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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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48

2020.1
#봄내를 품다
최돈선의 골목이야기①
약사동엔 모르는 섬이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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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꽃당. 죽림동성당 아래 골목에 푹 파묻힌 빈집에 메꽃 덩굴이 기와지붕까지 덮었다.

얼굴 없는 시인이 허물어져 가는 이 집에 예쁜 이름을 지어주었고 어떤 조각가는 그 시인의 시구를 철 물로 조각해 담장 위에 올렸다.





- 빈집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시인의 이 짧은 시처럼 도시에도 섬이 있다. 그냥 무심히 스쳐 지나는 그런 존재.

눈에 띄어도 보이지 않는, 무채색으로 흐려진 그런 고독한 곳이 있다.


약사동에 가면 과거의 시간 속에 정지되어 버린 집들이 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과 집 사이, 그 갈피에 꼭 끼어 그냥 그렇게 오래도록 비어 있는.


갈라진 벽, 녹슨 자물쇠로 굳게 잠긴 문, 내려앉은 처마, 너덜거리는 문짝, 안마당의 무성한 잡풀….

대체 이 집에 살던 이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약사동 94-5번지 터무니맹글창작소. 

허물어진 집에서 가져온 기둥과 서까래로 새로 지은 기와집은 이제

지역 화가들의 전시장이자 마을 주민들이 작품을 만드는 창작 공간이 됐다


 





녹슨 철대문 너머 반가운 엄마가 그리운 골목길.

낮 동안 뛰놀던 아이들 함성이 색온도 낮은 노란 전등빛으로 물드는 저녁.

이제 아이들은 어디론가 떠나고 나이만큼 늙은 집들이 담벼락 잇대어 생을 견뎌내고 있다.




- 그러던 어느 날.

이 약사골목에 시인과 화가들이 나타났다. 약사동하곤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시인들은 빈집만을 찾아다녔다. 빈집을 골라 벽에 기대어 오래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이따금씩 연필로 수첩에다 무언가를 적었다. 뒤이어 화가들도 왔다. 이들은 붓으로 벽에다 무언가를 그리거나 붙였다.


이들은 스스로를 ‘터무니맹글’이라 불렀다. ‘맹글다’는 ‘만들다’의 강원도 사투리다. 터무니없이 뭘 만든다? 아니 그게 아니다.


‘터무니’란 그런 뜻이 아니었다. 터에 무늬를 새기는 사람.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그렇게 시인과 화가, 또 무엇을 만들어내는 조각가들이 약사동 골목을 산책하기 시작했다.




  




- 약사리고개

예부터 춘천 도심에 위치한 중앙시장을 가려면 약사리고개를 넘어야 했다. 중앙시장엔 양키시장이 번성했다. 당시엔 튼튼하고 질 좋은 미제 물품이 인근 미군부대에서 흘러들었다.


이 중앙시장 부근으로 우후죽순 집들이 세워졌다. 덩달아 비좁고 삐뚤빼뚤한 골목들이 생겨났다. 약사리고개 좌우로 수많은 골목길이 어디론가 뻗어 나갔다. 막다른 골목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골목은 용케도 집과 집을 피해 언덕을 넘어 큰길에 닿았다.





 






 

낮고 아담한 기와집 너머로 거대하게 자라난 아파트. 약사동 제일 높은 꼭대기보다도

더 높이 치솟은 고층아파트는 낮게 엎드린 지붕의 집들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 약사동. 정확히 말해 약사천변 골목풍경.

오른쪽엔 죽림성당이 있고, 중앙시장 꼭대기엔 올챙이국수집이 자리하여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약사리고개 왼쪽으론 춘천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망대가 서 있는데, 시인들이 이 망대를 소재로 시를 다투어 썼다.


화가 서현종은 이런 골목풍경을 자주 그렸다. 그는 한 잔의 술이 없어도 한 마디 불평도 하지 않았다. 초승달 걸린 그림 속 집들은 푸르고 쓸쓸했지만, 사람과 개들과 지붕 위의 고양이들은 늘 따뜻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시인들은 빈집의 유령들을 만났고, 붉고 노란 금잔화와 아담한 소국小菊과 담장의 햇볕을 만났다. 또 그늘진 그림자와 머리 흔드는 여뀌와 시든 잡초를 만났다. 하지만, 때론 아무도 만나지 않고 자신의 내면에 조용히 들어앉아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그들이 시를 지을 때, 거대한 아파트 건물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이제 마을사람들은 석양을 볼 수 없었다. 점점 거대한 그림자가 지붕을 덮고, 감나무를 덮고, 담장을 덮고, 좁은 골목길을 덮었다. 이 고층아파트는 멈추지 않았다. 그 키가 벌써 약사동 제일 높은 꼭대기보다 수십 배나 더 커졌다. 그 옛날 형무소 터에 세워지는 이 무한대의 아파트는 낮은 지붕의 집들에다 짙은 그림자를 겹겹이 쌓아 갔다.



