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기념비
옛 공지천 다리는 봄내골을 진입하는 첫 관문이었다. 효자동을 가로지른 냇물이 소양강 하류의 대바지강 줄기와 만나는 어귀다.
벚꽃이 지천으로 흐드러졌던 천변은 어느새 파랗게 채색됐다. 호수 위에는 물놀이를 즐기는 오리배가 가득하다.
원래 공지천의 이름은 곰지내였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퇴계 이황이 춘천 외갓집에 놀러왔다가 머슴에게 여울 짚을 곰지내에 버리게 했더니 물고기로 변해 공지어孔之魚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전설과 함께 붙여진 이름이다.
봄내골 주민들이 가장 즐겨 찾는 명소로, 산책길 모퉁이를 지나려면 언제나 로스팅한 커피 향이 그윽한 곳으로 소문났다.
공지사거리에서 다리를 건너가는 중간, 조각공원 맞은편에 아프리카 특유의 건축 양식을 지닌 아담하고 이색적인 ‘에티오피아 한국전참전 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올해는 6·25전쟁이 일어난 지 70주년 되는 해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기도 하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날아와 선뜻 치열한 전투에 참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전사戰史와 그 후 70년간 이어져 온 선린善 隣의 관계를 살피려 기념관을 찾았다.
한국전 참전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한 하일레 셀라시에 에티오피아 황제 (1968.5.19.)
무적 신화를 써낸 용맹
한국전쟁은 정부 수립(1948년) 이태 뒤인 1950년 6월 25일에 터졌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세계평화를 지키기 위해 병력 파견과 의료 지원을 결의, 참전에 나섰다. 동북아시아의 전략적 요충지인 한국을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에 따라 미국을 비롯, 전투지원국 16개국과 의료지원국 5개국이 참전했다. 이때 에티오피아도 1만4,500㎞나 떨어진 머나먼 길을 한달음에 달려와 3년 1개월 동안 이어진 치열한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웠다.
에티오피아가 아프리카 대륙에서 지상군을 한국에 파병한 것은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치열했던 1951년 5월 6일이었다.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명을 받아 참전한 군인들은 막강한 황실 근위대인 강뉴(초전박살이라는 뜻임)부대가 주축을 이룬 최정예부대였다. 산악전투에 능한 이들은 도착 즉시 고지가 많은 봄내골 인근의 화천, 양구, 철원 지역에서 벌였던 고지쟁탈전에 투입됐다.
강인한 강뉴부대의 전과戰果는 지금도 전사戰史에 길이 남아 있을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눈이 쏟아지는 혹독한 추위나 무더운 더위와 맞서야 하는 전혀 다른 날씨 속에서 무려 253회의 전투를 벌였다. 그 결과 모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포로가 한 명도 없는 진기록을 세웠다. 우리나라의 ‘귀신 잡는 해병대’와 비견될 정도로 용맹성을 떨쳤다.
그러나 전사자 121명, 부상자 536명 등 모두 657명이 이역만리에서 고귀한 피를 흘렸다. 휴전 이후에도 1965년 4월 철군하기 이전까지 평균 1,200명 규모의 보병 1개 대대병력을 유지 시키며 총 6,037명 규모의 전투병력을 파병했다.
특히 전쟁이 벌어졌던 1953년 동두천에서는 병사들이 월급을 모아 고아원을 설립, 전쟁고아들을 보살폈다.
휴전 이후에는 적십자 소속 간호요원을 파견, 대민의료지원사업을 펼쳤다.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기념관
혈맹의 발자취 담긴 전시관
에티오피아 참전기념관은 참전기념비(1968년 건립)가 세워진 지 38년 만인 2007년에 2층 규모로 세워졌다. 정문 위쪽에는 참전 16개국의 국기가 나란히 펄럭이고 입구 양쪽에는 태극기와 에티오피아 국기가 붙어 있어 첫눈에 참전기념관임을 알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수많은 사람이 참전용사들에게 감사의 뜻을 보내는 편지가 곳곳에 전시됐다. 이어 6·25전쟁 당시의 모습이 재현된 전시실(2개)과 에티오피아의 문화와 역사를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전시실(2개)이 있다.
이곳 다목적전시실에서는 참전 당시의 영상을 시청하고 참전 이후의 발자취도 살펴볼 수 있었다. 참전용사들이 첫발을 디딘 1951년 5월부터 1954년 3월에 이르기까지 2년 10개월 동안 벌였던 삼각고지, 악어고지, 사태리고지전투와 253회의 전투 기록이 담겨 있다.
실제 전쟁을 치를 때 썼던 군복과 총기류, 통신장비 등은 전쟁의 상흔을 지금도 말없이 증언하고 있었다.
기념관 내부 참전기념전시실
기념관을 나서기 전에는 전사자 121명의 이름이 새겨진 명단과 함께 참전 이유를 밝힌 기록이 참전용사들의 고귀한 용기와 희생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일찍이 에티오피아는 외세의 침략을 무찌르기 위해 국제연맹에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무위로 끝난 쓰라린 역사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으로 에티오피아로 하여금 강력한 집단행동으로 세계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따라서 에티오피아가 부유한 국가는 아니지만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UN의 대의에 따라 파병을 결정하였다.”
