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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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59

2020.12
#봄내를 품다
김길소의 그때 그 사건 48
청평사
천혜 절경에 감춰진 천년고찰


‘봄내골에 금강산이 있다.’

토박이들조차 선뜻 떠올리지 못하는 말이다.

세계적 명산인 금강산의 축소판이 청평산(해발 779m)임을 일컫는다.

예로부터 수많은 현사가 소봉래小蓬萊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원래의 이름은 경운산慶雲山이었다. 요즘은 속칭 오봉산五峯山으로 부른다.

우뚝 솟은 다섯 봉우리도 비로봉 관음봉 나한봉 보현봉 운수봉으로 금강산을 빼닮았다.

이처럼 수려한 경운산 품 안에 안겨 있는 고풍스러운 절이 바로 청평사淸平寺(주지스님 홍진·춘천시 북산면 청평리 675)이다.

고려 말에 드물게 스님이 아닌 거사에 의해 창건된 천년고찰千年古刹이다.

그동안 ‘은둔의 가람’으로 불리며 진흙에 가려 있던 보석에 견줄 만큼 소중한 이 고장의 대표적 문화유산이다.



고려문신 이자현이 천년 전 창건

청평사는 고려 광종 24년(973년)에 백암선원白巖禪院으로 창건됐다.

남에게 드러내 놓고 내세울 선원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고려 선종 6년(1089년) 이후였다.

고려 문신이었던 이자현李資玄이 과거에 급제해 대악서승大樂署丞이 되었으나 관직을 뿌리치고 이 고을에 내려온 시점이다.

춘주도감찰사春州道監察使였던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서였다.


문수원기비


 선원의 이름을 문수원文殊院이라 고치고 당堂과 암자를 지으며 수도에 몰입했다.

이에 예종은 신하를 시켜 다향茶香과 금백金帛을 보내 여러 번 궁궐에 돌아올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나물밥을 먹고 베옷이나 누비옷을 입으며 자연 속에 파묻혀 기쁨을 누리고 선禪을 즐겼다.

수도修道했던 사람에게는 이런 권유가 들릴 리가 없었다. 인구회자人口膾炙되고 있는 은둔이 보여준 삶의 키워드keyword는 무엇이었을까.

아직도 사바세계에 의문이 되고 있는 대목이다.

 신라로 가던 도중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했다거나, 당나라 평강공주가 신라 진덕여왕 때 중건했다는 전설은 지금까지 연기설화로 전해진다.

청평사 문수기원비에는 이자현이 창건한 이런 역사적 사실이 낱낱이 수록돼 있다.

그 후 조선 명종 12년(1557년)에 이르러서는 15세의 어린 나이로 불가에 입문한 보우普雨대사(1509~1569)가 불사와 영지影池를 개축하는 등

경내외를 크게 넓혀 대사찰로서의 면모를 갖춰 나갔다.

 조선 초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에는 숭유억불 정책이 대세를 이뤘던 역사의 흐름을 비켜 가지 못해

여러 번 중건과 보수를 거듭하여 힘겹게 명맥을 이어 왔다.

해방과 6·25전쟁의 격동기에는 화재와 폭격으로 극락전을 비롯한 사지寺地 전체가 소실돼 폐허나 다름없었다.

경내에 있는 암자와 정자마저 유실돼 오랫동안 방치 상태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1977년 널브러져 있던 극락전과 삼성각을 시발로 복원사업이 시작되면서부터 달라졌다.

사천의 해탈문, 선동의 5층석탑, 식암息庵터의 적멸보궁, 청평선방 능인전터의 대웅전, 구광전터의 관음전과 나한전 원해문,

강선루터의 행각과 경운루 등을 연차적으로 차곡차곡 새로 짓고 복원해 옛 모습을 되찾았다.

그리고 우리나라 전통연못의 뿌리요, 원형으로 꼽히는 영지影池의 복원(1986년)과

능인전 터에 대웅전(1989년) 문수원기비(2008년) 등을 새로 세워 큰 틀의 외견상 경내 복원을 마무리 지었다.



관동 명산 청평산 ‘소봉래’로 극찬

 청평산은 국토의 등뼈인 태백산맥에서 나뉜 광주산맥의 동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

민족의 통한이 서려 있는 38선(북위 37.59도)이 지근거리를 지난다. 인근 배후령 정상에는 지금도 38선 표지석이 서 있다.

북한강 유역인 이곳의 작은 지류와 계곡들은 북동쪽에서 대부분 남서쪽의 소양호를 향해 흐른다.

주변 산수가 잘 어우러져 해마다 등산객이 몰려들어 원색의 물결을 이루기도 한다.

 예로부터 분지 중앙에 우뚝 세운 청평사는 주변 경관이 뛰어난 곳으로 알려졌다. 명산으로 꼽혀 ‘소봉래’로 불렸다.

덕분에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문장과 학문에 뛰어난 수많은 선비가 풍광을 극찬하는 글을 남긴 곳으로도 유명하다.

“(중략) 진실로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이며 참으로 하늘이 만들고 땅이 신비스러움을 지닌 그윽한 곳이다.”


(왼쪽) 청평사 구송폭포(1978) (오른쪽) 청평사 3층석탑(1985)


 조선 초 보우스님이 청평사 일대 천석泉石에 대해 허응당집虛 應堂集에 ‘옥과 그림 같아 사랑스럽고 아름다움을 다툴 만한 곳이 없다’고 극찬했다.

