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교 모형 <매일신보 1932년 7월 18일자>
1933년 노산 이은상은 서울에서 출발하여 춘천을 거쳐 설악산을 유람하면서 ‘설악행각’이란 기행문을 신문에 연재하였다.
소양정 근처 나루에서 배에 자동차를 싣고 강을 건너면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소양교에 대한 기대감과
봉의산 및 소양강의 맑은 경치를 칭송한 내용이 눈길을 끈다.
소양교는 1932년 7월 공사에 착수, 총 공사비 20만여 원, 연 인원 8만여 명의 인부가 동원되어
폭 6m 길이 397m 규모로 1933년 11월 말 완공, 12월에 개통식을 가졌다.
1929년 공지천교를 시작으로 1930년 신연교가 개통되었고, 소양교에 이어 1934년 모진교가 개통되면서
서울에서 춘천을 거쳐 화천 양구 인제 철원 등의 영서 이북 지방을 연결하는 도로 교통망이 완성되었다.
특히 소양교는 1954년 미군에 의해 포니교(현재 소양2교)가 개설되기 전까지 소양강 유일의 교량으로서
인력과 물자를 수송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고, 한국전쟁 때는 춘천 시내로의 진입을 시도하는 북한군과 이를 저지하기 위한
국군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역사적인 곳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이후 교통량이 늘어나면서 소양강에는 교량이 연이어 개통되었다.
그에 따라 소양교는 춘천의 남과 북을 연결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후발 교량에 양보한 채 이름도 소양1교로 바뀌게 되었다.
게다가 조만간 자동차는 통행할 수 없고 사람과 자전거만 다니는 인도교로 바뀐다고 한다.
4차선으로 시원스레 가설된 후발 교량에 비하면 소양교는 촌스러운 구시대의 산물처럼 인식되기도 한다.
그러나 소양교는 오랫동안 소양강의 유일한 교량으로서 수많은 사람과 물자를 수송하였고,
한국전쟁의 아픈 참상을 그대로 간직한 한국 현대사의 살아있는 생생한 현장이자 산물이다.
교량으로서의 기능은 많이 줄었지만 역사교육의 장으로서도 충분한 활용 가치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해 보인다.
<매일신보 1933년 12월 15일자>
기공 1년 반 만에 소양교 낙성
- 오는 16일 초도식 (새로 다리를 놓고 처음 건너는 의식) 거행
작년 7월부터 24만여 원의 공사비를 들여 가설 중이던 소양강의 가교架橋는 드디어 완성되어 누차 보도한 바와 같이
오는 16일에 도교식渡橋式과 축하회를 성대히 거행하게 되어 춘천군에서는 군내 각 방면의 유지와 인근 군에도 초대장을 발송하고
시가의 번화한 곳에는 축하 아치를 건설하는 등 도교식을 앞두고 벌써부터 일반인기가 비등하여 가는데
당일은 춘천군을 비롯하여 이웃 군에서 수만 관중이 쇄도할 것으로 미증유의 대성황을 이룰 것이다.(사진은 완성된 소양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