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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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66

2021.7
#봄내를 품다
최돈선의 골목이야기⑲
국립춘천박물관으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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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은 무엇이든지 다 알고 있다. 다만 알고 있지 못하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다."

  역사학자 토인비의 명언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나는 박물관에서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다.

나를 여기에 있게 한 존재는 과연 누구일까. 그들은 어디 있는가. 그것을 알기 위해선 어느 길을 찾아 떠나야 할까.

그 골목길은 아득히 멀까. 아니면 어둡고 깊을까. 희미한 내 유전자의 근원을 찾아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그때 문득 내 앞에 선사시대의 동굴이 나타났다. 10만 년 전 아득한 날이었다. 사냥꾼들에 쫓기는 사슴이 나타났다.

사슴의 허리에 창이 날아와 꽂히자 사슴이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석기 사냥꾼들은 죽은 사슴을 메고 의기양양하게 석양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낮에 나온 반달은 


 뗀석기와 간석기 시대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흑요석과 반달돌칼이었다.

흑요석은 강도가 세고 예리하다. 주로 창날이나 화살촉으로 사용했다.

구석기시대 필수적인 사냥용 용구로서 석기인들에게 긴요한 쓰임을 받았다.

4만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날카로움이 섬뜩하다. 
 또 하나는 반달돌칼이다. 
 구멍이 두 개 뚫려 있고, 둥근 반원형의 날이 있는 반달돌칼은 농구農具라기보다는 아름다운 예술작품이라 해야 옳다.

흡사 아이들 두상 같은 모습이다. 구멍 두 개는 아이들 눈이고, 둥근 반달형은 아이들 머리이다.

그것만 보아도 언뜻 아이들이 나를 보고 있는 착각에 빠져든다. 사실 두 개의 눈, 아니 두 개의 구멍은 끈을 묶는 자리이다.

끈을 손목에 묶고 석기인들은 반달돌칼로 이삭을 채취했다.

나는 삭둑삭둑, 이삭이 잘리는 소리를 듣는다. 이삭 스치는 소리와 더불어 낮에 나온 반달을 상상한다.


(좌) 반달돌칼 (우) 청동기시대 중도 마을 상상도


중도식 토기


 선사시대의 방에서 내가 압도된 것은 산더미 같은 토기 때문이었다. 마치 거대한 적갈색 무덤 같았다.

이 민무늬 토기를 ‘중도식토기’라 부르는데, 예수가 태어난 기원紀元 전후의 청동기시대에 집중적으로 등장했다.
 그렇다면 청동기시대를 거쳐 철기시대로 정착할 때, 중도식 토기는 일반 민무늬토기와 어떻게 다른 걸까.

중도식 토기를 경질토기라 부르는데, 그것은 높은 온도에서 구웠다는 뜻이다.

이전의 민무늬토기보다 탱탱하고 더 단단한, 붉은 토기라는 특징을 지닌다.

차별화된 이 토기가 중도에서 대량 발견된 것은, 문명의 번영이 춘천에서 이루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눈앞에 감동적인 드라마가 슬라이드처럼 펼쳐진다. 마을은 외부 습격을 막는 울타리가 쳐지고, 그 주위로 환호(도랑)가 빙 둘러 흐른다.

토기를 굽는 가마에선 뜨거운 불과 연기가 치솟는다. 농기구와 생활용품을 만드는 장인들은 하루 종일 일에 매달린다.

사냥터에서 멧돼지를 메고 돌아오는 사냥꾼도 있고, 낚시로 물고기를 한 바구니 든 어부도 있으며,

들에서 반달돌칼로 이삭을 수확하며 부르는 아낙들의 노랫소리도 들린다. 이 원시 농경사회는 질서 있게 움직이는 사회였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본격적으로 철기문화의 꽃이 만개했을 것이다.


(좌)중도식토기 (우)양양 선림원 범종


울리지 않는 종


 철의 방에는 삼국시대의 유물이 진열되어 있다.

그중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금관도 아니요, 귀걸이도 아니요, 통일신라의 검은빛 토기도 아니었다.

그것은 처참히 우그러진 종이었다. 소리가 영영 사라진 종 앞에 나는 섰다. 기록은 이렇게 되어 있다.



1948년 양양 선림원禪林院 터에서 아름다운 종 하나가 발견되었다. 이 범종은 통일신라 804년에 제작된 것이다.

평창 상원사 범종(725), 경주 성덕대왕 신종(771)에 이어 세 번째로 오래된 종이다.

1949년 오대산 월정사로 옮겨져 보관되었으나 6.25전쟁 당시 절이 불타면서 파손되어 종의 일부만 남아 있다.

 


 그러나 녹아서 우그러진 종신에 새겨진 비천상은 여전히 날렵하고 아름답다.

불국토佛國土에서 허공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는 두 분의 천인. 나는 마음속에 흐르는 어떤 소리를 조용히 듣는다.

