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에 거주하는 시민과 춘천을 찾은 관광객을 대상으로 ‘춘천’ 하면 떠오르는 장소를 조사해 본 적이 있다.
그 대답으로 춘천시민과 관광객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2000년대 이후로 남이섬 소양댐 공지천 청평사 삼악산 구곡폭포 등이 그 앞자리를 차지했다.
필자에게 그림 도구를 주고 춘천을 상징하는 백 폭 병풍을 그리게 한다면, 주저 없이 첫 번째 병풍에 봉의산鳳儀山을 그려 넣을 것이다.
봉의산은 춘천을 춘천답게 하고 춘천을 보호한다는 진산鎭山으로, 적어도 고려 시대부터 진산의 역할을 부여받아 자리하고 있다.
춘천에는 봉의산의 봉의라는 이름 따서 사용하고 있는 지명과 학교명이 있다.
봉의라는 이름으로 법정동 봉의동鳳儀洞이 생겨났고 봉의초등학교, 봉의중학교, 봉의고등학교도 생겨났다.
봉황이 날아와서 춤을 추다
캠프페이지에서 바라본 봉의산
봉의산은 300m 남짓한 작은 산이지만, 그 상징적 의미는 춘천의 심장과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봉의산의 ‘봉의鳳儀’라는 의미는 <서경>이라는 고대 역사서에 나온다. 이를 ‘봉황의 모습’ 정도로 해석하기 쉬운데,
이는 ‘봉황이 날아와서 춤을 추다’는 뜻으로 풀이해야 정확하다.
<서경>에 ‘簫韶九成 鳳凰來儀(소소구성 봉황래의)’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를 번역하면,
“순임금의 음악인 소소簫韶를 아홉 번 연주하니, 봉황이 날아와서 춤을 추었다”가 된다.
즉, ‘鳳凰來儀(봉황래의)’ 구절에서, 첫 번째 글자 鳳(봉) 자와 네 번째 글자 儀(의) 자를 따서 봉의鳳儀라는 이름을 만들었으니,
‘봉황의 모습’이나 ‘봉황의 모양’ 정도로 해석하기보다는 ‘봉황이 날아와서 춤을 추다’라고 해석해야 옳다.
봉황은 어떠한 동물인가? 옛날 임금이나 황제의 휘장에 그려져 있거나, 지금 대통령 기물器物에 등장하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불사조다.
그러면 왜 봉황은 임금의 상징물로 사용되게 되었을까? 순이 임금을 하는 때에 봉황이 날아와 춤췄는데,
순舜은 정치를 매우 잘하여서, 백성들은 배불리 먹고 부른 배를 두드리며 임금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였다.
후에 순임금의 이야기는 정치를 잘한 태평성대의 평화로운 정치 사례로 사용되었고,
훗날 임금들은 이러한 봉황을 끌어들여서 순임금처럼 태평성대, 곧 평화롭고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불사조 같은 정치를 펼쳐보고자 하였다.
몽골, 일본, 북한과 맞선 현대사의 현장
봉의산에는 평화를 사랑하는 춘천인의 꺼지지 않는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고려 시대 거란족과 몽골군이 침략했을 때에는, 춘천사람 모두가 우리 고장 춘천을 지켜내고자 봉의산성 에서 죽음으로 항거했던 곳이다.
특히 1253년 몽골군 5차 침입 때 의를 지키기 위해 춘천인 모두가 죽음에 이르게 된 가슴 시린 역사적 장소이면서,
한편 이 크나큰 희생으로 다른 지역에서 몽골군의 살육행위를 멈추게 한 평화의 상징적인 곳이기도 하다.
1895년 을미의병 때에는 춘천 의병장 습재 이소응이 이곳에 올라서 춘천 의병을 일으키는 의의를 하늘에 알리고,
우리의 국가를 잃지 않으려 항일의 깃발을 처음 꽂은 곳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에는, 국군이 소양교가 내려다보이는 지점 산록에 참호를 파고
남침하는 북한군을 막아 내서 유엔군이 참전할 수 있도록 시간을 만들고
이를 통해 대한민국이 회생할 수 있도록 하였던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현장 중의 하나다.
춘천의 철학이 숨 쉬는 곳
춘천을 지긋하게 내려다보며 춘천을 수호하고 있는 봉의산은 평화를 사랑하고 이를 추구하는 춘천인의 철학이 숨 쉬는 곳이다.
봉황은 평화로운 시절에만 나타나는 평화를 상징하는 동물이며, 영원히 죽지 않는 불사조(Phoenix)다.
춘천은 나라와 국민의 평화를 기원하며 봉의산을 중심으로 많은 역사를 치러 왔으며,
이에 평화를 사랑하는 DNA가 봉의산 이름을 통해 우리에게 이어져 오고 있으니,
이곳에 강원도청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도 그 의미가 작지 않다.
봉의산은 평화를 향해서 역동적으로 고동하는 춘천의 심장이고, 강원도민의 평화를 실천해 나가는 통일 한국의 출발지다.
이점이 봉의산만이 춘천의 진산이 되는 이유이고, 30만 춘천인의 정신적 터전이 되는 이유다.
봉의산! 춘천의 정신으로 강원도의 심장으로 영원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