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길을 가던 노인이 나뭇가지를 꺾어 지팡이를 만들었다. 길 가던 중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쉬는 동안 주머니칼로 지팡이에 무늬를 새겼다. 지팡이가 멋진 예술품으로 변 했다. 노인은 지팡이로 하늘을 한번 휘저은 다음 휘파람 불며 발길을 재촉했다.
15억원에 판매된 후 자동훼손된 예술가 뱅크시의 그림 ‘풍선과 소녀’
현생 인류는 신석기 시대부터 이어온 삶의 패턴을 정리하고,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으로 들어서고 있다. 변화는 식량생산에서부터 시작됐다. 농경사회에서는 대부분 농사에 매달렸다. 농법이 발달하며 그 비율이 줄었다. 현재 미국은 전체 인구의 1%(한국농촌경제 연구원 자료)가 농업에 종사한다. 그래도 최대 식량수출국이다. 올해 우리나라 농가 인구 비율은 3.8%. 그래도 먹거리가 남아돈다. 풍작은 재앙이다. 가격 폭락에 따른 사회적 혼란 때문.
예전에는 모르는 것이 있으면 노인들에게 물었다. 지금은 검색창에 묻는다. 지식도 온라인으로 습득한다. 난방이나 취사를 위해 성냥이나 라이터로 불을 얻는 대신 스위치로 해결한다. 불을 보지 못한 아이들도 많다. 경험(뇌에 축적된 데이터)은 생존방식의 근간이다. 벌레를 보면 징그럽고, 높은 곳에 서면 오금이 저리는 것은 경험을 통해 얻은 생존신호다. 21세기에 태어난 인류는 20세기까지의 인류와 다른 경험을 하고 자랐다. 세상이 바뀌고 사고방식도 바뀌고 있다.
요즘 젊은이들은 예술적 감동을 기피한다. 예술적 감동을 ‘무거운 감정의 찌꺼기’라고 판단한다. ‘예술은 단순한 소비상품이어야 한다’는 것. 교회나 사원에서 근엄하게 분위기를 돋우던 음악이 소녀들의 허벅지로 대체되더니 화장한 사내들의 몸놀림으로 바뀌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결혼 대신 반려동물과의 생활을 선호한다. 결혼제도 붕괴 현상이다. 미국에서는 재산상속으로 거부가 된 반려견이 등장했다. 동성결혼도 법이 보호해 준다. 여기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변해 간다는 사실만 존재한다.
현실을 보자. 인간이 알파고에게 바둑을 배우고 있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길 수 있을까?’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종교는 젊은이들의 외면으로 서서히 고사하고 있다. 국가에서 백성들에게 돈을 나누어 준다. 운전대 잡지 않고 자동차로 이동하고, 드론으로 허공을 날아다닌다. 급기야 우주여행 상품이 등장했다. 현재 인류는 좌회전 중. 미래로 회전하고 있다. 잠시 후, 운전석으로 비치던 태양이 전면에서 비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나는 ‘인류의 좌회전 현상’이라고 부른다.
로봇이 그림 그리고, 작곡하고, 신문기사를 쓴다. 로봇 성악가, 로봇 밴드도 오래전 이야기. 독일에 등장한 로봇 목사, 중국의 로봇 스님, 미국의 로봇 랍비들은 경전에 대한 해석력이 인간 성직자들보다 탁월하다. 판사를 인공지능으로 대체하자는 사회적 요구도 있다. 판사가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성문화된 법조항을 적용시키는 직업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해가 간다.
인류를 즐겁게 하는 예술가들은 꿈꾸는 자들이다. ‘2019 빌보드 뮤직 어워드’에서 상을 받는 방탄소년단
어차피 변화의 물결은 대세가 됐다. 우버가 등장했을 때 택시 퇴출은 예견된 것, 지금 우리 사회가 그로 인한 몸살을 앓고 있다. 뇌에 축적된 데이터가 다른 사람들이 같은 사회에서 어깨를 맞대고 살고 있는 부작용이다. 자율자동차는 네거리에서도 신호등이 필요 없다. 스스로 상황을 파악하고 움직인다. 결국 인간이 운전하는 것은 불법이 된다. 자동차 활용이 소유에서 공유(셰어)으로 바뀌면 주차장이 필요 없게 된다. 이에 따라 부동산 시장에 변화가 온다. 이러한 변화는 모든 방면에서 생긴다. 가장 큰 문제는 ‘사람이 쓸모없어 진다’는 것.
과거에는 노동력 확보를 위해 전쟁을 하고 사회계층을 만들었다. 그러나 미래사회는 사람의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미 일 잘하고 값싼 로봇 노동력으로 대체되고 있다. 근육의 힘과 정확도는 물론 지적능력까지 로봇이 인간을 앞섰다.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 현실이 된 미래를 어떻게 살 것인가. 이 대목에서 사색과 상상력이 요구된다. ‘준비하지 않는 자 망한다’ 이순신 장군 말씀이다.
김아타는 얼음불상으로 존재의 유한성을 표현했다.
다음 세대의 예술은 어떤 모습일까?
예술은 시대를 반영한다. 현실의 문제를 고민하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카메라가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미술의 종말을 예견했다. ‘사물 묘사’라는 면에서 카메라는 인간보다 탁월했다. 그러자 피카소는 코가 눈 위에 붙은 여인을 그렸다. 살바도르 달리는 녹아내리는 시계를 그렸다.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상상 속의 세계다.
백남준은 무대에서 샴푸로 연주자의 머리를 감아주었다.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재미가 탄생했다. 김아타는 얼음 불상을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예불을 드렸다. 부처님은 며칠 만에 사라졌다. ‘석상이나 얼음상이나 사라지기는 마찬가지죠. 영원한 우주의 시간으로 보면 실오라기 차이죠.’ 작가의 말이다. 당신도 곧 사라진다는 경고를 누가 이처럼 직접적으로 할 수 있을까?
