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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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48

2020.1
#봄내를 품다
김길소의 그때 그 사건 37
춘천향교
​도읍의 역사와 함께한 봄내골 배움의 터전

춘천향교 전경



- 자랑스런 교육도시의 뿌리
전국 여러 도시마다 ‘교동校洞’이라는 지명地名이 없는 곳이 드물다. 학교가 있는 마을, 즉 ‘향교鄕校’가 있는 마을임을 뜻한다.

봄내골에도 풍수風水가 길吉하다는 봉의산 기슭에 남쪽을 향해 벌써 650년이 넘도록 춘천향교가 버티고 있다.

“예로부터 봄내골은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불려 왔고, 문묘文廟에 올라 날마다 성현의 경전經傳을 연마하여 여러 어진이가 다른 고을보다 많이 배출됐다”는 기문이 눈길을 끈다.

 

애옥살이 속에서도 숱한 역경을 견뎌내며 가녀리고 끈질기게 향학의 뜻을 지켜 온 오늘의 모습이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소수 유림儒林들의 몫으로 돌리기에는 봄내골의 너무나 소중한 문화재요, ‘교육 도시’의 뿌리인 셈이다.



- 우후죽순처럼 늘어난 서당

춘천향교는 마을 단위로 글줄을 잘 아는 선생을 모셔다 동네 아이들을 가르쳤던 서당과는 다르다. 서당은 마을에서 봄과 가을에 곡식을 거둬 선생인 훈장에게 수업료로 건낸 사립학교였다. 지금으로 치면 향교鄕校나 서원書院은 일정한 조건이나 규정을 갖춘 공립중등교육 과정 격이었다.


조선 초기부터 운영되어 온 것으로 전해지는 춘천향교는 오랜 동안 봄내골의 대표적 공교육기관 노릇을 해냈다. 성균관成均館의 하급 관학官學으로 지방 관청의 관할 아래 꿈나무들을 가르쳤다.

그 시절 서당은 천자문千字文을 통해 한자의 음과 뜻을 익힌 후 명심보감明心寶鑑, 격몽요결擊蒙要訣 등을 통해 문장이 지닌 뜻과 교훈을 일깨웠다.



한 권의 책을 열심히 배우고 외운 다음에는 떡과 음식을 마련해 책거리(책씻이)를 열어 자축한 후 다음 책으로 넘어갔다. 이후 십팔사략十八史略이나 자치통감自治痛鑑, 가례家禮 같은 역사책과 소학小學을 공부하며 유학儒學의 기초를 닦았다.

이 무렵부터 서당을 벗어나 향교나 서원書院에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익혔다. 이른바 시를 읽고 쓰는 사장학詞章學과 유교의 경전을 공부하는 경학經學의 교과 과정이다.


그 후에는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강론하고 과거를 거쳐 성균관으로 옮겨 가거나 등용의 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그래서 성균관은 지금으로 치면 우리나라의 최고 학부였다.

찰떡이나 엿이 입시入試 합격에 효험이 있었던 것도 이때부터였다. 여기에다 한때는 향교의 교육과정을 마친 사람에게만 나라에서 시행하는 시험에 응시자격을 부여했다. 필자가 대학을 진학하기 위해 예비고사를 합격해야했던 시절을 연상시킨다.


조선 후기에는 몰락한 양반들이 시골에 많이 내려오고 서민들도 자식을 공부시켜 훌륭히 키워보겠다는 욕망이 커졌다. 서당의 수요와 숫자가 전국적으로 부쩍 늘어났다. 이런 경향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쳐 근대 서양식 학교가 세워진 이후까지 이어졌다.

봄내골에서도 서면 금산리 등 여러 곳에서 끝까지 버텨 오던 서당의 흔적이 이제는 완전히 사라져버린 지 오래 되었다. 그러나 전통사회 교육과정과 고장의 문화 계승에 중추적 역할을 해 온 춘천향교는 달랐다. 오히려 지난 역사와 수난의 무거운 짐을 힘겹게 걸머져야 했다. 시대의 변화를 바다처럼 줄기차게 품어오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춘천향교 장수루



- 임진왜란으로 두 번 소실

춘천향교는 오롯이 초기의 모습을 지금까지 간직해 온 것이 아니다. 한국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것을 지난 1960년 재건했다. 임진왜란 때 소실消失돼 선조 27년(1594년)에 부사 서인원徐仁元이 중건한 후 대성전과 장수루, 명륜당을 증축과 증수하는 등 세월을 거치는 동안 수없이 변신을 거듭해 왔다.


‘조선 초기’로 되어 있는 창건 시기도 ‘고려 말’이라는 주장과 엇갈린다. 고려 말과 조선 초기의 문인이었던 운곡雲谷 원천석元天錫(조선 태종 이방원의 스승)의 시문에 등장해 650년 이전인 고려 말부터 운영되어 왔다는 주장(춘천향교 발행 ‘춘천향교지’ 참고)에 힘이 실린다.

또 자연부락의 이름이 서원리書院理인 신북읍 용산리에 서원이 있었다는 주장(원영환 전 강원대 교수의 강원지방 서원 연구. 1998년 발표)도 제기되고 있다. 옛 ‘춘천읍지’에 기술된 위상에 근거함이다.


빌딩의 숲을 이루고 있는 도심 한복판에 유독 고색창연古色蒼然한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춘천향교의 건물 배치 양식도 특이하다.