춘천부사를 지낸 박장원朴長遠은 춘주의 ‘소봉래’로 관동 일대의 영산이라며

‘두 손을 마주 잡고 모이듯 하고 사면으로 둘러싸여 비거나 모자람이 없이 온화한 기색이 빼어나다’고 구당집久堂集에 적었다.

 이처럼 빼어난 경지는 지형지세와 기능에 따라 나뉘기도 한다.

△진입공간인 구송폭포구역 △영지를 중심으로 한 영지구역 △절 서쪽으로 물이 흐르는 서천구역 △서천지류의 협곡을 이룬 선동구역 △선원에서

제일 높은 산악지대인 견성암구역 등 여섯 곳이다.

팔경八景의 유래가 중국 남북조시대의 삼약三約 팔경시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고려와 조선조의 문인들이 이곳에서 팔경시를 읊조리고 수많은 기행문을 남긴 것을 아는 사람도 드물다.


오봉산 등산객(2003.11)


금강을 뛰어넘은 무릉도원의 선경

 청평사는 한때 소양강 담수로 길이 막혔었다. 나중에 뱃길(소양댐~청평사 15분 소요)이 열렸지만 험한 산을 넘고 물을 건너야 했다.

이런 먼 길이 지금은 진입로 개통에 이어 험준한 배후령 옛길에 직선 터널(샘밭에서 20분 거리)이 뚫려 한결 가까워졌다.
 눈이 쌓여 통행이 어렵기 전에 청평사를 찾아 나섰다. 입구의 주차장을 지나 신북읍 쪽과 맞닿은 삼거리 주변 상가는 관광객이 뜸해 한적했다.

매표소를 지나 경내로 가는 길은 승용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수 있는 가파른 오르막길이었다.

오른쪽에 맑은 냇물을 끼고 한 구비 돌아서자 구송九松폭포(높이 8m)가 하얀 포말을 쏟아냈다.

원래는 주변에 아홉 그루의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요즘은 떨어지는 폭포수가 아홉 가지 소리를 낸다고 해서 구성九聲폭포로 부르기도 한다.
 주변에는 용담과 너럭바위(반석) 구송정 구송대터와 3층석탑이 널려 있다.

거북바위가 있는 개천변에는 ‘공주와 상사뱀’ 설화를 형상화시킨 청동조각이 방문을 반겼다.

봄내골에 불시착했던 피랍 민항기박물관 개관 계획 준비를 계기로 중국 관광객의 봄내골 유치를 위한 테마로 활용하려고 했다가 무산된 추억이 떠올랐다.


상사뱀 신화 조각상(2018)


 이어 선동교 주변에는 한국 전통연못의 원형으로 꼽히는 영지影池를 비롯, 세향원細香院 복희암福禧庵 물레방아터와 청평선 방 청평루가 세워져 있었다.

선동교를 건너 경내 제1마당에 이르자 북쪽에 높이 솟아오른 견성암의 봉우리와 주변 산록이 한 데 어우러져 한폭의 산수화를 연상시켰다.

그리고 어디선가 불 어오는 겨울 속의 찬바람이 풍경 소리를 들려줄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극락전과 회전문을 지나자 오봉산을 배산背山으로 구름 사이에 자리잡은 대웅전과 확 트인 눈앞의 소양댐호가 임수臨水의 조화로운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마치 보물찾기를 하는 기분이다.
 절 서쪽에 흐르는 서천西川 구역과 산악의 기암괴석의 희미 해진 암각문자와 단애절벽 암봉이 어우러진 견성암見性庵 구역은

문득 천혜의 산수선경을 뽐내는 금강산을 찾은 것 같은 느낌을 안겨줬다.


청평사 영지(2004)


빛나는 문화유산으로 거듭나야

 ‘금강산’이라는 이름은 불교경전인 화엄경에 ‘하동에 보살이 사는 금강산이 있다’는 말에서 연유됐다.

봄에는 금강, 여름에는 봉래, 가을에는 풍악, 겨울에는 개골산이라 부른다. 개골산皆 骨山은 나뭇잎이 진 후 암석이 뼈처럼 드러난 형상을 이른다.
 한겨울 우묵한 청평산 골짜기에서 부는 쌀쌀한 바람과 함께 앙상한 나뭇가지와 속살을 드러낸 희끗한 바위가 또다시 개골산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권력에 기웃거리거나 빌붙지 않고 젊은 나이에 이곳에 들어와 은둔하며 수도한 선현들로 하여금 구도자求道者의 참모습을 다시 한번 엿보게 한다.
 문화재청이 청평사 일대 고려선원 유적지의 역사 문화적 가치를 높이 평가해 뒤늦게 ‘명승지’로 지정한 후 춘천시가 옛 모습을 되살리는 경관복원사업에 나서고 있다.

귀중한 문화재를 보존하고 선禪을 닦는 정신수양의 도량으로 가꿔 나가기 위함이다.
 그러나 아직도 선원에 세워졌던 유적들이 빈터이거나 손을 볼 곳이 많이 남아있다.

이치호 청평사 사무장은 이 중에서도 경내로 들어오는 길이 비좁아 소방차 진입이 어려워 화재에 무방비 상태인 점을 가장 시급한 과제로 꼽았다.

지난 천 년 동안 모진 풍파를 겪으며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원림園林과 선원禪院 문화를 갈고닦아 온 청평사가

우리 고장의 더욱 자랑스럽고 보물스러운 문화유산으로 거듭날 수 있는 날을 그려본다.





2017년부터 이어온 <김길소의 그때 그 사건>의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의 성원과 사랑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