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반세기 동안 많은 사회 변화가 이뤄진 격랑의 시기에 조용한 ‘봄의 고장’ 춘천에서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김길소의 그때 그 사건>은 1970년부터 40여 년간 토박이 언론인으로 이 고장에서 일어난 사건과 변화를 지켜본 필자가 그 당시의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고 숨은 일화와 뒷이야기들을 전하는 코너입니다. <편집자 주>
♬ 해 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 ♪
외로운 갈대밭에 슬피 우는 두견새야
열여덟 딸기 같은 어린 내 순정
너마저 몰라주면 나는 나는 어쩌나
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 처녀… ♬
봄내골을 배경으로 한 국민애창곡 ‘소양강 처녀’의 한 구절이다.
한때 전국 어디서나 흘러넘쳤던 이 노랫가락은 봄내골 사람들의 ‘십팔번(十八番)’이기에 나무랄 데가 없다.
시골처녀의 애틋한 그리움을 애달프게 읊은 이 노래는 오랫동안 나이와 계층에 상관없이 노래방과 응원가, 노래자랑대회, 축제마당의 ‘선곡 1위’를 석권해 왔다. 그러면서 ‘춘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고 온 국민이 즐겨 부르는 ‘국민애창곡’으로 등극했다. 반세기가 흐른 현재는 봄내골을 상징하는 심벌송으로 향토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가요계 원로 반야월이 춘천에서 작사
가요 ‘소양강 처녀’는 지난 1967년 노래 공부를 하던 춘천 출신 가수지망생 윤기순 양(당시 18세)의 초청을 받은 반야월(半夜月) 선생이 소양강에서 느낀 감회를 노랫말로 엮어내고 가수 김태희가 불러 히트함으로써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소양1교 강변에 있던 여관에 보름간 머무는 동안 석양을 등지고 쪽배를 노 젓던 소녀 박경희 씨의 모습을 보고 시상(詩想)이 떠올라 작사하게 되었다는 것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정설이다.
그래서 해방 이후부터 지난 2012년까지 우리나라 가요계의 원로요, 거목으로 군림해 온 반야월 선생의 이야기를 빠트릴 수 없다.
본명은 박창오(朴昌吾)로 1917년 마산에서 태어났다. 1937년 조선일보와 태평양레코드사가 공동 주최한 전국가요음악콩쿠르에 1등으로 입상, 가요계에 데뷔했다.
‘진방남’이라는 예명으로 무대에 섰지만 가수보다 작사에 매력을 느껴 데뷔 6개월 이후부터 작사곡을 쏟아 냈다.
<울고 넘는 박달재>, <단장의 미아리고개>, <산유화>, <유정천리>, <무너진 사랑탑>, <아빠의 청춘>, <월남의 달밤>, <섬처녀>, <잘했군 잘했어> ….
웬만큼 귀에 익은 흘러간 옛 노래의 연원을 쫓아 올라가다 보면 그가 나타날 정도다. 얼마나 독주를 했으면 주위의 시샘을 우려해 ‘옥단춘’, ‘추미림’, ‘박남포’ 등 8개의 가명을 썼을까? 미뤄 짐작할 만하다. 노래도 많이 불렀다.
<잘있거라 항구야>, <불효자는 웁니다>, <꽃마차> 등이 직접 부른 노래들이다. 극본 등의 저술은 물론 반야월 가요작가상을 제정(1977년)하는 등 문화예술계에 큰 족적을 남겨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서훈(1991년)받기도 하였다. 작고하기 8년 전인 2005년 소양강처녀 노래비 제막식에 참석해 서는 “생전에 가능하다면 꼭 1만 곡을 채우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며 사자후(獅子吼)를 토해내 주위의 눈길을 끌었다.
1년에 무려 200~300곡에 이르는 작사곡을 양산해 냈다. 세월이 비켜간 듯 정정한 모습을 드러내며 대중가요 발전에 대한 집념과 열정을 뿜어냈다. 말년(2010년)에는 “일제강점기에 친일군국가요를 부른 것이 매우 후회스럽다”는 속죄의 말을 남기고 스러져 국민들을 안타깝게 만들기도 하였다.
이보다 앞서 1967년에는 배동욱이 작사한 <춘천댁 사공>이 소양강의 운치를 한껏 더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백영호 씨가 작곡하고 이미자 씨가 노래해 7주 연속 금주의 인기가요로 뽑혀 전 국적으로 히트를 쳤었으나 이제는 어렴풋한 기억 속에 묻혀 있다.
공전의 히트로 고장의 새로운 아이콘 되다
‘소양강 처녀’는 공전의 히트 속에 전 국민으로부터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사랑을 받으며 줄곧 국민 애창곡으로 발돋움했다. 그 즈음인 1996년 향토조각가인 고 박희선(朴喜善) 씨가 달려왔다.
살던 집과 작업실이 소양1교 발치였던 그는 “척박한 소양강변에 자비로 소양강 처녀상을 세워 고향에 생명과 얼을 불어넣고 싶다” 는 속내를 털어놓았다. 작품을 구상하고 현장을 답사하며 다부진 포부도 밝혔다. 생명과 통일에 천착한 향토조각가로 그 천재성이 미술계에 두각을 나타내던 터라 그의 조형성에 큰 기대를 걸게 만들었다.
