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반세기 동안 많은 사회 변화가 이뤄진 격랑의 시기에 조용한 ‘봄의 고장’ 춘천에서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김길소의 그때 그 사건>은 1970년부터 40여 년간 토박이 언론인으로 이 고장에서 일어난 사건과 변화를 지켜본 필자가
그 당시의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고 숨은 일화와 뒷이야기들을 전하는 코너입니다. <편집자 주>
아무리 추운 겨울이 다가와도 두렵지 않았다. 뒤뜰에 잔뜩 쌓아 놓은 연탄만 있으면 언제나 뿌듯했다. 연탄을 가정 난방의 주원료로 쓰기 시작한 지도 어느새 반세기가 훌쩍 지났다. 생존의 ‘필수에너지’로 귀한 대접을 받으며 ‘금탄金炭’으로까지 불렸던 연탄이 세월이 바뀌어 산업용과 서민들의 월동 난방용으로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시인 안도현은 힘든 시절 우리네 삶과 얽혀 있던 연탄을 소재로 세 편의 연작시를 썼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중략)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 (1994년 발표)에 실린 ‘너에게 묻는다’는 이 시구에 묻어 있듯이 연탄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우리네 삶의 애환 속에 짙게 드리워 있다.
연탄을 리어카에 실어 집으로 나르는 모습(1973.11)
다양한 구멍탄 등장으로 소비 확산
전통사회의 연료는 줄곧 나무와 숯과 주먹탄 따위의 신탄薪炭이었다. 유럽에서 증기기관차 발명 이후 일찍부터 석탄이 국가를 부강하게 만드는 산업용 에너지로 큰 몫을 하였으나 우리는 19세기 초부터 공장과 산업시설에서 본격적으로 석탄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마저 여의치 못했다. 러일전쟁(1904~1905)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한제국의 석탄 개발에 태클을 걸었다. 일본 해군함대 연료용으로만 제한시켰다. 사용을 독점해 일반 가정용 연료와는 거리가 멀었다. 석탄을 뗀다고 하더라도 주먹탄이나 조개탄 같이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을 확 바꿔 놓은 것이 바로 원주형圓柱形으로 압축, 성형해서 만든 ‘구멍탄’의 등장이었다.
6·25 수복 이후 봄내골의 가정용 연료는 통나무를 길쭉하게 잘라 아궁이에 넣고 불을 지펴 온돌을 뜨끈뜨끈하게 달궜던 장작이 대종을 이뤘다.
그래서 늦가을만 되면 봄내골 장마당과 공터 곳곳에 장사꾼들이 몰려들어 산더미처럼 장작을 쌓아 놓고 성업을 누렸다. 이것도 살림살이가 넉넉한 사람들만의 몫이었다. 변두리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은 인근 야산에서 땔감을 긁어모아야 했다.
이 무렵 봉의산은 나무가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까까중머리였다. 긁어서 땔 갈잎조차 남기지 않았다. 수요에 비해 턱없이 모자란 땔감 부족과 산림의 극심한 황폐화로 가정용 연료의 전환이 막다른 선택이 아니라 필수로 강요되었던 시기였다.
지난 1955년부터 선보이기 시작한 구멍탄은 세월이 지날수록 급격히 다양해졌다. 구멍탄으로 불렸던 연탄이 구멍 숫자에 따라 9공탄, 19공탄, 22공탄, 25공탄, 35공탄 등 여러 형태로 만들어졌다. 전성기에 들어서는 규격표 준화 작업이 이뤄져 ‘국민연료’로 자리 잡았다.
해마다 공급이 전국적으로 확대돼 강원도 탄광지역도 큰 호황을 누렸다.
근화동 철도 옆에 위치한 저탄장에서 포클레인을 이용해 저탄을 옮기고 있다(1987.4)
공급과 소비 부조화로 해마다 파동
구공탄이 국민연료로 자리 잡게 되자 여기저기에서 여러 문제점이 도출되기 시작했다. 우선 해마다 소비지 저탄량이 모자라 공급에 차질을 가져왔다. 이 바람에 물가를 안정시키려고 정부에서 고시한 가격이 폭등하고 매점매석買占賣惜까지 성행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급기야 지난 1966년에는 여름부터 전국적인 연탄파동이 요동쳤다. 수요가 늘어나 폭등한 가격을 통제하자 오히려 가수요까지 휘몰아쳤다. 한 장에 15원 하던 것을 8원으로 묶어 놓자 생산량이 줄어들어 이른 여름부터 한꺼번에 수요가 몰려들었다.
