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의 수력발전지대인 봄내골의 별칭은 ‘수향水鄕의 도시’다.
수력발전댐이 3개나 연거푸 건설되기 이전부터 북한강의 두물머리가 만나고 계곡마다 물이 흘러넘쳤다.
지형상 어느 곳을 파도 우물물이 나왔다.
삼국시대 봄내골의 이름은 조근내鳥近乃 오근내烏近乃였다.(내乃는 나루 진津과 개천 川의 옛말임) 바로 신라 문무왕 때의 일이다. 이 밖에도 봄내골 곳곳에는 물과 연관된 곳이 유독 많다. 깊은 내륙이지만 그만큼 사람이 살아가는 데 절대 필요한 ‘생명수’인 물이 풍부한 곳임을 드러낸다.
그러나 정작 지난 삶의 속내를 샅샅이 들춰보면 ‘물장수’들이 있었던 것으로 미뤄 꼭 그랬던 것만은 아닌 성싶다.
정겨움 넘쳐났던 우물가 풍경
어느 집안이고 부엌이 있는 처마 아래는 물지게가 걸렸다. 그 부근에는 양철로 만든 양동이가 가지런히 놓였다. 마을 한복판에 있는 대가大家의 공동 우물가는 항시 부산스럽다. 두레박질을 하거나 빨래나 설거지 같은 허드렛일을 하는 아낙네들이 모였다.
1960년대 이전에 볼 수 있던 전형적인 정겨운 동네 모습이다. 일제 강점기 직후까지 물을 길어 올리는 두레박은 나무통이 고 옮기는 도구는 물동이였다. 어쩌다 노비奴婢가 있는 집안이라도 노奴는 땔감을 마련하고 비婢는 물을 길어 집안 장독에 물을 그득 채우는 일을 맡았다. 전통적으로 물을 긷는 일은 오롯이 여자의 몫이었다.
그러던 것이 광복과 6·25전란을 겪는 사이에 달라졌다.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종종걸음으로 물을 긷던 일이 여자들에게 더없는 고역苦役이 되어 버렸다.
인구 증가에 따른 도시 급팽창으로 어느 집안이고 우물물을 부엌에 있는 장독대까지 옮기는데 과부하過負荷가 걸렸다. 도심지 인근 상가 지역이나 변두리 신흥개발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공급이 수요를 메꾸지 못했다.
그러면서 이 고장에 자연스럽게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물장수’였다. 초기에는 이웃끼리 품앗이 형태를 이루거나 마을 단위에서 남에게 부탁해 물을 받아먹는 게 고작이었다. 이런 모습이 바뀌게 된 것은 물값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비롯됐다.
평소 안면이 있는 몇 집에 물을 길어주다가 점차 호구지책으 로 전업轉業 형태를 이뤄 나갔다. 물값은 객주客主에 예속된 행상行商처럼 그때그때 받거나 도급都給 형식의 월정액月定額으로 받기 시작했다. 물의 양과 질도 중요하지만 급수 거리가 멀면 의당 값이 비쌌다.
그러면서 나무로 만든 타래박과 물통을 비롯해 옹기로 만든 물동이가 양철로 만든 양동이와 바께쓰로 바뀌었다. 긴급하게 물을 공급하게 되는 급수차가 등장한 이후에는 튼튼한 철제 미국산 석유통이 물통의 임무를 수행하는 진화를 거듭했다.
‘물의 고장’답게 항시 풍부했던 샘물
장풍득수藏風得水는 풍수지리의 중요한 개념 중 하나다. ‘바람은 감추고 물은 얻는다’는 뜻을 지녔다.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는 지세地勢를 일컫는 배산임수背山臨水를 닮았다.
봉의산 주변에는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흐르는 샘터가 여러 곳 있었다. 중턱의 약수터 아래쪽과 교동 한림대 성심병원 앞 동네 샘터도 이 중에 하나였다. 약수터 아래쪽 샘물은 우물을 채우고도 요선동으로 조그만 개울이 흐를 정도로 수원이 풍부했다.
6 · 25 전쟁 이후 이 샘물을 받아 계곡에 집수정을 만들었다. 파이프로 이 물을 끌어다 춘천목욕탕과 청수장(중앙로 7-6)을 경영해 온 황한철 씨(79)는 “쇠파이프가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군용천막 이음쇠를 용접, 300m의 수도관을 매설해 깨끗한 물을 썼다”고 회고했다.
식수를 받기 위해 양동이를 들고 길게 줄서 있는 사람들 (1968.8.)
1980년대 들어서 급수관을 폐쇄하기 이전까지 줄곧 장안에 수질이 제일 좋다는 입소문이 퍼졌다. 그래서 역대 도백들과 지역 유지들이 모두 단골손님이었을 정도였다.
교동 성심병원 앞쪽 ‘한우물마을’은 아무리 가물어도 맑은 샘물이 콸콸 쏟아지고 물맛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세를 탔다. 흐르는 샘물로 아래쪽에 있는 연못을 두 개나 채우고 인근 마을 주민들이 모두 이 한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먹었을 정도였다.
동면 감정리甘井里는 우물물이 달고 좋은 마을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런 단우물로 만든 육수가 막국수 입맛을 한껏 돋워 줘 지금은 막국수 촌락을 이뤘다. 또 남면 가정리 약바위 서쪽에는 조선 철종 때 먼 곳에서 물을 길어다 부모를 봉양하는 효성이 어찌나 지극하였던지 하늘에서 샘물을 내렸다는 효정孝井이 있었다. 이 밖에 옥천동玉泉洞, 삼천동三川洞을 비롯해 관천리, 서 천리, 만천리, 수동리, 수하리, 수구동 등 강물과 샘물, 약수, 우 물과 관련된 지명이 여러 곳에 널려 있다.
