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신동면에는 그보다 많은 이야기가 있다. 통일신라 유적부터 항일의병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중앙시장환승센터에서 출발하는 신동2(신동3도 동일) 마을버스에 올라 김유정 정류장에서 내렸다. 뒤로 김유정역과 레일파크가 보인다.
바로 길 건너편, 금병초등학교 바로 옆 하얗고 작은 단층 건물이 보인다. 춘천교구 실레마을 공소다.
마음이 차분해지는 곳이지만, 1960년 건립돼 오랜 기간 마을과 함께한 곳이다.
특히 마을 숙원사업이었던 수와리저수지가 이곳 실레공소에 계시던 박토마스 주교 덕에 완성됐다.
그 덕에 수와리저수지는 토마저수지라고도 불리고 있다.
국가 위기 때마다 행동하던 곳
백두고개길을 걷다가 만난 잣나무 숲
김유정역에서 삼포 방향으로 20여 분 걷다 보면 회전 교차로가 나온다. 교차로 옆으로 깎아지른 절개지가 보인다.
그 위에는 ‘진 병산 전적비’가 있지만, 큰 길에서는 숲만 보일 뿐이다.
회전 교차로에서 좌회전을 하면 서울과 춘천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산 초입새에 서 있다. 그 이정표 아래로 좁은 길이 산 방향으로 뻗어 있다.
1~2분 오르면 ‘춘천 증리 고분군’ 안내판이 보인다. 안내판을 조금 지나 왼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구한말 의병의 활약상을 적은 ‘진병산 전적비’가 나온다. 산 이름은 금병산인데 ‘진병산 전적비’라니. 그 설명이 비문에 적혀 있다.
‘195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여주 신륵사와 원주 구 미포에서 왜군을 격퇴한 강원도 조방장 원호 장군이 춘천에 머물렀을 때
이 일대에서 왜군과 혈전을 펴 진병산이라 별명하게 되었다’라는 설명이다. 또 19세기 말 항일의병들이 이 일대에 진을 구축해 ‘진병산’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이 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금병산을 진병산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민족이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구국의 행동이 전개됐던 곳이다.
전적비 앞 멀리 삼악산이 보인다. 서울을 오가는 지하철과 ITX 철도 노선이 바로 코앞이다. 금병산 자락을 잘라내고 길을 낸 터라 전적비 앞은 벼랑이나 다름없다.
안전펜스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초행자는 발걸음을 조심해야 할 듯하다.
통일신라 고분과 유물 출토지
왔던 길을 내려와 ‘춘천 증리 고분군’으로 향했다. 통일신라 시대에 조성된 고분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1980년대 주민이 땅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했는데, 그 안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짧은 굽이 달린 그릇 등 토기 6점이 나왔다.
그 후 주변 지표 조사를 한 결과 여러 기의 고분이 있다는 것이 확인돼 강원도 기념물로 지정됐다. 고분은 첫 안내판에서 조금 더 올라가야 볼 수 있다.
잣나무 숲 사이 낮은 펜스가 고분군을 둘러싸고 있다. 그곳에도 설명 안내판이 있지만, 옛 고분을 구분할 만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일부는 이미 도굴당했고, 무덤 위 봉토는 대부분 사라졌기 때문이다.
증1리-증2리 연결하던 ‘백두고개’ 길
통일신라 시대에 조성된 증리고분군
이 산자락 능선에는 백두고개(박두고개)도 있다. 김유정의 소설 ‘봄봄’이나 ‘산골나그네’에도 등장하는 곳이다.
예전 증1리에서 증2리로 넘나들던 곳인데, 지금은 왕래가 없어 잡풀이 무성하다. 도로가 나고, 차가 다니면서 이 고갯길은 사람의 발길이 끊겼다.
동네 어르신들은 그 길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증리 고분군에서 삼포 방향으로 50여m만 더 오면 ‘김유정로 1314’를 가리키는 도로명표지판이 보인다.
마을 집들을 지나 산길을 오르면 그 길이 바로 백두고개다. 오래전 백자를 만드는 하얀 흙 ‘백토’가 많이 나서 백두고개라고 불렸다고 한다.
예전 흔적을 따라 고갯길을 넘었다. 길을 찾으면서 걷는데도 15분이면 충분했다. 잣나무와 밤나무가 무성했다.
많은 사연이 담긴 옛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자꾸 걸어주면 더 많은 사연이 담긴 옛길로 살아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