형무소의 원귀가 쒼 게야.

할머니 한 분이 대문을 열고 나와, 담장 밑에서 시들어가는 화분의 꽃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시인은 그 소리를 들었다.


- 얼굴 없는 시인



‘빈집은 창문부터 무너져 내린다’라고 시인은 썼다. 그니는 그 시를 누군가 미리 만들어 놓은 시의 우편함에다 넣었다. 강혜윤이란 이름이 있었으나 그니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느 날, 목숨을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한 집 한 채가 제 스스로 무너졌다. 섬세한 손들이 파손된 자개농과 기둥과 문짝을 가져갔다. 아무 소용도 없는 찌그러진 주전자나 깨진 거울조각, 부러진 대나무 효자손을 가져갔다. 빈집의 가족사家族史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시인들은 시를 써서 계속 시의 우편함에 넣었고, 작고 하얀 시 집은 고독하게 그곳에 있었다. 아주 이따금씩, 지나는 행인이 궁금하여 ‘세상에서 제일 얇은 시집’을 꺼내 읽었다. 그때마다 담장 위에서 고양이가 울었다. 여전히 키가 쑥쑥 자라는 아파트 건물은 하늘 오름을 멈추지 않았다.



빈집은 창문부터 무너져 내린다. 바람이 속살거리던 창틀의 빈틈으로 흙이 무너진다. …. 

대문에 장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 집의 설계에도 없던 가라지풀이 면류관처럼 자랐다.

<어디에도 없는 정원> 강혜윤 



- 섬세한 손들이 만든 기억의 재생

섬세한 손들이 채집한 잡동사니들은 아주 낡고 쓸모를 잃어버린 폐품들이었다. 그런데 약사동 94-5번지 약사천변 빈터에 한 채의 새 건물이 불쑥 마법처럼 지어졌다. 기와집이었다. 기둥과 서까래가 새것이 아니었다. 무너진 집에서 가져온 그것으로 틀을 잡았다. 문짝이나 흩어진 자개농이나 교자상은 작가의 훌륭한 재료가 되어 새로운 작품으로 탄생했다.


화가들은 자신들이 그린 약사동 풍경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기와집을 ‘터무니맹글창작소’라 이름 붙였다.

그로부터 이상하고 신기한 일들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석양 무렵 약사천 돌다리 위에서 푸른 눈의 사슴 한 마리를 보았다. 털이 없는 매끈한 몸매의 사슴? 아니었다. 사슴 같으나 뭔가 다른, 신성한 동물임이 분명했다. 뿔이 하나였다면 유니콘이라 했겠지만 뿔이 두 개 달린 짐승이어서 뭐라 부를지 망설여졌다. 사실 그건 조각품이었다. 이덕용 작가가 설치한. 그는 그 동물을 ‘약꽃’이라 했다. 약사천의 꽃이란 뜻일까.


마을 사람들이 터무니맹글 창작소로 몰려들었다. 신대엽 작가가 그린 마을 사람들의 초상肖像이 작은 전시장을 꽉 채웠다. 그 후 한선주 작가의 ‘미슈테카의 노래’를 시작으로 서숙희 작가의 ‘빈집’, 이효숙 작가의 ‘이야기가 있는 동네’, Lucy 작가의 ‘11살 그 여름의’, 최덕화 작가의 ‘약사리 무늬’가 차례로 전시되었다.

생애 단 한 번도 전시장이란 곳을 찾은 적 없는 할머니, 할아버지, 아저씨, 아주머니가 창작소를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정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약사동 할머니, 할아버지,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손에 손에 뭔가를 들고 창작소를 찾았다. 그것은 자신들이 손수 그린 그림이었다.

그리고 겨울이 왔고, 함박눈이 내렸다. 그제야 골목골목에 드리워진 짙은 그늘들이 말끔히 사라졌다.








<편집자 주>

2020년 신년부터 ‘최돈선의 골목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도시화로 고층아파트들이 들어서면서 아름다운 춘천의 골목길이 사라지고 더 이상 석양을 볼 수 없는 마을이 늘고 있습니다.

안타까움을 느끼며 지금이라도 남아 있는 춘천의 골목길을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