그러나 모든 곳이 양지만은 아니었다. 야트막한 산과 구릉지 대가 많아 물을 길어다 먹고 살아가는 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오죽했으면 ‘콩죽배미’라는 곳이 있었을까.
효자1동 춘천지법 건너편을 일컫는 이곳에는 천수답이 많았다. 여기서 논을 부치던 농민이 가뭄으로 아홉 해나 흉년을 겪어야 했다. 이에 배고픔을 참지 못한 나머지 ‘열 배미의 논을 콩 죽 한 그릇과 바꿔먹었다’는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산과 구릉지대가 많은 곳이 개발연대를 거치면서 인구가 갑자기 부쩍 늘어 도시가 급팽창하니 물 기근 현상과 수원오염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수리시설이 미흡했던 1960년대 이전까지는 가뭄이 극심하면 한해旱害 대책을 세워 양수기와 급수차를 동원해 극복했다.
춘천 소양정수장(2011.6.6.)
70년대 수돗물 상용 후 자취 감춰
일제강점기 시절 잠시 수돗물이 등장하기는 했었다. 관아官衙와 부촌을 이뤘던 봉의산 자락의 몇 집에 한정됐다. 옹기종기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던 민가에서는 언감생심焉敢生心 엄두 도 내지 못했다. 대부분 우물물을 길어다 먹었다. 수복 후 부쩍 늘어난 산동네 판자촌의 불편은 더욱 심했다.
이처럼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물 긷기에 종지부를 찍기 시작하게 만든 것이 바로 본격적인 상수도사업이 추진되면서 확대된 수돗물 공급이었다.
당시에는 봉의산 뒤편에 있던 수원지에서 소양강 물을 정수해 공급하고 캠프페이지에 주둔했던 미군들은 소양강변에 별도의 수원지를 마련해 공급했다. 이 시대에는 ‘물표’를 내야 수도꼭지에서 맑은 물을 받을 수 있었다.
중간에 마중물을 부어 땅속에 있는 물을 끌어올렸던 ‘펌프시 대’도 잠시 존재했었다. 1960년대 초반까지는 한시적 제한 급수인 데다 상수도 보급률도 50% 미만에 그쳤다.(현재는 99%)
그러던 상황이 개발연대인 1970년대 초반을 정점으로 물장수가 자취를 감춰버렸다. 조선시대와 한말 일제강점기 시절 한양에서 수천 명이 성업을 누렸던 ‘북청물장수’와는 규모나 결이 다르다. 하지만 물 긷기를 업業으로 삼던 사람들이 하나둘 소리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원고를 쓰기 위해 봄내골 물장수에 대한 기록이나 자료를 챙겨봤지만 어디서도 흔적을 찾지 못했다. 구전口傳에만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아마 누구나 할 수 있었던 물 긷는 일을 천역賤役으 로 하찮게 여겨 왔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봄내골 물장수’ 게재를 제안한 이 고장의 원로와 독자들의 관심은 의외로 대단했다. 대동강물을 팔아먹은 ‘봉이’ 김 선달과 봄내골 진산인 봉의산의 ‘봉의’가 닮아서였을까?(봉이鳳 伊는 닭을 봉황으로 팔아먹었다는 뜻이고, 봉의鳳儀는 상서로운 봉황이 나래를 펴고 위의를 떨치고 있음을 뜻한다.)
시인 김동환의 ‘북청물장수’를 교과서에서 읽어서였을까?
물지게를 지고 고달픈 삶을 억척스럽게 살아오며 한 시대 를 뛰어넘은 애잔한 추억이 삼삼하게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춘천의 한 대형마트에서 시민들이 생수를 고르고 있다. (2013.4.7.)
‘블루골드’시대 대비하자
금수강산으로 불린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물을 돈 주고 사는 재화의 개념으로 여기는 마음이 약했다. 그만큼 물이 풍부했던 나라였다.
중동특수를 거치면서 아랍권에서 물을 사서 마시는 모습을 처음으로 접했다. 이후 88서울올림픽을 치르면서 외국선수를 위한 생수가 처음으로 거래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우리도 유럽처럼 생수를 마트에서 사서 마시고 있다.
월곡리에 있는 대일광업에서 생산하는 옥정수를 비롯한 국내 생수시장 규모가 수천억 원에 이르고 연평균 10% 이상 성장하고 있는 추세다.
어느 미래학자는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 ‘물의 전쟁’이 될 것”이라며 20세기가 검은 석유를 일컫는 황금인 ‘블랙골드’ 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물의 시대를 상징하는 ‘블루골드’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24년간 벌였던 소양강댐 물값 시비를 연상시킨다.
이미 세계 물시장은 극심한 물 부족에 대비해 첨단 정보통 신기술과 접목시켜 광역화, 통합화는 물론 스마트워터 도입과 운영시스템 극대화를 이뤄 치열한 물시장 선점 경쟁에 나서고 있는 중이다.
서민들의 아련한 추억이 서려 있는 물 긷기 시대의 회상이 이제는 ‘돈을 물 쓰듯 한다’가 아니라 ‘물을 돈 쓰듯 한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절감하게 만든다.
미래는 ‘물 보기를 금같이 여겨야 하는 시대’임이 분명하다.
김길소 한국전래오락연구소장. 춘천 태생. 1970년 강원일보사에 입사해 편집국에서 강원도 전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취재했다.
편집국장, 논설주간, 상무, 전무이사를 지낸 후 언론중재위원회에서 위원과 부위원장으로 언론사와 피해자의 중재 역할을 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