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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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47

2019.12
#봄내를 품다
김길소의 그때 그 사건 36
청오 차상찬
한국 잡지언론의 선구자, 청오 차상찬

개벽사 동인들과 함께(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차상찬)



공지천변 조각공원에 중절모를 쓰고 지팡이와 책을 든 정장 차림의 동상이 서 있다. 얼핏 봐도 말쑥한 구한말의 노신사 모습이다. 봄내골의 진산인 봉의산과 시가지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이 모습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정작 토박이들에게 물어봐도 우리나라 잡지계의 선구자요 거목인 이 고장 출신 청오靑吾 차상찬車相瓚 선생의 동상이라는 걸 깊이 있게 아는 사람이 드물다. <동백꽃>의 김유정金裕貞과 쌍벽을 이루는 이 고장의 대표적인 문인이요, 언론인으로 꼽혀 왔으나 그동안 세상의 조명을 받지 못해 온 탓이다.






송암동 자라울마을서 태어나


1920년에 발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월간 종합지.

차상찬이 창간동인으로 참여했다.



차상찬은 1887년 춘성군 신동면 송암리(현 송암동) 자라울마을(강원체육고 위쪽)에서 태어났다. 연안차씨延安車氏인 성균진사 차두영과 청주한씨淸州韓氏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5남 1녀 가운데 막내였다. 진사였던 아버지와 진사시에 급제한 형 상학相學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한학에 뛰어났다.


싹수가 남달라 부모는 그를 한성(서울)의 보성중학에 입학시켰다. 이 시절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극장인 원각사에서 존경하던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의 강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가슴 한편에 자리 잡았던 애국심에 불을 지폈다.


학업에 매진해 보성중학을 1등으로 졸업한 후 곧바로 천도교회월보(1910년 창간)에 글을 쓰기 시작, 잡지계에 첫발을 디뎠다. 이때부터 잡지에 꽂혀 평생 잡지에 묻혀 살았다. 교단이 월간으로 만드는 잡지였지만 교단의 처지나 입장만을 옹호하고 선전하는 기관지에 머물지 않았다.


종교뿐만 아니라 철학과 학술, 시사평론까지 실어 태생적 한계를 뛰어넘었다. 민중계몽지 성격의 종합잡지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1917년 보성전문 교수 시절 상과 교수실에서



그러나 후학들을 가르치고 민중 계몽운동과 국권회복 운동에 앞장서기 위해 글쓰기를 잠시 멈추고 보성전문 학교(현 고려대학교)에 입학한다. 신문학을 탐구, 자양분을 터득한 후 천도교 청년당 간부를 거쳐 1920년 6월 28일 자로 발행된 『개벽』지의 창간동인이 되었다.


차상찬이 담금질을 끝낸 34세였던 시절이다. 민영순, 이돈화, 박달성, 김기선, 이두성과 함께였다. 훗날 일본 유학을 마치고 합류한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과 함께 만든 개벽開闢은 우리나라 최초로 발행된 종합월간지라는 새로운 획劃을 긋는다.


당시로서는 유례가 없었던 『개벽』지 창간사에는 이렇게 써있다.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태초의 개벽, 즉 선천 개벽에 이어 오늘은 인류 역사 발전이 극에 이르러 대개조의 필요에 직면해 있는 시점이며 세계 곳곳에서 개벽의 소리가 들려 오고 있음을 극적으로 표현한다. 그러한 개벽의 소리를 담아내고 온누리에 전하기 위해 잡지 개벽이 창간된다.”


엄숙하게 힘주어 밝힌 이 창간사에는 선생의 평소 신념이 알알이 녹아 있다. 그의 목소리를 그대로 드러낸 것으로 추정된다.





『개벽』지를 주축으로 잡지문화 진흥


천도교 청년당 간부 자격으로 『개벽』지 창간동인이 된 후에는 잠시도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편집국장으로 시국과 필화사건에 연루돼 여러 차례 옥고를 치러 첫 출발이 순탄치 않았다. 창간호에 ‘시판금지’의 딱지가 붙게 되고 통권 72권으로 8년 만에 폐간되기까지 일제의 혹독한 제재와 검열과 탄압을 힘겹게 견뎌냈다.


