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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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53

2020.6
#봄내를 품다
최돈선의 골목이야기 6
서부시장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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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시장 가는 길엔 아직도 봉운장과 실비막국수가 있다.



옛날, 사람들은 서부시장을 가기 위해 사창고개를 넘었다. 자동차는 드물었다. 그 거리는 걸어 다니는 길이었고, 그 길은 오밀조밀 상점들이 그림처럼 모여 있는 거리였다. 멀리 강 건너 눈 덮인 삼악산에 해가 지면 상점의 그림자들이 길을 덮었다. 그러면 상점의 진열창이 오렌지 빛으로 반짝이곤 했다.


50 · 60년 전엔 춘천총포사란 이름의 수제엽총을 만드는 공방이 있었다. 우리나라 총포면허 1호인 장인匠人은 총구에서부터 개머리판까지 일체를 손으로 만들었다. 이 수제품은 명품으로 사냥꾼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그곳에선 늘 쇠 깎는 소리와 쇠를 두드리는 망치 소리가 났다. 총기 모양의 형틀에 쇳물이 부어져 시푸른 연기가 솟아났다. 그 연기는 쇳냄새를 풍기며 환기통을 빠져나와 겨울 저녁하늘로 사라졌다. 그때면 사냥꾼들이 하나 · 둘 총포사로 찾아들었다.


그 사냥꾼들의 어깨엔 산양이나 사향노루가 메어져 있었다. 그러나 허탕 친 사냥꾼도 있었다. 몇 주일이고 산속을 헤매다 사냥을 망친 사냥꾼들은 빈 어깨로 돌아왔다. 비록 산양이나 곰을 잡지는 못했지만 허리춤엔 꿩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공장 가게 안은 19공 탄난로가 이글거렸다.


막걸리를 손에 든 설악산 사냥꾼과 태백산 사냥꾼들은 산짐승 이야기로 밤을 새웠다. 곰가죽 옷을 해 입고 사냥을 나갔다가 다른 사냥꾼의 오인사격으로 비명에 간 이야기도 있었다. 사냥꾼의 처는 어느 늙은 영감에게 씨받이로 팔려 갔다고 했다. 사창고개 골목과 거리는 이 사냥꾼들의 무용담으로 그렇게 늘 흥청거렸다.


1967년 조수보호 및 수렵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었다. 사냥이 엄격히 통제되자 전문 사냥꾼들이 사라졌다. 엽총을 만들 수 없는 총포사공장은 문을 닫았다. 총포사 건물이 헐리고 2층집의 자색 시멘트건물이 들어섰다. 오랜 세월이 지나 지금은 육고기를 칼질하는 정육점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총포사와 이웃했던 갈비집 봉운장은 그대로 남았다. 봉운장 건너편 실비막국수도 아들이 대를 이어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 아들도 어느덧 초로의 나이가 되었다. 몇몇 식당과 상점은 남아 있지만 대부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천도교도, 건너편 관棺 짜는 집도, 하얀 솜틀집과 그 옆의 대장간도, 총포사 건너편 소목장이 일하는 목공소와 꿈꾸는 사진관도.



총포사터에 세워진 정육점




그런데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서부시장으로 가는 또 하나의 길이 뚫린 것이다. 춘천시는 사창고개 위쪽 언덕에 구멍을 냈다. 그 구멍을 요선터널이라 했다. 길은 터널을 지나 곧장 서부시장에 닿았다. 1971년에 낸 그 요선터널이 1994년에 헐렸다. 이제 요선터널은 이형재 화가의 그림 속에서나 아련히 존재할 뿐이다.


춘천의 진산인 봉의산을 따라 길게 늘어진 능선 위로 조가비처럼 다닥다닥 달라붙어 있던 판잣집들도 터널과 함께 사라졌다. 그 높은 언덕의 흙은 쉴 새 없이 공지천으로 운반되어 호수를 둘러 싼 긴 둑이 되었다. 능선은 평평해졌고 길은 넓혀졌다. 거대한 아파트가 사창고개와 새로 난 서부대성로 사이로 우뚝 솟아올랐다.


옛날 판자촌 마을 사람들과 사창고갯길에 면하여 살아가던 사람들은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졌다. 낯선 사람들이 몰려왔고 그들은 이전에 여기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곳에 총포사가 있었는지, 대장간이 있었는지 그들은 알 필요가 없었다. 아파트의 주민들은 바빴고, 언제나 반짝이는 차를 타고 다녔다.


사창고개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졌다. 그토록 번성하던 거리가 게으르도록 한산해졌다.

