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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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67

2021.8
#봄내를 품다
최돈선의 골목이야기 ⑯
여름이다, 나는 송암동 호수 시인을 만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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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씨네 기와집



옛 지씨 왕국의 골목을 지나서

흐린 날엔 호수가 짙어진다. 어딘가 가야 한다. 흐린 날엔 색채가 서로에게 스며들어 색이 번지는 날이다. 

마치 서숙희의 그림처럼 흐릿한 안개가 서려 있는 형상이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 날, 인적 드문 송암동 골목을 지난다. 

고양이 한 마리가 기와집 처마에 앉아있다 인기척을 듣고 골목 저쪽으로 사라진다. 

오래 묵은 기와집의 기왓장에서 흘러내리는 낙숫물이 골목길을 적신다. 

이 송암동에 유일하게 남은 기와집이다. 

대문엔 한자로 ‘池○○’이란 이름표가 붙어 있다. 

옛날 일제 강점기 때 이곳은 지씨네 왕국이었다. 

매일신보 1930년 9월 9일 자에 지씨 왕국 탐방 기사가 났었다. 

지씨가 거느린 가옥이 73호였고, 당시 모내기 장면을 찍은 사진이 크게 게재되어 있었다. 

모내기하는 사람들 앞에서 맥고모자를 쓰고 하얀 신사복을 입은 사람이 손가락질하며 지시하는 장면은 기이했다. 

그 사람이 바로 지씨 왕국을 이룩한 지규문 씨였다.


지씨네 골목


이제 이 기와집 하나만이 남았다. 번영했던 지씨 왕국은 이제 남아있지 않다. 

새로운 집과 새로운 골목길이 생겨나 송암동은 새롭게 변모하고 있다. 

까뚜리봉 아래 호수 쪽으로 송암스포츠타운과 빙상경기장이 들어서고 카누 나루터가 생겨나 색색의 카누가 호수를 누비고 다닌다. 

족구장은 늘 스포츠를 즐기는 시민들로 붐비고, 족구장을 지나서 호수를 끼고 목책로를 따라가노라면 호수 가운데 스카이워크가 나온다. 

사람들은 까뚜리봉 허리에 놓인 이 목책로를 좋아한다. 

자전거길과 걷는 길이 혼용된 이 길은 김유정 문인비와 연결되어 있다. 

건너편 삼악산과 서면 덕두원 마을이 훤하게 건너다보이고, 그곳으로 통하는 의암댐 위쪽 다리로 자동차들이 지나다닌다. 

그곳을 신연교라 부른다. 

옛날엔 기차가 다니는 철교였다. 

철로는 신연교를 건너 지금의 춘천역에 닿았다.



호수변 커피 끓이는 남자

골목을 빠져나가면 호수가 보인다. 

옛날엔 두 갈래의 강이  흐르는 곳이었다. 

그것이 의암댐을 건설하자 강줄기가 잠기고 붕어섬이 나타났다. 

의암댐이 존재하는 한 이제 호수는 춘천댐과 소양댐에 둘러싸인 거대한 호수를 거느리게 되었다. 

그래서 호수는 춘천시민들에겐 그림이고 시였다. 

여러 화가가 호수를 소재로 그림을 그렸지만, 그중 서숙희의 그림은 시처럼 아련한 풍경뿐이다. 

그 풍경처럼 오후 2시, 호수변에 연보라빛 트럭 한 대가 토요일과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나타난다. 

포장마차 트럭을 몰고 온 사람은 노시인이다. 

귀밑머리 하얀 노시인은 몸매가 호리호리하다. 

그가 양옆의 문을 열자 내부는 연한 핑크빛으로 온통 화사해진다. 

내부는 늘 봄인데, 밖은 회색빛 하늘이다. 

차 옆에 세워둔 배너엔 ‘커피 끓이는 남자’라고 적힌 글귀가 적적하게 서 있다. 

조금씩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한다. 

이런 날은 손님이 별로 없다. 

하지만 단골인 손님이 산책을 하다가 커피를마시러 들를지도 모른다. 

그런 손님을 위한다는 핑계로 그는 호수에 나오는 것이다. 

주전자에 물이 끓으면, 노시인은 접이식 천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비 오는 호수를 내다본다. 

그리고 구석진 곳에서 책 한 권을 꺼내어 읽기 시작한다.


고현수 시인



나는 아내의 시인

고현수.

‘커피 끓이는 남자’의 이름이다. 

고현수란 이름은 2002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춘천시민들에게 알려졌다. 