두 번째 연탄파동은 1974년 여름에 닥쳤다. 그동안 꾸준히 주유종탄注油從炭의 연료정책을 펼쳐 오던 정부는 세계적인 오일쇼크에 따른 원유가 폭등으로 다시 방향을 틀어 연탄사용 독려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연탄수요가 급증해 바쁘게 돌아가는 연탄공장(삼육연탄)(1984.11)
이른 봄부터 사재기에 나서는 바람에 한여름인데도 춘천과 남춘천역두驛頭에 쌓였던 연탄이 바닥이 나고 말았다. 당장 불씨를 이어갈 연탄이 없어 많은 주부들이 직매점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사태가 여기저기에서 빚어졌었다.
일반 가정뿐만이 아니었다. 춘천과 남춘천역두 울타리 안에는 항시 군부대에 보급될 연탄이 방진망에 덮여 산더미처럼 높이 쌓여 있었다.
중동부전선에 보급될 이 월동용 석탄이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춰버린 사건이 터졌다. 광산에서 수송한 석탄화차의 송증에 적힌 도착지를 위조해 막대한 양을 타지로 빼돌린 큰 사건이었다.
기자 초년병 시절 군수사 기관의 온갖 압력을 받으며 이 범죄의 전모를 취재해 기사화시켜 사건을 백일하게 드러나게 만들어 관련자들이 모두 사직 당국에 의해 엄벌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화목을 채취해 어렵사리 추운 겨울을 견뎌내야 했던 전방 군부대에 훈훈한 온기를 되찾도록 만든 것은 지금까지도 기자로서 누릴 수 있었던 보람으로 간직돼 있다.
수요와 공급의 엇박자로 롤러코스터를 타듯 가격이 요동치고 파동이 극심했던 당시의 시대상을 살펴보려고 강원일보를 찾아 연탄 관련 기사의 제목과 기사를 훑어봤다.
▲저탄량 바닥나-춘천연탄공장 가동 중단(1969년 12월 26일자) ▲돈 쥐고도 연탄 못 사(1970년 8월 28일) ▲연탄 배급 실시-주부 하루종일 2, 3장 구입(1973년 12월 12일) ▲연탄판매 기록장 무조건 발급(1974년 7월 23일) ▲추위에 떠는 실험실-연탄난로 사용금지로 연료난 심각(1974년 12월 7일) ▲산지 활기-소비자 우울-직매점 한때 판매 거부(1977년 2월 2일) ▲연탄 사정 최악-수요의 50% 부족(1977년 11월 4일) ▲탄전지대 연탄 바닥-캐 놓기 무섭게 소비지 수송(1978년 9월 23일)
특별한 기준 없이 70년대를 중심으로 강원일보 지면에 중톱 기사 이상으로 실렸던 기사제목들이다. 무작위로 추려본 것이지만 연탄에 얽힌 사회상이 여실이 반영돼 있다.
어려운 이웃에게 연탄을 전달하고 있는 사람들(1975.3)
가스중독과 광산사고로 인명피해 극심
찬바람이 불기 무섭게 온 가족이 달려들어 지게와 리어카로 시커먼 연탄을 나르던 모습은 아직도 50대 이상 노년층의 기억에 고스란히 간직돼 있다. 추위를 견뎌낼 수 있는 유일한 생존 수단이어서 그만큼 절박할 수밖에 없었다.
연탄가스 중독과 광산사고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자고 나면 여기저기에서 연탄가스(일산화탄소)에 중독, 비명횡사非命橫死하거나 열악한 작업 환경인 막장에서 석탄을 캐다가 불귀不歸의 객客이 되는 사고가 자주 터졌다. 시쳇말 그대로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가 걸렸던 연탄가스 중독사망자가 초기부터 1971년까지 1만2,653명(추정)으로 집계된 것으로 미뤄 발생 빈도를 짐작할 만하다.
