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교동에 위치한 춘천향교 모습 / (오른쪽) 춘천향교 장수루와 은행나무, 홍살문
옛날 조선조 춘천부엔 일찍이 향교가 세워졌다. 교동을 그래서 향교골이라 했다. 한우물이 있는 향교골은 글 읽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향교는 임진왜란으로 불타 버렸다. 그것을 당시 부사 서인원이 다시 지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또다시 대성전이 크게 파손되었다.
1960년에 이르러서야 대성전은 고쳐 지어졌다. 지금도 곳곳에 건축자재가 널려 있는 것으로 보아 향교는 오래고 깊은 상흔을 보수 중이거나 증축 중임을 알 수 있다.
장수루藏修樓 앞의 은행나무는 120살이 되었다. 120년 동안 향교의 역사를 지켜봐 온 나무이다. 은행나무와 나란히 선 홍살문은 여전히 붉어서 위엄과 경건을 상징하고 있다.
향교에서 도시공사 쪽으로 오르는 야트막한 언덕을 말고개라 불렀다. 장수루에서 들려오는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가 무척 낭랑했을 것이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이 이곳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렸다 하여 하마비가 세워졌다.
향교는 조선시대 각 지방에 설치된 국립교육기관이다.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고 유생들을 교육하던 곳이었다. 춘천향교는 강론을 하던 명륜당과 유생들이 기숙하던 동재와 서재가 있다.
그림 이형재
장수루는 책을 읽고 학문을 닦던 곳이다. 지금의 도서관 역할을 했다고 봐야 한다. 이 향교에서 학업을 마치면 진사進士 자격이 수여되었고, 성균관에 입교하여 과거에 응시했다.
1895년 갑오개혁 이후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향교는 성현의 제사만 담당했다. 지금도 매년 2월과 8월에 석전제釋奠祭를 봉행하고 있다.
향교와 맞닿은 춘천여고는 몇 년 전에 만천리로 이전했다. 지금은 춘천도시공사가 자리하고 있다. 그 넓던 운동장이 주차장이 되어 버린 지금, 100년 묵은 목백합만이 자동차들 한가 운데 우뚝 솟아있다.
1934년 춘천공립고등여학교가 개교하기 전, 1923년 4월에 멀고 먼 진주농고에서 옮겨와 심었다는 나무이다. 봄이 되면 황금색 꽃송이가 환하게 피어서 풋풋한 소녀들의 가슴에 순결함으로 자리했다. 목백합은 춘천여고의 상징인데 너무 오래된 수령의 나무여서 만천리로 이사할 때 옮겨 가지 못했다. 아마 이 목백합 나무와 향교의 은행나무는 수령이 비슷할 것이다.
춘천여고는 가수 김추자와 노사연이 다닌 학교이다. 봄여름 소풍 때면 이들은 끼를 발산하여 학생들의 큰 인기를 차지했다고 한다.
향교 삼거리는 서쪽으로 시청과 도청으로 연결되는 말고개와 한림대와 한림성심병원 쪽으로 난 큰길이 있다. 남쪽으로 자동차가 다닐 정도의 작은 길이 있어 동부시장과 연결된다.
향교 삼거리 모서리엔 예쁜 꽃으로 장식된 미용실이 있는 데, 그 건너편 건물 2층에 역사의 뿌리를 천착해 그리는 서양 화가 김대영과 전각인 원용석의 작업실이 있다. 하지만 모두 출타 중이어서 만나지는 못했다.
향교의 뒷골목은 많이 변했다.
옛날 내가 걸었던 향교 골목은 얼마나 깊고 좁았던가. 반세기가 지나서 나는 다시 이 골목을 걷는다. 오래전 이 골목 지붕으로 늘 하얀 수증기가 솟아올랐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이 곳 골목엔 수건 제조 공장이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 풍경을 동화처럼 기억한다.
이 골목엔 소설가 최수철 작가가 살았었고, 그는 춘천고등학교를 다녔다. 서울대학교 불문과를 나와 많은 소설을 썼다. 이상문학상을 비롯, 권위 있는 문학상을 여럿 받았다. 지금은 한신대학교 교수로 있다. 그의 아버지 최장수 선생은 국어참고서 저자로 유명했다.
