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분지에는 산이라고 부르기 애매한 해발 200m 내외의 낮은 봉우리 몇 개가 점점이 놓여 있다. 고산(98.6m), 봉황대(126m), 우두산(133m), 장군봉(187m), 국사봉(203m)이다. 비록 작은 봉우리지만 춘천의 인문학을 거슬러 오르다 보면 반드시 되짚어보게 되는 중요한 자리를 점하고 있다.
낮은 높이에도 정상에 서면 탁 트인 주변 경관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예전 내로라하던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던 명소들이다. 그들이 남긴 한시漢詩 뿐만 아니라 전설까지 내려오는 특별한 곳이기도 하다. 그중에서 북한강과 소양강 사이에 그림처럼 떠있는 섬, 상중도 고산孤 山을 찾았다.
고산 낙조
고산은 전설 속에서 금강산에서 떠내려온 바위산으로 묘사된다. 금강산에 버금가는 아름다움을 간직한 봉우리란 뜻이다.
북한강 물줄기에 자리한 중도, 그 북단 섬의 시작점에 바위 덩어리 하나가 턱 버티고 있다. 바로 고산孤山이다. 유장하게 흘러내리던 강물은 한가운데 있는 고산을 만난다. 이 분기점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잠시 망설인다. 큰 물줄기는 서면 신매리 눈늡나루와 금산나루를 지나며 남쪽으로 흐르고 작은 물줄기는 동쪽 우두동 방향으로 흐르다 소양강과 몸을 섞으며 대바지강이 되었다.
지금이야 하나의 의암호수가 되어 깊은 물이 되었지만 의암댐이 생기기 전 동쪽 물길은 소양강과 합쳐지기 전까지 여울을 이루며 흐르던 곳이었다. 갈수기에는 물이 얕아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리고 걸어서 고산까지 접근이 가능했다고 한다. 낮은 바위봉우리지만 막힌 곳이 없어 사방 풍경을 둘러볼 수 있는 곳이다. 고산의 북쪽 면 수직의 낭떠러지 아래 깊은 웅덩이沼가 있고 주변에 모래언덕과 자갈밭이 형성되어 물놀이와 천렵하기 좋은 곳이었다고 한다.
고산 정상부의 바위
인형극장 뒤편 강변길을 따라 작은 다리를 건너면 고구마섬이다. 이 섬이 끝나가는 지점에서 호수 건너편으로 고산이 자태를 드러낸다. 한 폭의 한국화가 호수 위에 떠있어 한참을 감상한다.
어쩌면 고산에 오르는 것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맛이 더 좋을 수도 있다. 고구마섬과 상중도를 연결하는 다리가 놓여 있다. 하중도 공사용으로 만들어졌다가 철거되지 않고 사용 중인 다리이다.
이 철다리가 놓이기 전인 2000년 초 이곳에서 최민수, 이재현이 주연한 영화 ‘청풍명월’을 촬영했다. 무관 양성소인 청풍명월에서 최고의 검객으로 손꼽히며 우정을 나누지만 반정이 일어나 서로 적이 되어 칼을 겨누어야 했던 폭풍의 시대를 그린 영화이다. 청풍명월을 들어가기 위해 배를 연이어 만든 배다리舟橋가 바로 이곳에 놓여 있었다. 영화 촬영이 끝난 후 배다리는 공지천으로 옮겨져 몇 년간 실제 다리로 시민들과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았으나 부식되어 철거되었다.
철다리를 건너 불과 10분 정도의 수고로 정상에 오른다. 키 작은 나무들을 헤치고 나온다. 정상에 서면 겨우 십여 명이 있을 만한 작은 공간이 있다. 바로 고산대孤山臺다. 밑에서 볼 때는 별로 높지 않은 듯했으나 북쪽 면은 바위절벽斷崖이라 아찔하다.
옛날 큰 장마에 금강산에서 떠내려왔다는 전설로 부래산浮來山과 작은 봉의산이라는 뜻인 봉추대鳳雛臺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예부터 뛰어난 풍광으로 이곳을 다녀간 문인 김시습, 신흠, 오성대감 이항복, 퇴계 이황, 이주 등 수많은 시인들의 시문이 전해진다.
지금은 도시 여기저기에 높은 건물들이 들어서 선비들 이 보던 풍광을 그대로 느낄 수는 없지만 이곳에서 보는 조망은 아직도 대단하다. 너른 호수 건너편에 자리한 봉의산을 비롯해 도시를 에워싸고 있는 대룡, 금병, 삼악, 북배, 용화, 마적, 오봉, 구봉산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예전 선비들이 선정한 소양8경 중 하나인 고산의 저녁노을落照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고구마섬 쪽에서 삼악산을 배경으로, 서면 신매리 방향에서 봉의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고산의 사계절 풍경은 가히 일품이다. 이번 주말 가족들과 이곳에서 저물어 가는 일몰의 한 해를 돌아보며 춘천의 풍광에 취해보는 것도 멋지리라.
글·사진 심창섭(본지 편집위원 · 전 춘천문인협회장)
춘천에서 나고 자랐다. 춘천시청에서 문화재 업무를 전담하다 2006년 정년퇴직 후 수필가 및 사진가로 활동 중이다.
사라져 가는 춘천의 풍경과 민속 문화에 관심을 갖고 꾸준히 기록 중이다. 저서로 포토에세이 <때론 그리움이 그립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