2층의 풍물전시실은 ‘다못악숨왕국’ 아래 찬란한 문명을 일궈낸 역사와 전통의상 악기 등을 관람할 수 있었다.
교류전시실에서는 그동안 양국이 우의를 증진시키면서 주고받은 특이한 기념품과 생활용품들이 눈길을 끌었다. 또 세계적 기호 음료가 된 커피의 최초 원산지요, 최대 생산국임이 소개됐다.
공지천변은 ‘우정의 동산’
공지천 이디오피아 카페(1985.)
봄내골이 ‘커피의 도시’를 꿈꾸게 된 밑바탕에는 에티오피아가 자리 잡고 있다. 세계 최초요, 최대 커피 생산국인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36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봄내골 에서 손수 기념비를 제막하고 돌아간 이후부터였다.
그 중심에 공지천변에 있는 에티오피아 벳(집이라는 뜻임·근화동 371-3소재)이 큰 몫을 해냈다.
지금까지 반세기가 넘도록 창업자 조정민, 김옥희 부부에 이어 딸 조수경, 사위 차중대 부부가 운영하고 있는 커피숍이다.
원두를 직접 뽑아낸 향과 맛에 심취한 커피마니아들이 즐겨 찾고 7080세대들이 데이트를 즐겼던 추억의 장소로 전국 커피 여행에 빠뜨리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덩달아 경제 발전에 따른 커피 수요 폭증도 ‘커피의 도시 조성’에 대한 꿈을 부추겼다. 여기에다 이 땅의 자유를 위해 피를 흘린 용기와 희생에 보답하자는 교류증진운동까지 가세됐다.
에티오피아의 길에서 열린 커피 문화제(2019.10.3.)
이 바람에 한때는 커피 제조공장과 시음장 등을 갖춘 전국 최고의 대단위 커피랜드를 조성하자는 부푼 계획이 추진되기도 했다.
더불어 호국보훈의 도시 조성을 위해 6·25전쟁 당시 한강 이남지역을 사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춘천대첩기념평화공원(2000년 6월 개장)이 있는 근화동 일대의 쓸모없는 땅이었던 제방 인근에 참전 16개국의 전통음식타운을 조성해 관광자원화하자는 계획도 추진됐었다. 그러나 이마저 유보돼 빛을 보지 못한 아쉬운 기억이 새롭다.
우방의 황제가 찾아왔다고 봄내골이 들끓었을 때 집사람은 환영 행사에서 국악을 연주했던 추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후 양국의 선린우호관계는 탄력을 받는 듯했다. 하지만 7년간 이어진 극심한 가뭄과 경제난으로 촉발된 쿠데타로 공산국가(1974년)가 된 후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하면서 다소 소강상태를 맞았 다. 그러나 국민들은 물론 국가 차원에서 베품과 은혜에 보답하자는 각계의 보은 활동은 멈춤 없이 봇물을 이뤘다.
지난 70년간 이어져 온 선린善隣의 관계가 차곡차곡 쌓여 이제는 공지천변을 양국 ‘우정의 동산’이라고 일컬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기념비와 에티오피아 하우스가 세워지고 기념관이 건립된 인근에 황제가 직접 심은 상록수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제25회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황영조 선수가 훈련을 쌓았던 근화동 뚝방 2.5㎞도 ‘에티오피아의 길’로 명명된 후 시민들로부터 산책의 명소로 사랑을 받고 있다.
또 2017년부터는 한국자유총연맹 주최로 에티오피아 문화제를 열어 전후 세대들에게 자유와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있다.
멈춤 없이 이어진 보은의 물결
코로나19로 세계가 펜데믹pandemic 사태에 빠져있다. 이 와중에 기념관도 잠시 문을 닫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잘 버텨낸 우리나라를 향해 세계 각국이 방역 SOS를 보내고 있다. 진단키 트 수출을 요청하고 있는 나라가 120개국이 넘는다. 어느 나라에 먼저 수출하느냐를 놓고 고민하던 정부가 에티오피아를 최우선 지원국으로 정하고 방역 물품 등을 지원했다.
더구나 민간 차원에서는 ‘6037운동’까지 펼쳐지고 있다. 바로 6·25 참전용사 6,037명의 희생과 용기를 기리고 유가족들에게 마스크를 기부하자는 따뜻한 마음이 담긴 운동이다.
기념관 안에 있는 흑백사진처럼 하얗게 빛이 바랜 파란만장한 지난 역사를 돌아보니 어느새 공지천변이 진정한 국제우호 관계의 상징처럼 다가왔다.
보훈의 달인 6월에는 이 땅에 자유의 깃발을 들어올린 용사들의 희생을 기리며 에티오피아의 길을 달려야겠다.
김길소 한국전래오락연구소장. 춘천 태생. 1970년 강원일보사에 입사해 편집국에서 강원도 전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취재했다.
편집국장, 논설주간, 상무, 전무이사를 지낸 후 언론중재위원회에서 위원과 부위원장으로 언론사와 피해자의 중재 역할을 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