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송이 즐비한 숲 속, 허름한 건물 속에서 촛불이 작은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두 손 모아 공손히 허리를 숙인 나이 지긋한 여인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한국 어머니의 전형적인 모습에 가슴이 저려 온다. 분명 자신의 안위가 아닌 가족의 무사 안녕을 위해 정성으로 치성을 드리는 것이리라. 사라져 가는 서낭당(성황당)의 조촐한 풍경이다. 이러한 전통적이고 경건한 풍경 앞에서 누가 감히 미신이나 샤머니즘shamanism이라는 용어를 들추어 낼 수 있을 것인가.
성황과 산신민속은 내세관이나 정신세계에 대한 이상이 아닌 현생활의 질병·재해·호환虎患 등 액운을 막아 주길 비는 수호守護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부락과 가족의 안녕, 그리고 무병장수를 위해 공동제의나 개별 치성致誠으로 행해졌다.
우리의 전통 속에서 일상풍경 중의 하나이던 그 많던 서낭당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인간의 존재는 자연의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자연에 순응하며 보이지 않는 어떤 큰 힘에 기댈 수밖에 없던 자연숭배가 민속화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서낭당 하면 마을 어귀나 고갯마루에 자리 잡고 있던 고깔형 돌무더기가 연상된다. 또 돌무더기 옆에는 보통 당목堂木이라 불리는 고목이나 장승이 있기도 했다. 이곳을 지날 때마다 소원을 빌며 돌무지 위에 작은 돌들을 던져 올리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우리나라에 서낭신앙이 전래된 것은 고려 문종 때 신성진新城鎭에 성황사城隍祠를 둔 것이 시초라 한다. 마을 수호신으로 서낭은 전국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었으나 1970년대 새마을운동 시기부터 점차 사라져 간 민속이다.
춘천에도 꽤나 많은 서낭당과 당숲이 여기저기에 있었지만 이제는 거의 사라져 버렸다. 그중 도시 속에서 끈질긴 생명력으로 버티고 있는 송암동 성황당을 찾았다. 중도 배터 앞 돌고개를 넘고 스포츠타운을 지나면 바로 창내고개이다. 바로 이 고개 안쪽 마을이 송암동이다. 고개 오른쪽 능선 풋나무 골에 성황당이 있다고 토박이 김춘기(74) 통장이 알려준다. 지금도 매년 이곳에서 치성을 드리지만 예전에 참여하시던 분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기록이 없어 유래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고 했다.
송암동 성황 연리목
아쉬운 마음으로 성황당을 찾아 산을 오른다. 20~30년생 잣나무 숲을 헤치며 작은 능선으로 오른다. 족히 200년은 넘어 보이는 20여 그루의 소나무들이 비상하는 모습으로 도열하듯 서 있다. 그 노송 사이에 40여 m의 거리를 두고 두 개의 건물이 비밀스럽게 서 있다.
두 동 모두 조립식 시멘트 담장으로 벽을 만들고 슬레이트를 올려 지붕을 만든 한 평 정도의 가건물이다. 전면은 열려 있는 형태로 내부 시멘트 탁자에 촛대가 놓여 있다. 현판이나 위패도 없고 단지 한지(예단)만을 접어 걸어 놓은 상태였다. 위 건물은 산신당이며 아래건물은 성황당이다. 성황당 건물 옆에 소나무 연리목이 서 있어 이곳 분위기를 더욱 신비롭게 느끼게 한다.
매년 음력 10월 초정일初丁日 자정(밤 12시)에 마을 주관으로 마을의 단합과 안녕을 위한 산치성제를 올린다고 했다. 기일 전날 성황당 주변에 묻어 놓은 감주(식혜)를 제주祭酒로 하고, 떡, 과일 없이 초, 향과 돼지 한 마리를 잡아 생체를 조각으로 잘라 제물로 쓴다고 했다. 기일 보름 전부터 몸가짐을 조심한 헌관이 제관들과 평상복 차림으로 산신당부터 제례를 봉행한다. 축문을 읽고 가가호호의 소지를 올린다고 한다. 이어 다음 날 저녁 9시에는 마을 중심에서 거리제路祭도 올린다고 한다.
하지만 토박이들이 하나둘 떠나고 외부인이 늘어나면서 예년에 비해 주민들의 관심이 많이 줄었다. 아쉬움이 크지만 조상의 숨결이 담긴 마을의 전통문화를 계승해 나가겠다고 했다. 다만 올해부터는 제물을 변경하여 통돼지 대신 돼지머리로 간소화하여 제례를 지낼 계획이라 했다고 한다.
아쉬움이 있다면 전승체계가 미약해 원형을 잃어 가는 점이다. 그래도 도시 근교에서 고유민속인 산신당, 성황당, 당숲을 지키며 계승하고 있는 주민들의 정성과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글·사진 심창섭(본지 편집위원 · 전 춘천문인협회장)
춘천에서 나고 자랐다. 춘천시청에서 문화재 업무를 전담하다 2006년 정년퇴직 후 수필가 및 사진가로 활동 중이다.
사라져 가는 춘천의 풍경과 민속 문화에 관심을 갖고 꾸준히 기록 중이다. 저서로 포토에세이 <때론 그리움이 그립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