그는 자신을 유랑인이라 부른다. 

고현수란 이름이 시인이란 칭호를 얻었을 때, 그의 곁에는 어머니와 아내가 있었다. 

아내는 그가 시인이 되었을 때 가장 기뻐했으나 시력을 잃어 앞이 보이지 않았던 때였다. 

그리고 얼마 후 아내는 고현수 시인의 곁을 떠났다. 

2016년 어머니도 아들 시인과 하직했을 때, 고현수 시인은 고아가 된 느낌이었다. 

그를 위안케 하는 것은 오로지 시를 쓰는 일뿐이었다. 

문학 모임에 소리 없이 나타나 한구석에서 조용히 앉아있다 사라지는 고현수 시인을 주목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세 권의 시집과 두권의 산문집을 낸 고현수 시인은 오히려 독자들에게 더 깊은 사랑을 받았다.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그였다. 

하지만 그의 폭넓은 독서와 깊은 사유의 시적 작업은 독보적인 경지를 이루고 있었다. 

그중 그를 유일하게 이해하고 사랑한 사람은 아내였다. 

고현수 시인의 시 ‘시인’은 자신의 처지와 아내의 지극한 사랑을 읽을 수 있다.

“나는 그저 나 혼자만의 시인이다. 시인은 품격이 있어야함에 시도 당연히 품격이 있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초등학교 밖에 안 나온 사람이어서 흙 속의 시인밖엔 안된다”고 고현수 시인은 말한다. 이에 아내가 말한다.


흙 속의 시인/ 아내는 항상 나를 추켜세웁니다/ 당신은 흙속의 진주/ 별과 같은 사람/ 기분은 괜찮았지만/ 나는 항상 부끄럽지요/ 나는 아내의 시인이지요.


아내를 떠나보내고 고현수 시인은 시집 <하늘 편지>에서 아내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시로 썼다. 

시인은 하늘우체국을 만들어 놓고, 구름우체부를 통해 ‘나를 봉한 편지’를 써서 보냈다. 

‘간절한 슬픔’ ‘납골당 당신’ ‘비 오는 저녁’ 등 76편의 시는 슬프고도 아름다웠다.

그러함에 이 비 오는 날 어찌 아내가 그립지 않겠는가. 

가랑비와 호수와 저쪽 먼 산이 숨결처럼 고현수 시인의 가슴에 닿아왔을 때, 뜻밖에도 사랑하는 시인들이 왔다. 

그들은 조성림, 류기택, 조현정, 류정란 시인들이었다. 

나와 아내도 그 자리에 끼었다.


고현수 시인의 자작시 낭송


자작시를 건네는 고현수 시인



비 오는 날의 낭송회

고현수 시인은 손수 블랜딩한 원두를 갈아 뜨거운 물을 부어 커피를 내렸다. 

시인들은 저마다 한 모금씩 고현수 시인이 내린 원두커피를 마셨다. 

커피 향이 흐린 하늘로 퍼져갈 무렵, 류기택 시인이 가방에서 오늘 방금 나온 자신의 시집 <사는 게 다 시지>를 꺼냈다. 모두들 박수로 축하를 해주었다. 

그리고 곧 시회詩會가 열렸다. 

류기택 시인이 시를 읽었고, 조현정 시인이 고현수 시인의 프린트된 신작 시를 읽었다. 

류기택 시인은 빨간 우산을 펼쳐 조현정 시인의 시낭송을 도왔다. 

조현정 시인은 오랜 투병에서 이제 회복되어 가는 중이었다.


비 오는 날의 시회



고현수 시인이 자신의 신작시를 읽기 시작했다. 

시인들은 호수를 떠나는 은빛 날개의 물고기를 보았다. 

그 물고기는 고현수 시인의 편지를 전하는 우편배달부라고 생각했다. 

서숙희의 그림처럼 호수변 집들과 나무들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시가 된다는 것은 자신을 지우는 일임을, 거기 모인 시인들은 모두들 알고 있었다. 

먼 데 매미가 울었다. 아니 그 소리는 시인들의 가슴속에서 울려 나오는 메아리같은 시울림이었다. 

나는 매미의 울음에서 이런 소리를 들었다. 

옛날 송암동에 지씨 왕국이 있었다면, 이제 오늘은 호수의 시인 왕국이 있네. *





강 그늘 물길 속을 배회하던 물고기들이 비늘을 세워

은색 날개를 달고 노을 저쪽으로 날아갔습니다.

- 고현수의 ‘북한강 일박’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