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에 두 번 설 · 추석 명절 날만 가족들 만나
자식 ·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 등 편지에 담아
“50여 년 전 농사만 짓던 사람이 새로운 일을 한다는 게 녹록지 않은 상황이라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고 해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마음뿐이었었죠.”
청춘의 기운이 넘쳐나는 20대 후반부터 정년퇴임을 앞둔 50대 후반까지 30여년간 아내와 자식들을 1년에 한두 번 볼 정도로 멀리 떨어진 객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가정을 꾸려온 조원구(87) 씨.
소양강 다목적댐이 준공되면서 양구 고향마을이 한순간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조 씨는 식구들을 데리고 춘천으로 나오게 됐다. 하지만 고향에서 농사를 짓던 그는 당장 막막해진 생계를 걱정해야만 했다. 때마침 자신의 집에서 하숙하던 건설회사 직원의 소개로 울산에 있는 건설회사에 취직했다.
무슨 일이든 해서 가정을 꾸려나가야 하는 절실한 상황에서 얻은 직장이라 열심히 일한 그는 1년에 단 두 번 설날과 추석 명절 때만 춘천 집에 들렀다.
당시에는 춘천에서 울산을 가려면 기차를 이용했어야 했는데, 거리도 멀고 시간이 많이 걸렸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시절이라 명절 때가 되어 춘천으로 올 때는 밤기차를 타고 명절 당일 새벽에 왔다가 차례를 지낸 후 바로 울산으로 가야만 했다.
먼 타지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자식들의 성장 과정과 일상, 그리고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 등 가슴속 한쪽에 자리 하고 있는 이야기를 오랜 세월 동안 편지에 담아 가족에 대한 사랑의 끈을 연결했다.
지금 와 생각하면 당시에 아버지 얼굴도 잘 모르고 아버지에 대한 추억도 없이 자란 자식들 모두 무탈하게 잘 자라고 아버지를 이해해 줘서 더없이 고맙다고 했다.
젊은 시절 남편과 멀리 떨어져 혼자 자식들을 키우며 지낸 그의 아내(윤산옥·85)에게 남편이 보고 싶지 않았었냐고 묻자 “4남매를 키우기도 바빠서 보고 싶을 새도 없었고, 지금은 늙은 남편 밥해주고 빨래해 주느라 더 힘들다”고 말했다.
4남매를 모두 출가시키고 지금은 막내 아들네와 한동네에 살고 있다는 그는 “자식들이 어렸을 때에는 아버지가 곁에서 제대로 돌봐주지를 못했는데 지금은 반대로 나이 먹은 부모를 옆에서 돌 봐주는 자식을 볼 때 여러 가지 생각이 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