그러나 마흔한 살인 이듬해에 짧은 생을 마감하는 바람에 끝내 천재적인 창작성을 표출하지 못하고 말았다. 필자와는 처남매부 지간의 살가운 관계였던 터라 그의 마지막 외침은 지금까지 가슴을 울리는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그 후 전국 각지에서 ‘목포의 눈물’과 ‘돌아와요 부산항에’ 등이 그 고장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등 장하기 시작했다. 봄내골에서도 △소양강 처녀 노래비 △처녀상 건립 △캐릭터 개발 등을 구체화시키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문화의 연대인 2000년대를 맞아 춘천이 ‘소양강 처녀’의 발상지인 것을 고장을 재발견하는 새 로운 터닝포인트로 만들자는 요구가 여기저기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봄내골 최고의 브랜드 (brand)요, 이미지 메이커(image maker)로 손색이 없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따라 춘천시는 지난 2005년 근화동 소양강변에 5억 5,000만 원을 들여 소양강 처녀상을 제막했다.
처녀상의 총 높이가 12m(좌대 5m, 동상 7m)에 이르러 규모 면에서 전국에서 가장 컸다. 그 옆에는 노랫말과 ‘작사 반야월 작곡 이호’ 라고 아로새긴 노래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악보 밑에 있는 빨간 버튼을 누르면 언제든지 자동으로 노래가 흘러나오도록 만들었다.
부근 호수 한가운데 폐교각을 이용한 쏘가리상(像)과 드넓은 의암호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스카이워크 시설과 산책로 등이 마련됐다.
이 중 호수 위의 보행구간(156m) 바닥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는 국내 최장 소양강 스카이워크는 전철과 관광버스를 타고 온 외지 관광객들이 즐겨 찾아 인증샷을 날리는 것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지 오래되었다. 주변이 온통 ‘소양강’ 지천(至賤)이 되었다. 그래서 춘천시는 이 일대를 봄내골의 새로운 관광 클러스터 존(Cluster Zone)으로 조성을 하고 있어 기대를 모으고 있다.
‘소양강 처녀’를 둘러싼 딴지들
‘소양강 처녀’가 우리 고장과 찰떡궁합을 이루며 큰 보탬을 가져온 일도 많았지만 반면 노래가 장기간 공전의 히트를 치자 께름칙한 화젯거리도 끊이지 않았다.
우선 노랫말의 모델이 된 실존인물이 과연 누구냐? 하는 궁금증에서부터 가사의 불합리성을 지적하는 군말이 흘러나왔다.
“왜 산에 사는 두견새가 갈대밭에서 울고 있느냐?”에서부터 “추운 소양강변에는 동백꽃이 피지 않는다”는 등의 문제 제기였다.
향토 작가가 배제된 처녀상과 쏘가리상에 대한 탐탁지 않은 뒷말도 거들었다.
“앳되고 여린 청순가련형의 처녀가 아니라 힘 꼴 꽤나 쓰는 여장부 같다”거나 “세상에 은색 쏘가리는 없다”라는 작품성 시비도 이어졌다. 또 걸핏하면 소양강을 주제로 한 문화축제가 급조되면서 주민 참여도가 낮고 자생력도 없는 행사가 남발되고 있다는 따가운 반성도 없지 않았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심지어 저작권 도용과 침해 시비에 휘말려 법원이 판가름하고 검찰이 수사에 나서야 하는 일까지 벌어졌었다. 다행히 노랫말에 나오는 동백꽃은 남녘에 서식하는 붉은 동백꽃이 아니라 춘천 출신 김유정의 <동백꽃>에 나오는 노란색의 일명 ‘산동백(생강나무)’을 가리키는 것이고, 저작권 시비도 1심에서 무혐의로 드러났다. 마뜩하지 않았던 문제들도 세월이 가져온 망각 속에 묻혀 이제는 잊혀지고 있는 모습이다.
소양강 처녀는 하늘이 안겨준 선물
인류의 문명이 그러했듯이 태고의 봄내골 모듬살이의 시원(始原)을 만들어 준 게 바로 소양강이다.
역사적으로 ‘춘천(春川)’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쓰이기 시작한 날을 춘천 시민의 날(1413년인 태종 13년 10월 15일로 양력으로는 11월 8일)로 정해 벌써 60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근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깊은 골짜기를 거쳐 한달음에 봄내골로 흘러온 물길을 가두어 거대한 인공호수가 3개나 만들어졌다.
이탈리아 나폴리는 고대 로마 시대부터 유럽 귀족들의 관광휴양지로 사랑을 받았다. 이곳에 가면 깎아지른 나폴리만 해안선 비탈길의 오렌지숲 속에 쌓인 소렌토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 자기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되는 노래가 있다.
바로 <돌아오라 소렌토로>, <오 솔레 미오>와 나폴리 민요 <산타 루치아>다.
우리에게 친숙해지고 사랑을 받고 있는 ‘소양강 처녀’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힘차게 흐르던 강줄기가 거대한 호수에 몸을 맡겨 이제는 흔적조차 찾기 힘들 정도로 주위의 풍광이 바뀌었다. 하지만 이 시대와 하늘은 봄내 골에 ‘호반의 도시’와 ‘소양강 처녀’를 선물로 안 겨줬다.
또 저물어 가는 한 해를 바라보며 나폴리나 부산과 목포에 못지않은 우리 고장의 명실상부한 관광 아이콘이 되어야 함을 기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