‘사람이 쓸모없어진 세상’에는 어떤 예술이 존재할까? 물론 소리, 빛, 몸짓, 언어를 활용하기는 하겠지만 방식은 전혀 다를 것이다. 무엇을 근간으로 할까? 확실한 것은 지금 삶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현실이 도래한다는 것. 예술가들은 인공지능으로 새로운 예술분야를 창조할 것이다. 로봇을 이용한 예술이 대세를 이룰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술사의 손놀림에 인형이 춤을 추듯 로봇을 조종하는 것은 인간의 손이다. ‘반복과 패턴’이 음악의 본질이라면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에게 음악행위는 너무나도 쉬운 것이다. 인공지능 강의에서 비틀즈 음악을 입력시키고 그 패턴에 따라 창작한 음악을 들었다. 영락없는 비틀즈 음악이었다. 모차르트의 모든 음악을 참고한 로봇이 모차르트의 짝퉁 작품을 만들면 인간은 이를 구분해 내지 못한다. 로봇이 그린 수묵화가 10,000파운드(1,500만원)를 호가한다. 로봇 조각품도 시장에 나왔다. 시조도 쓴다. 이제 그림 그리고, 조각품 만들고, 멜로디를 만들어 연주하는 방식은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의 몫. 인간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 간 예술을 창조해야 한다.
작년 10월, 정체불명 예술가 뱅크시(Banksy)의 그림 ‘풍선과 소녀(Girl With Balloon)’가 소더비경매장에 서 15억 원에 판매됐다. 구매자에게 전해지는 순간 작품이 훼손됐다. 내장된 절단기가 리모컨으로 작동했다. 이 순간은 전 세계에 뉴스로 전해졌다. 모든 사람이 안방에서 보았다. 이 작품에는 ‘훼손’이라는 해프닝이 곁들여져 있었던 것. 작품이 비로소 완성됐다. 세상이 들끓었다. 훼손된 작품의 가격이 폭등했다.
뱅크시의 기발한 상상력이 담긴 작품은 웃음을 자아낸다. 그의 작품은 통쾌하다. 그는 스스로를 예술 테러리스트라고 한다. 예술을 통해 기존 관념을 부순다는 뜻. 예전에는 기술이 어느 한계를 넘으면 예술이었다. 지금은 남들이 생각지 못하는 상상을 예술이라고 한다. 예술은 위대한 정신작용이다.
예술은 상상 속의 세계를 반영한다. 살바도르 달리는 녹아내리는 시계를 그려 시간의 영속성을 표현했다.
인류를 행복하게 하는 아이디어는
누군가의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바퀴달린 가방이 등장했을 때 얼마나 행복했던가? 스마트폰으로 작동하는 따라다니는 가방도 있다. 안전거리를 벗어나면 경고음이 울린다. 가방뿐일까? 전화기, 드론, 인공수정체, 손톱깎이(지구촌 오지를 장기여행 해본 사람은 손톱깎이가 우리 삶을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 알 수 있다)는 물론 신호등 없는 로터리까지 인류를 행복하게 하 는 것은 누군가의 상상력에서 출발했다. 지금 이 글을 보는 당신도 인류를 즐겁게 할 수 있다.
예술의 원천 역시 상상력이다. 달을 바라보던 어린 시절 누구 든 달에 가보고 싶다는 상상을 했을 것이다. 그 상상이 실현되지 않았는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예술이다. 로봇으로도 불가능한 창조적 예술이 당신의 두뇌에서 나올 수 있다.
이 글 도입부 지팡이 노인의 이야기는 고등학교 일학년 때 예술을 하겠다고 했을 때 반대하시던 부모님을 설득시키기 위해 내가 만든 이야기다. 모든 부모가 그러하듯, 반대의 핵심은 ‘돈을 따라가라’는 것. 그러나 나는 ‘재미’를 따라가기로 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던가? 나는 음악을 전공했다. 나의 삶을 창조적으로 살기로 했다. 나의 삶을 재미로 채우겠다는 것. 그렇다고 삶을 관통하는 특별한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실존적 가치에 충실하겠다는 뜻이다.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목표로 했다.
화가는 빛을, 음악가는 소리를, 춤은 몸을, 작가는 언어를 표현도구로 사용한다. 나는 삶 자체를 도구로 삼기로 했다. 상상력을 바탕으로 나의 삶을 창조적으로 사는 것. 첫 작품이 산속에 스스로 오두막 짓고 전기 없이 사는 일. 2000년에 시작했으니 올해로 20년째다. 무인도에서 일 년간(2013년 3월∼2014년 5월) 홀로 살았다. 내게 홀로 있는 시간보다 더 가치 있는 경험은 없다. 홀로 있는 시간은 기적이다. 결국 나 스스로를 사랑하고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는 우주의 콘서트에 참여하는 일이다.
밤 깊은 공동묘지에서 콘서트도 했다. 죽음의 두려움을 가볍게 보자는 의미의 이벤트였다. 후배 녀석이 고갯마루에 새로 지은 집의 색이 주위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 녀석은 주말이나 온다. 주중에 몰래 노란색으로 도색을 할 계획도 그 가운데 하나! 삶은 재미있어야 한다. 나는 삶을 재미로 채우는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라이프아트(Life Art)라고 부른다. 예술가들은 꿈꾸는 자들이다. 이들의 상상력을 통해 인류의 삶이 변해 간다.
글 김진묵(본지 편집위원)
음악과 명상에 대한 8권의 저서가 있다. 향상된 기술과 예술의 관계를 연구한 <미래예술은 어떤 모습일까> 집필 중.
김진묵악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