전국 각지에 있는 향교와 흡사하게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양식을 담고 있다. 앞쪽에는 유생들이 공부하던 명륜당과 기숙사 역할을 하였던 동재와 서재, 장수루를 지었다. 뒤쪽에는 제사를 지내는 대성전을 배치했다. 평지인 경우는 배향 공간을 앞에 둔 곳도 있다.

대성전(정면 5칸 측면 2칸), 명륜당과 장수루(정면 7칸 측면 2칸) 동재와 서재(정면 3칸 측면 2칸), 동무(정면 3칸 측면 2칸)와 내삼문 등이 모두 현존하고 있는 건물들이다.


대성전에는 오성五聲, 송조2현宋朝二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수춘향약壽春鄕藥과 향중좌목鄕中座目, 향안鄕案 등 이 고장의 향토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가 되는 전적이 판본 27종에 138책, 사본 8종에 16책이 보관돼 있다. 장구한 세월을 견뎌낸 고풍스런 시설의 안팎을 까치발을 하고 이곳저곳을 살피자 시문을 짓고 그림을 그리며 몸과 마음을 수양하고 자연의 순리와 예절을 배웠을 선비들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 향교 운영은 원님 능력의 바로미터



원아들 예절 교육 및 다도 교육



전국적으로는 234곳의 향교가 있다. 도내에도 각 시·군 마다 없는 곳이 드물다. 나라를 이끌 인재를 기르는 곳이었던 만큼 봉건사회의 등용문으로 과거제도와도 밀접한 관계를 이뤄 왔다.

지역별로 인구와 지세地勢에 따라 향교의 정원이나 향시鄕試의 합격자 숫자가 달랐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모름지기 교육을 가리켜 ‘국가백년지대계國家百年之大計’라고들 한다. 그래서였을까? 한때는 향교의 흥망성쇄에 따라 고을을 다스렸던 지방관들의 능력과 성과를 평가해 인사고가에 반영했다. 이런 점을 미뤄보면 그 시절 향교가 이 고장에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었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유교의 쇠퇴와 시대상황의 급격한 변화와 더불어 향토 유림들이 주축이 되어 힘겹게 명맥을 이어 왔다. 그 이면에는 이 고장 유림들의 헌신적인 참여와 희생이 있었다. 그러나 춘천향교는 지난 1985년 강원도 유형문화재(제98호) 지정을 기폭제로 문화의 연대인 2000년대를 거치면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고 있는 중이다.



초등학생 선비 체험 및 전통예절 교육


고장의 전통행사에 중심으로 나서 향토의 뿌리임을 드러내고 있다. 소양강문화제 등 지역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제례를 비롯, 의암제와 같은 애국선열들의 추모제와 기로연, 선비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마을공동체 운영과 유교 아카데미 개최 등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펼치고 있다.


지난 2011년 기금 11억 원으로 설립한 장학재단(이사장 이필영)도 기금을 30억 원으로 늘려 수혜의 폭을 넓혔다.

그러나 향토 유림의 급격한 고령화와 감소(현재 600여명)로 생기와 젊음을 잃어 가고 있다는 지적에 자유롭지 못하다.


또 얼마 전에는 인근 진입로 확장공사로 담장과 건물이 헐리는 수난을 겪었다. 결국 지금은 전통사회 수학受學의 비밀(?)을 풀고, 조선시대 관아官衙의 흔적을 살필 수 있는 유일한 곳임에도 주민들과 관광객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는 형국이다.



- 전통과 현재의 조화 이뤄야


춘천향교에서 학생들이 창호에 한지를 바르며

문화재의 소중함 을 체험하고 있다. 


바티칸vatican은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독립국가이다. 얼마 전 가족과 찾았던 이곳에는 라파엘로의 명작<아테네 학당>이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함께 전시돼 있었다.


지혜와 예술을 상징하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와 학자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 스무 명은 넘어 보였다. 뜬금없이 라파엘로의 작품을 떠올려보게 된 것은 동서양의 시대적 배경은 다르지만 배움을 향한 절절한 마음은 맥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졌기 때문이다.


어쨌든 누구나 요즘을 일컬어 ‘유비쿼터스ubiquitous시대’ 라고들 한다.

항시 인터넷에 매달리게 되어 있는 이 시대의 교육 형태도 하루가 다르게 급속도로 진화하고 있는 중이다.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 아래 조선시대 이 고장의 유일한 공교육기관으로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 온 춘천향교의 어제를 되짚어 보면서 너무 주위의 변화를 외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밝아 온 새해를 맞아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배움의 터전이요, 상징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시대와 환경의 변화를 결합시켜 전통과 현재의 조화를 발전적으로 이뤄 나갈 봄내골 주민들의 관심과 성원이 절실해 보였다.


‘살아 숨 쉬는 향교 만들기’에 나선 춘천향교의 지향점이 어느 시인의 ‘꽃을 꽃의 이름으로 불러줄 때 꽃이 된다’는 말처럼 밝은 새 모습으로 다가오길 그려본다.







김길소|한국전래 오락연구소장춘천 태생.

1970년 강원일보사에 입사해 편집국에서 강원도 전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취재했다.

편집국장, 논설주간, 상무, 전무이사를 지낸 후 언론중재위원회에서 위원과 부위원장으로 언론사와 피해자의 중재 역할을 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