필화사건에 연루돼 방정환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다음 발행인 겸 편집인이었던 방정환이 33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후 바통을 이어받아 속간을 이어갔다.

오히려 글을 쓰고 잡지를 만드는 선봉(발행인 겸 편집인)에 나서 모든 책임을 떠맡았다.


민중계몽에 발 벗고 나선 열정은 『개벽』에 그치지 않았다. 그 기세가 멈출 줄 몰랐다.

여러 분야의 다른 잡지를 온갖 가시밭길을 걸으며 창간하거나 직접 제작에 뛰어들었다.

잡지 『부인』(1922년), 『혜성』(1931년), 『제일선』(1932년) 등을 창간하고 『별건곤(別乾坤)』(1930년)은 발행인과 편집 주간으로 활약했다.



개벽사 편집실



또 『어린이』는 편집에 참여하는 등 쉼 없이 민족정신과 사고思考의 폭幅을 넓히고 꽃피웠다.

이런 가운데 『개벽』은 항시 개화기 신문화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소월의 <진달래꽃>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비롯, 김유정의 작품과 김동인 현진건 나도향 주요섭 등 당대의 걸출한 문학인을 발굴하고 배출시킨 등용문 노릇을 해냈다.


창간부터 폐간될 때까지 줄곧 『개벽』사를 지키며 편집자와 기자 논객 시인 사학자 등으로 무려 700여 편이 넘는 주옥같은 글을 남겼다.

세태가 확 바뀐 요즘에도 40여 개가 넘는 그의 필명으로 직필直筆한 글의 발굴 작업이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이런 이유는 문헌적이고 역사적인 가치가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상찬은 개벽 이외에도 여러 잡지들의 발행과 편집에 참여했다.



주옥같은 글 속에 배어있는 고향사랑


우리나라 잡지사에 끼친 공적이 차고 넘치는 그의 평전評傳은 이쯤에서 문학이나 학문적인 논거를 연구하는 학자들과 후학들의 몫으로 넘겨두고 됨됨이를 살펴보자.


까무잡잡하고 강인한 얼굴에 콧수염을 기른 대머리였던 그는 푸르른 마음이 깃든 삶을 지향했다. 아호 ‘청오’靑吾에서 묻어나듯 마음속 깊은 곳에 남다른 고향사랑이 곳곳에 물씬 배어있다.

나고 자라난 곳을 많은 사람들이 떠난다. 그리고 쉽게 고향을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 요즘 세태이다. 첩첩산중의 산골인 경우 스스로 뇌리에서 지워버리거나 아예 등지고 사는 사람들도 허다하다.


그러나 청오 선생은 그렇지 않았다. 온갖 고초를 겪으며 어렵사리 잡지를 꾸려 가면서도 봄내골의 고향산천과 사람들은 항시 좋은 활력소요, 애틋한 사랑이 담긴 좋은 글감의 대상이었다.


“우리는 춘천사람이 되어 그런지 춘천의 봄이 항상 그립습니다. 우리 춘천은 군명이 춘천이니만치 봄의 경치가 다른 어느 곳보다 아름답지요. …중략”

(잡지 『별건곤』에 서간문 형식으로 쓴 ‘춘천의 봄경치’)


“나는 강원도 사람이다. 강원도에서 뼈가 굵고 살이 컸다. 나의 조선祖先이 역대를 살았고 또한 나의 자손이 몇 대를 더 살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항상 강원도를 더 사모하고 사랑하였다.”

(『개벽』지에 실린 ‘강원도를 일별한 총감상’)


여러 잡지의 기념호나 특집을 만들 때마다 봄내골 사람들의 삶과 풍광을 그리워했다. 그리고 고향을 드러내 뽐내는 글을 썼다. 소양정, 조양루, 금병산 철쭉꽃, 삼악산 진달래, 청평산 동백꽃, 경춘가도의 벚꽃과 봄내골 삶의 애환이 그의 수많은 글 속에 녹아 있다.

