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날에는
춘천에 갈 일이다 약사동 망대에 오르기 전
기대슈퍼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늙은 햇살에게
흘러간 길을 묻고 문득 해몽을 들을 일이다
서울 사는 김정수 시인은 가끔씩 경춘선 열차를 타고 춘천에 온다.
그는 약사동 망대望臺 곁에서 이 시를 썼다. 비좁은 골목길로 저녁노을이 흐를 때였다. 시인은 봉의산과 호수와 호수 건너편 들판을 멀찍이 바라보았다.
호수가 생기기 전 춘천 시내와 서면 사이로 대바지 강이 흘렀다. 그곳 비옥한 토지에서 생산된 농산물은 춘천사람들의 중요한 먹을거리가 되었다. 서면 나루터엔 새 벽이면 농부와 아낙들이 몰려들었다. 농산물을 이고 지고 사람들이 새벽마다 나룻배를 타고 시내로 건너왔다. 번개시장은 새벽부터 불이 환했고 골목마다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런 풍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이 망대였다. 일제강점기, 망대는 화재감시용 탑이었다. 판자촌이 집결한 도시 골목엔 불이 자주 났다. 그러면 망대에선 사이렌이 울리곤 했다. 그 후 망대는 춘천형무소(나중 춘천교도소로 명칭이 바뀜)가 들어서자 수형인 감시탑으로 그 역할이 바뀌었다.
현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춘천교도소에 서 2년 동안 복역했다. 그때가 전두환 군부정권 시절이었다.
춘천교도소가 학곡리로 옮겨가고 그 터에 약사아파트가 들어섰다. 그 5층짜리 아파트도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 자리에 40층 높이의 아파트가 지금 키를 다투어 건설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여전한 곳은 망대로 오르는 골목이다. 소방도로를 중심으로 소나무 뿌리처럼 뻗어 나간 골목길은 나이를 잔뜩 먹어 깊은 주름이 졌다. 골목을 뛰어놀던 아이들은 이제 노인이 되어 허리를 굽히고 구부정하게 길을 걷는다.
망대로 가는 길은 소방도로를 따라 오르다가 종종 길을 잃게 된다. 막다른 골목에 닿으면 막막해진다. 사람 하나 겨우 다닐 만큼의 길. 그러면 그 외지고 적막한 시멘트 계단을 다시 되돌아 내려가야 한다. 그럴 때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찾는 곳이 있다.
망대 아래쪽 기대슈퍼. ‘어렵고 힘든 사람끼리 서로 기대고 살자’는 뜻에서 ‘기대슈퍼’ 다. 사십 년 넘게 약사동 망대골목을 지키고 있다.
기대슈퍼다.
‘이웃끼리 서로 기대어 사는 동네슈퍼’라는 뜻이다. 순례자들은 이 슈퍼에서 물을 사거나 음료수 한 병을 사서 목을 축여야 한다. 가파른 골목 오름이 갈증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망대 골목길 맞은편에 서 있는 기대슈퍼는 다큐멘터리 영화에 나와 유명해졌다.
김정수 시인은 슈퍼 평상에 앉아 구름 뜬 춘천 시내를 한눈에 굽어보았을 터이다.
다 대처로 흘러가 슬픈 구름이 되고
전신주인 양 우뚝 솟은 자식 자랑이 눈물로 해작이거든
선한 눈 마주하며 낮술 한 잔 기울일 일이다
기대슈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집 한 채가 덩그러니 떠 있다. 마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처럼.
다른 집은 모두 헐리고, 허공의 섬 같이 홀로 떠서 남은 이 집.
이 집은 약사동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약사교를 건너면 왼쪽 보문각 바로 곁으로 길을 내는 공사가 한창이다. 깊은 계곡을 만들면서 좌우로 흙을 파 들어오던 공사가 끝까지 버티는 이 집에서 멈춰 버렸다. 시간이 정지된 채 적막이 외로운 집을 에워쌌다.
절개지 위에 우뚝 선 단 한 채의 집. 눈물겹다. 자존과 권리를 침묵으로 외치고 있는 듯한 몸짓이다….
그 집은 호소하듯 망대를 향해 우러러보지만 망대는 사이렌을 울리지 않는다.
저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중앙시장 거리 한 모퉁이에서 시장풍경을 스케치했을 화가 박수근과 약사동 골목에서 청운의 학창시절을 보냈을 조각가 권진규. 그리고 화석이 된 사이렌 소리를 좇아 그리스의 신화처럼 망대로 접근하는 김정수 시인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햇살이 담벼락에 유리조각처럼 묻어 있는 그늘진 골목 멀리서 정체 모를 개가 짖어댄다.
망대다.
3층으로 된 하얀 건물.
망대 곁에 사나운 개 한 마리가 철망울타리에 갇혀 낯선 이를 향해 으르렁거린다. 마치 사이렌을 울리는 것처럼.
지붕 아래 입을 벌린 나팔들이 소리를 멈춘 지 얼마일까. 가늠할 수 없는, 참으로 아득한 날이었을 것이다.
약사고갯길 건너 죽림성당이 보이고 그 안쪽으로 중앙시장 골목길이 조용히 엎드려 있다. 1980년대만 해도 그 골목길은 인파의 물결로 일렁였다.
중앙시장엔 우두벌에서 생산되는 농산물과 강 건너 서면 들판에서 나는 각종 채소류, 후평동 과수원에서 넘어오는 과일들, 그리고 각처에서 반입되는 육류와 해산물, 서울에서 들어 오는 갖가지 의류들로 그득그득 넘쳐났다. 게다가 인근 미군부대에서 흘러드는 미제물품은 아주 귀한 물건으로 대접받았다.
그 중앙시장으로 넘어가는 약사리고개는 언제나 사람들로 흥청거렸다.
약사리고갯길은 삶을 관통하는 맥脈이었다.
중앙시장에 코를 맞댄 약사동과 죽림동은 부자들이 많이 살았다. 개들조차 지전紙錢을 물고 다닌다 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부터 중앙시장은 명동과 함께 저물어 가고 있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골목엔 많은 상점이 문을 닫았다.
그러던 것이 몇 년 전부터 어디선가 젊은이들이 하나둘 몰려들었고, 작지만 예쁜 가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어두운 골목골목마다 불이 켜지고 가게 유리창 안으로 새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그것을 청년들은 ‘희망의 재생도시’라 불렀다.
망대를 지키던 파수꾼은 이제 없다.
한때 헐릴 위기에 처했던 망대는 아직까지 그대로 거기 있다.
망대 아래로 다닥다닥 조가비처럼 기와지붕이 어깨를 맞대고 있다. 서로 기대 사는 데 익숙한 풍경이다. 두릅나무 숲 아래쪽 어느 지붕 위로, 어미 고양이와 새끼고양이 두 마리가 장난을 치다가 지나가는 비행기를 쳐다본다. 겨울일광욕을 즐기는 일은 고양이의 행복이다. 이 약사동의 진정한 주인은 바로 저들 고양이가 아니던가.
키 작은 담장 위 철조망에 감긴 하늘이
고추잠자리의 그늘을 골목에 풀어 놓을 즈음
붉은 노을이 골목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누인 골목길. 그림자는 붉은 노을을 깔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성큼성큼 골목길을 걸어 내려갔다.
김정수 시인의 시 <망대>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되어 있다.
길은 점점 좁아져
사람이 되어 간다
김정수 <망대>
* 색글씨는 김정수 시인의 시 <망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