맹모삼천지교란 말이 있듯이 최장수 선생은 아이를 훌륭히 키우기 위해 글 읽는 향교 옆에 둥지를 튼 것이 아닐까. 이건 오직 나만의 추측일 뿐이다.
시멘트 울타리에 노랗게 핀 호박꽃과 애호박이 이 골목의 첫인상이다. 한가로움과 여유로움이 여름날 골목에 나른히 피어오른다. 청색 대문은 굳게 잠겨 있고 골목 안은 고요하다. 나는 학교를 사직하고 이 골목을 쓸쓸히 지나온 기억이 있다. 두 살 된 갓난아이를 가진 가장으로서 나는 너무나 무모했었다.
어디로 갈까.
이것이 이 골목을 지나오면서 중얼거렸던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 난 아내와 딸과 이 길을 걷고 있다. 그러나 이 골목을 지나왔던 마지막 중얼거림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동안 나는 정말 함부로 살아왔는지 모른다. 아니 그건 정말 사실이었다. 나는 아내의 손을 꼬옥 잡았다.
향교 뒷골목은 예상 외로 깊었다. 이런 비밀의 장소가 있을 줄은 몰랐다.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 골목 안은 다닥다닥 원룸 숲이었다. 한림대학교가 근처에 있어 학생들이 군집해 있는 곳이었다. 어느 곳 하나 공터가 없이 빼곡히 들어찬 집과 건물들. 그 사이로 난 골목길엔 꽃화분들이 병정처럼 도열해 있었다. 모든 것이 거대한 성채처럼 느껴졌다.
조금 트인 광장에 이르자 봉의산이 수호신처럼 비밀의 원룸촌을 그윽이 굽어보았다. 조그만 광장을 중심으로 골목이 다시 어디론가 뻗어 있었다. 어느 집은 대추나무가 녹색으로 무성했다.
어디로 갈까.
나는 또다시 그 옛날을 떠올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내 눈에 띈 것은 긴 오름계단이었다. 파란색 칠이 벗겨진 계단으로 오르자니 좌우로 오밀조밀 신기한 세상이 펼쳐졌다. 어쩌면 이 계단은 새로운 세계로 안내하는 구름길인 듯싶었다.
저 골목 어디쯤에 이무상 시인이 살았었다. 그 집 뒤란엔 깊은 동굴이 있었다. 이무상 시인은 그 동굴을 탐험하는 꿈을 늘 꾼다고 했다. 하지만 철책이 쳐져 접근이 금지된 동굴은 이무상 시인에게 상상만을 허락했다.
골목은 비밀스럽지만 어느 땐 낯선 이에게 상상력을 부여하곤 한다. 이 골목 어딘가에 선사시대의 유물이 묻혀 있을 것이 틀림없다. 실제로 1984년 통일신라시대 고분의 흔적이 발견된 곳도 이 부근이다.
나는 계단을 오르면서 108계단이라 할까, 하늘계단이라 할까, 비밀의 계단이라 할까를 궁리하다가 도라지꽃을 발견했다. 보랏빛 도라지꽃은 순결하고 예뻤다. 계단 이름이 아무렴 어때.
좌우의 집들은 비탈이었음에도 작은 정원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집은 마당이 없어 옥상에다 푸성귀나 고추를 키웠다. 어느 집은 토마토가 붉었고, 어느 집은 지지대를 설치하여 머루를 키웠다. 올망졸망한 머루알이 푸르렀다. 어느 집은 옥수수 대궁이 빼곡히 자라 길쭉한 이파리가 쇠울타리를 넘고 있었다.
머위와 들깻잎과 고추, 호박, 배추 등 만물상을 차린 작은 정원도 있었다. 할머니 한 분이 지팡이를 짚고 그만의 정원에 나와 서 있었다.
할머니 참 대단하십니다. 훌륭한 정원이군요.
뭐 그냥 심심해서….
하루하루가 행복한 여름을 보내고 있는 소리였다.
아, 네에. 그런데 이 계단을 오르면 어디가 나오나요? 할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하늘이잖유?
쳐다보니 정말 흰 구름 흐르는 하늘이 파랗게 나를 굽어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먼 옛날, 향교에서 글 읽는 소리가 들려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