북쪽으로 또는 동쪽으로 계속 연결되어 나가는 남북 강원도의 중심지이자 유라시아로 뻗어 나가는 전초 기지 역할을 맡기를 기대해 본다.
개통식 앞둔 춘천역사
경성京城이 기점 춘천春川이 종점인 93키로 5부의 경춘철도 공사는 오는 7월 개통을 앞두고 주야겸행으로 레일 부설, 각 역을 준공하기 위해 크게 분주한데 구내 총평수가 거의 5천 평으로 종점역인 만큼 대규모적으로 건설 중에 있던 춘천역春川驛도 16일 드디어 외부 건축만 완성되어 앞으로 몇 날 안 걸려 내부 정돈이 끝나리라 한다.
이것으로 연선 각 역은 준공이 목전에 절박하여 있고 철교도 전부 완성, 레일도 2키로 밖에 안 남아서 말일까지는 전 공사가 완전히 끝나게 되어 7월 23일경에는 대망의 개통을 보리라 하며 목하 춘천 번영협회에서는 개통식에 대한 만반 준비를 급히 하고 있다 한다.(사진은 외부완성된 춘천역)
<동아일보 1939년 6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