예전부터 사창고개는 그 이름으로 하여 사람들의 가십거리로 회자되어 왔다. 그 이유는 한국전쟁이 휴전되고 나서 사창고개 아래쪽으로 집창촌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가늘고 비좁은 골목길이 정맥처럼 뻗어 있었다. 사람들은 그 골목을 장미촌이라 불렀다.


사창社倉은 본래 조선시대 문종 때 지방군현의 촌락에 설치한 곡물기관이었다. 그 기관의 주된 임무는 빈민구호였다. 이 고개 어딘가에 그런 기관이 존재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빈민을 구제하는 기관이 있었던 자리에 춘천 유수 민두호의 귀재당歸在堂이 세워졌다.


귀재당은 감사監司나 수령守令의 공적을 기려 백성들이 받들어 모시는 사당이라 했다. 그러나 민두호는 그런 훌륭한 수령이 아니라 탐관오리였다. 매천야록의 저자 황현은 오하기문에 ‘춘천부 유수 민두호의 탐학으로 강원도민들은 뿔뿔이 흩어져 유랑인이 되었다’고 썼다. 백성들은 그를 쇠갈고리 민두호라 불렀다. 그 민두호의 아들 민영휘는 당시 조선의 최고 부자가 되었다.


귀재당은 나중에 유랑하는 날탕패와 남녀 사당패의 숙소가 되었다. 이 떠돌이 유랑인들의 숙소는 홍등가나 다름없었다고 칼럼니스트 이규태는 썼다. 어쩌면 귀재당은 사창촌이 될 운명을 지녔던 모양 같다.

사창社倉이 사창私娼으로 변모한 것은 참으로 기막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왼쪽) 사라진 요선터널(그림 이형재) / (오른쪽) 사창고개의 사이사이 골목길 풍경





(위) 사창고갯길로 오르는 골목길 / (중앙) 처마를 맞댄 좁은 골목길 / (아래) 사창고갯길과 아파트의 공존




어느 날 머리 더부룩한 한 청년이 골목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이 수상한 청년은 사창고개 위에서 좁다란 골목으로 내려가 서부시장 끝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다시 방향을 되돌려 비탈진 골목길을 걸어 올라오곤 했다. 그러다가 여인들과 만나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었고, 때로는 집집마다 발그레하게 꽃이 핀 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 달여를 자주 등장하다가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이 장발의 청년은 어느 날 ‘꿈꾸는 식물’이란 이름의 소설을 써 세상에 냈다. 책은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하루아침에 이 무명의 소설가는 장미촌을 무대로 한 스타가 되었다.




사창고갯길에서 내다본 중도와 호수 풍경



이외수의 첫 장편소설 <꿈꾸는 식물>, 1978



작은형이 돌아왔다.

이렇게 시작되는 소설 ‘꿈꾸는 식물’은 사창고개의 상징이 되었다. 1978년, 이 소설을 기반으로 하여 공전의 히트를 친 고려원은 이 나라 최고의 출판사로 우뚝 서는 계기가 되었다.

장미촌을 떠나지 못하는 식물성 인간들, 그 군상들의 모습이 처절하리만큼 아름답게 묘사된 이 소설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당대 최고의 문학평론가 김현은 ‘충격적인 섬세한 감수성’이란 제목의 비평문을 썼다. 혜성같이 등장한 이 소설가를 문단에서 주목한 것은 당연했다. 섬세한 감수성과 독특한 문체는 일거에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이 극단적인 유미주의 소설에 매료된 독자들은 비쩍 마른 이 무명소설가를 향해 선망과 경의를 표할 정도였다. 이외수, 지금 그 이름은 춘천의 브랜드가 되었다.


지금 이 소설가는 사고로 뇌를 다쳤다.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아직도 말을 하지 못한다. 그는 아마도 깊은 자기 세계에 침잠해 있는 듯싶다.


‘꿈꾸는 식물’의 무대가 된 장미촌은 이제 말끔히 지워지고 없다. 단지 오랜 전설처럼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만 가늘 게 전해질 뿐이다.

장미촌골목을 지나다니며 기웃거렸던 손님들도, 비좁은 골목을 비추던 석양도 영영 자취를 감춰버린 지금, 그곳엔 새롭고 번듯한 길이 났다.


이 평온한 골목에 역사의 아픔이 자리했었다. 살기 위해 부평초처럼 이 골목으로 몰려왔던 꽃다운 청춘은 이제 초로이거나 고혼이 되었거나 했을 것이다.

이외수 작가가 돌아온다면 그의 심혼에 어떤 아름답고 비극적인 꽃이 새로이 피어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외수 작가는 깨어날 것이다.

그의 쾌유를 빈다. *










최돈선 시인. 춘천문화재단 이사장. 춘천의 골목엔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그것이 궁금한 시인은 골목순례를 결심했다. 골목은 춘천시민의 가장 깊은 내면이며 참모습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