그런가 하면 그가 썼던 여러 가지 필명 중에는 춘천사람임을 앞세운 것이 많다. 바로 춘천의 옛 이름 수춘壽春을 따서 수춘산인壽春山人, 강촌산인江村山人, 월명산인月明山人이라 하는가 하면 자신을 낮춰 차천자車賤子라고도 썼다.


항일민중계몽운동의 하나로 『개벽』사가 중심이 되어 『어린이』잡지를 창간(1923년)하기 1년 전에는 천도교소년회 이름으로 선포된 어린이날 제정의 주역이 되었다.

어린이날 제정과 최초의 전문잡지 발간의 대표적인 인물이 방정환이어서 멍석을 깔아준 숨은 공로자로 꼽힌다.

연안차씨延安車氏 집성촌에서 자라 고향을 지키고 있는 그의 후손인 차기철 씨(77·춘천시 후평동 주공7단지)는 “집성촌을 이뤘던 자라울마을에 함께 살던 문중 피붙이들이 대부분 고향을 떠나 살고 있어 아쉽다”며 “봄내골을 중심으로 숭고한 공적을 재조명하는 운동이 꾸준히 펼쳐지고 있어 더없이 기쁘다”고 밝혔다.




2015년 강원도민일보와 청오차상찬기념사업회가 손잡고 공지천에 차상찬 선생의 동상을 세운 후 매년 그의 숭고한 정신을 재조명하는 학술대회와 기념사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뒤늦게 불붙은 각종 선양사업
활기


평생 조국광복을 열망했던 그는 광복 이듬해인 1946년 향년 59세로 별세했다.

2차 세계대전과 6·25전란이 겹친 엄청난 세계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청오의 눈부신 행적은 자연히 묻힐 수밖에 없었다. 개벽지가 우리나라 사조思潮에 끼친 공로를 떠올릴 적마다 중앙과 향토언론에 간간이 언급될 정도였다.


망각의 늪에 놓여 반세기 동안 선양사업조차 엄두도 내지 못해 왔다. 이 같은 상황이 반전되는 계기를 맞게 된 것이 바로 시대정신을 갈망하던 향토 출신 한 사업가의 집념에 찬 수집욕과 끈질긴 투자 덕분이었다.


바로 봄내골 명소로 발돋움하고 있는 동면 월곡리의 옥광산 ‘달아실’을 운영 중인 대일광업 김현식 대표이다. 전국 곳곳을 누비며 당시 발행되었던 『개벽』지 등 잡지를 수집하고 행적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를 모아 <청오 차상찬 잡지 기념관>을 개관했다.


이보다 앞서 ‘자랑스런 강원문화인물’로 선정돼 정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서훈(2010년)받아 선양사업의 기틀을 다졌다.

또 지난 2015년에는 강원도민일보 청오차상찬기념사업회(회장 김중석·강원도민일보 사장)와 손잡고 공지천 조각공원에 높이 2.2m의 동상(춘천 출신 조각가 백윤기 작품)을 세워 가물가물 잊혀져 가던 선생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실체화시켜 나갔다.


그 이후부터는 탄력을 받아 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재조명하는 학술대회와 글을 정리한 『차상 찬전집』(통권 3권)을 발간, 선생의 위업偉業을 기리는 사업이 해마다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다.


뒤늦었지만 고장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얼마나 다행스럽고 뜻깊은 일인가!

밝아올 새해와 함께 숭고한 선생의 정신이 더욱 꽃피워지기를 기대하게 된다.







글 김길소(본지 편집위원·한국전래오락연구소장) / 사진 청오차상찬기념사업회

춘천 태생. 1970년 강원일보사에 입사해 편집국에서 강원도 전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취재했다.

편집국장, 논설주간, 상무, 전무이사를 지낸 후 언론중재위원회에서 위원과 부위원장으로 언론사와 피해자의 중재 역할을 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