그 소리는 자비심 가득한, 은은하고도 깊고, 마치 어린아이 같은, 해맑은 노래였다. 

 



 중세실에서 만난 철불과 비로자나불, 그리고 문수보살


 고려 시대 세 철불이 좌정한 뒤로 비로자나불이 묵상에 잠겨 있다.

비로자나불은 광명의 부처라 하여 법신法身을 이른다. 보통 사람의 육안으론 볼 수 없는 부처이다.

그래서 우주의 본체라는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사람들은 상상을 통해 비로자나불을 조각해 냈다.

왼쪽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쥔 형상이다. 화강암 콧날이 똑떨어져 나간 비로자나불은 입을 약간 벌리고 있다.

그게 친근해 보인다. 손상을 입었어도 비로자나불은 늘 보는 이의 마음속에 온전히 존재한다.
발걸음을 옮기려다 문득 뒤를 돌아본 나는 뒤쪽으로 또 하나의 환한 방이 있음을 알았다.

어떤 방일까. 그 비밀의 방이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국보 124호 문수보살.
 백색의 대리석으로 된 이 보살은 은은한 미소가 입가에 번진다.

루브르박물관 모나리자의 미소는 감히 견줄 수조차 없는 우아한 미소다.

본존불의 왼쪽에 있는 협시보살인데, 살결이 백옥 같아 빛조차 미끄러져 내릴 것만 같은 느낌이다.

강릉 한송사 터에서 발견된 이 보살상은 1912년 일본인에 의해 일본에 건너갔다.

도쿄 국립 박물관에 소장되었던 것을 1966년 되찾아왔다. 조각품의 섬세함이 고아한 품위를 지닌다.

경주 석굴암감실의 문수보살상과 현격히 대비되는 보살상이다.
 근세관엔 17세기 왕실의 상여가 있다. 손상된 곳 하나 없이 예전의 화려한 색채를 은은히 내비친다. 청풍 부원군 김우명의 상여다.

춘천 서면 안보리 묘역 신도비엔 “시신과 관에 쓰인 물품이 모두 궁궐에서 나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까지 전해오는 상여 중 가장 오래되었다. 특히 상여 위 용마루와 삼천갑자 동방삭이 관람객의 눈길을 끈다.

중요민속문화재 120호로 지정되어 있다.


(좌) 비로자나불 (중앙) 국보 124호 문수보살 (우) ‘국보 124호 문수보살’_그림 이형재



춘천박물관의 브랜드 영월 창령사 나한상


 춘천박물관에 가면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야 한다.

입구엔 <창령사 터 오백 나한-나에게로 가는 길>이란 이정표가 가슴 높이로 붙어 있다.

발걸음을 조심스레 딛다 보면 문득 이웃집 아저씨 같고, 형님 같고, 친구 같은 나한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하나같이 고요히 앉아 깊은 선정에 들었거나 생각에 깊이 잠겨 있다. 그렇다고 눈을 아주 감은 것도 아니다.

그저 가느다랗게 실눈을 뜨고 미소를 머금을 뿐이다.
 어느 관람객이 나한상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얼음처럼 몸이 굳어버려 자리를 뜰 수 없었다고.

대체 무슨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그저 그랬다는 것뿐이지 무슨 이유가 따로 있을 리 없다. 까닭 없이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던 이.

누구에게 말할 수조차 없었던 내면의 슬픔을 위로받았던 이. 나한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며 오래오래 그 나한과 머물던 이.

이 모두가 저마다의 행로가 다름에도 나한에게 받는 따뜻함은 수수하고 질박한 것이었다.

무엇 하나 꾸밈이란 없었다. 순수함 그것이었다. 사람들은 비로소 나한이란 존재가 자기 자신임을 깨닫는다.

아니 깨닫진 못했더라도 느낌만은 그러하다. 나한은 인간이다. 부처의 제자로 가장 높은 경지에 올랐으나,

그 궁극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잠시 유보한 현인이다. 차마 인간을 뿌리칠 수 없어 인간과 더불어 동행해야 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나한은 울고, 웃고, 화내고, 슬픔을 감추지 않는다.

나한의 근본은 화해와 속죄다. 나한은 인간이 의지할 수 있는 가장 친근한 벗이다.

2001년 강원도 영월 창령사 터에서 모두 328여 위가 발견되었다.

거칠고 투박하고 못생긴 이 나한상은 희로애락의 표정을 감추지 않는다.

창령사가 폐지된 지 30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 그들이 다시 돌아왔다.

2018년 8월, 춘천에서 시작한 특별전은 이듬해 4월 서울에서, 11월엔 부산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전시 기간 내내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이 나한상이 국립춘천박물관 브랜드실에 상설 전시되고 있다는 것은 춘천시민으로선 대단한 자부심이고 축복이다.

그러므로 우린 옷깃을 가다듬고 중도 선사유적지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문화시민으로서 꼭 해야 할 일이고 영원한 가치의 실현이기에. *



창령사 나한

 박물관 로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