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옛날 신문에 나온 춘천의 기사와 사진을 보면서 그 시절 춘천사람들의 모습을 기억해 보는 코너입니다.
1970년대 춘천 금병초등학교의 운동회 장면
(제주대 허남춘 교수 기증 사진)
나이 지긋한 시민이라면 학창 시절 비가 내릴까 마음 졸였던 기억이 적어도 일 년에 두 번은 있었을 것이다. 바로 소풍과 운동회이다. 소풍과 운동회는 교실수업을 하지 않는다는 기쁨에 더하여 김밥과 사이다를 맛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날이었다.
그런데 소풍과 달리 운동회는 마냥 즐거운 행사가 아니었다. 9월 중순에서 10월 초에 열리는 가을운동회는 학부모와 지역사회의 인사들이 참석하는 마을잔치였다. 따라서 외부 손님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방과 후에 전교생이 남아 연습을 해야 했다.
저학년은 무용, 고학년은 곤봉체조와 텀블링을 주로 연습하였는데 어린 학생들에게는 여간 곤욕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남학생들이 선보이는 텀블링 시범은 사고의 위험성이 높아 학교에서 가장 무서운 선생님이 맡아서 지도하였다. 구타와 기합도 다반사였다.
학생들의 건강한 몸과 씩씩한 기상을 기른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식민지 학생의 가슴 아픈 역사에서 비롯한 일제의 잔재였다. 텀블링이란 용어도 구르기, 재주 넘기, 공중회전 등의 곡예 동작을 의미하는 ‘tumbling’ 이란 영어 단어를 일본에서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것이 다시 한글화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아래는 일제강점기 춘천공립고등보통학교(춘천중학교와 춘천고등학교의 전신으로 5년제로 운영됨)에서 열린 가을운동회를 소개하는 몇 개의 신문기사이다. 학생들의 전투 모의전模擬戰과 텀블링하는 광경이 사진에 담겨 있다.
군대 훈련소에서나 볼 수 있는 모의전은 물론이고 텀블링 시범도 전쟁에 투입할 수 있는 예비 군인을 양성하기 위하여 일제가 운동회를 이용하였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더 어이없는 것은 전통이란 미명 아래 해방 이후 1980년대 군사정권기까지 이 악습이 그대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모든 죽은 세대의 전통이 악몽과도 같이 산 사람의 넋을 억누른다”라는 마르크스의 경고가 떠오른다.
<매일신보 1933년 9월 23일자>
육백여명 건아 벽공하에 용약 六百餘名 健兒 碧空下에 勇躍
춘고운동회대성황 春高運動會大盛況
春川高普 第九回 陸上大運動會(춘천고보제구회 육상대운동회)는 예정과 같이 24일 오전 9시부터 同校(동교) 운동장에서 거행하였는데 당일은 天氣明朗(천기명랑)한 晴快(청쾌)한 가을날이다.
정각이 되자 육백여명 건아의 정렬로 국기 게양식이 있은 후 榎本 校長(에노모토 교장)으로부터 개회의 식사가 있었고 작년에 우승한 오년생 대표로부터 우승기의 반환식이 있은 후 전교생도의 합동체조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일반 관중은 넓은 장내 주위를 겹겹이 싸고 갈채 환호의 소리는 장내를 진동하는 가운데 競抗(경항)하는 순서를 따라 百米(100m) 二百米(200m) 砲丸投(투포환) 服裝競爭(복장경 쟁) 速算(속산) 라듸오 體操(체조) 來賓競走(내빈경주) 등 여러 종목을 원만히 마치고 끝으로 가장 이번 경기 중 인기의 초점인 우승기쟁탈전 각 학년 선수의 대항계주는 四學年(사학년)에 손에 돌아가게 되어 작년에 우승한 五年生(오학년)은 최후까지 잘 싸웠으나 석패하였다.
오후 4시가 넘어 수만의 종목을 무사히 종료하고 榎本 校長(에노모토 교장)으로부터 우승자에게 우승기 기타 메달 등 많은 상품을 수여 후 막을 닫히었는데 근래에 드문 대성황을 이루었었다.
<부산일보 1936년 9월 25일자> タンブリング(텀블링)
春川高普運動會(춘천고보운동회) 模擬戰(모의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