그래서 70년대 초 사회부에서 법조와 경찰을 출입하는 기자로서는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사고로 잠시도 한눈을 팔 겨를이 없었다.
연탄이 난방과 취사용으로 광범위하게 상용화常用化되면서 가스중독과 광산사고는 심부深部 채탄으로 더욱 늘어났다. 하지만 반비례로 봄내골 주변의 민둥산은 푸르름을 되찾고 해를 거듭할수록 울창해졌다. 여기에 정부의 강력한 산림녹화정책도 크게 공헌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 봄내골에서 지어진 5층 이하 아파트와 주택의 난방연료가 모두 연탄이었으니 가히 그 효과도 엄청나게 클 수밖에 없었다.
이 시대의 고민을 반영하듯 어느 신문에 실린 ‘연탄가스에 중독되지 않는 묘책’을 거금 1,000만원을 걸어 현상공모에 나선 기사와 시중 신문 하단의 광고란에 실렸던 유독성을 줄인 ‘제독성 연탄판매’라는 이색 광고가 눈길을 끌었다. 이 바람에 방안에 득실거렸던 빈대와 이가 없어지는 망외의 소득(?)도 얻을 수 있었다.
또 주부 수백 명이 몰려들어 연탄집게를 흔들며 목소리를 높여 항의데모를 벌였던 사건은 이 시절 연탄 마련이 얼마나 절박한 일이었나를 재차 상기시켰다.
처음에는 쇠틀에 석탄을 붓고 사람이 직접 해머를 내리쳐 구공탄을 만들었다. 그 후 봄내골에는 전기로 자동제작하는 연탄 공장과 동네 직매점이 골목마다 우후죽순雨後竹筍 격으로 들어서고 한때는 열량이 모자란 불량연탄까지 나돌았다. 또 상표까지 붙여 판매경쟁을 벌였던 시기도 있었다.
새끼줄에 매단 연탄을 양손에 들고 집에 들어오거나 한밤중에 방을 빠져나와 오들오들 떨면서 찬 손을 비벼가며 누군가 구멍을 맞춰 연탄을 갈아야 했던 아련한 추억은 돌이켜보기만 해도 온몸과 마음까지 훈훈하게 데워준다.
그리고 봄내골을 비롯한 자치단체가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검문소마다 밀반출 단속에 나섰던 기억도 삼삼하다.
내년 꽃필 때까지 사랑의 불씨 지피자
국가와 강원도의 기간산업으로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던 석탄산업은 1990년대 들어 청정에너지 사용 등에 밀려 사양화에 접어들었다.
석탄산업합리화 정책에 밀려 수백 개의 탄광이 폐쇄되고 연탄공장들이 문을 닫아 퇴락의 길을 걷고 있는 중이다.
현재는 탈원전과 탈화학연료의 기조 속에서 대부분의 가정이 전기와 기름가스보일러 등을 설치, 따뜻한 겨울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연탄사용 가구가 14만 5,000여 가구(연탄은행협의회 발표)에 이른다. 이들은 거의가 도시빈민지역과 달동네에 사는 80세 이상의 고령자들이다.
한결 추워지고 있는 겨울을 맞아 시중 경기부진으로 ‘사랑의 연탄’을 후원하던 온기도 예년 같지 않다. 벌써부터 따뜻한 아랫목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어느 시인은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이 되는 것’이라고 노래하지 않았던가.
그동안 국민생존에너지로 군림해 온 연탄이 지난 세월과 함께 저만큼 밀려났다. 내년 꽃필 때까지 훈훈한 사랑의 불씨가 꺼지지 않기를 빌어본다.
글 김길소(본지 편집위원·한국전래오락연구소장) / 사진 강원일보
춘천 태생. 1970년 강원일보사에 입사해 편집국에서 강원도 전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취재했다.
편집국장, 논설주간, 상무, 전무이사를 지낸 후 언론중재위원회에서 위원과 부위원장으로 언론사와 피해자의 중재 역할을 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