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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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34

2018.11
#봄내를 품다
노재현의 한소끔
휴가지에서 읽은 수필 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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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초 휴가를 내서 일본 홋카이도 여행을 다녀왔다. 4박 5일의 일정이었는데, 귀국 전날 숙박한 곳은 무로란시(室蘭市)의 여관이었다. 여관의 콘셉트가 특이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해보자’였다. 객실에는 일부러 TV를 놓지 않았다. 대신 음악을 듣게끔 오디오 기기와 CD를 비치했다. 조그만 책장이 있고 독서등도 마련돼 있었다.


한차례 지진을 겪은 데다 태풍이 홋카이도로 접근하는 상황이었지만 여관 측 콘셉트를 받아들여 일단 ‘아무 걱정도 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아무 걱정이 없겠네’라는 티베트 속 담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마음이 편했다면 거짓말이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누르며 책장을 살피다 눈에 띄는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의 말’이라는 문고판 수필집이었다. 저자는 스즈키 히데코(86세)로 성심회 소속 수녀다. 문학요법·심리요법으로 말기 중환자 치료에 오랫동안 기여해 일본 사회에서 꽤 존경받는 분이기도 하다.


책을 뒤적이다 눈길 가는 대로 ‘이즈의 어부’라는 제목의 수필부터 읽었다(이즈伊豆는 지명). 저자 스즈키 씨가 부상으로 입원한 노모를 간병하러 시즈오카현의 병원에서 지낼 때의 일화를 담았다.


그 병원에는 평생 어부로 살다 척추 부상을 당해 말도 못 하고 꼼짝없이 누워 지내는 말기 중환자가 있었다. 그 환자의 하나뿐인 아들도 어부였으나 풍랑에 희생된 지 오래여서 누구 하나 찾는 이도 없었다. 모친이 완쾌해 함께 병원을 떠날 때 스즈키 씨는 중환자인 노인에게 그저 인사치레로 “몇 달 후 봄에 다시 올게요.”라고 말했다.


이듬해 봄 어머니를 보러 시즈오카에 다시 온 스즈키 씨는 불현듯 그 노인이 생각나 병원을 찾았는데, 놀랍게도 그가 아직 살아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눈치라고 병원 관계자들은 말했다. 스즈키 씨가 노인의 병실을 찾아 “저 왔어요.”라며 손을 꼭 쥐어주자 말 못하는 그 노인은 눈물만 주르르 흘렸다고 한다. 노인은 스즈키 씨와 재회한 그날 밤 숨졌다.


이 이야기를 도쿄 종합병원의 아는 의사에게 들려주었더니 의사가 자기 경험을 말해주었다. 1984년 봄 도쿄 종합병원에는 말기 중환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의사의 예측을 뛰어넘어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가는 이들이 많았다. 특히 점심시간이 되면 아연 생기를 되찾곤 했다. 알고 보니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들에게 생기를 찾아준 것은 낮 12시 45분 NHK에서 재방송하는 드라마 <오싱>이었다.


가난한 집 딸 오싱이 숱한 고난을 이겨내고 성공한다는 줄거리의 <오싱>은 당시 일본의 국민 드라마였다. 주인공과 비슷한 시대를 살아온 환자들이 드라마를 통해 울고 웃으며 사는 보람과 희망을 찾았던 것이다. <오싱>이 마지막으로 방영된 날 밤 중환자 4명이 한꺼번에 숨졌고, 그로부터 일주일 사이에 10명이나 더 세상을 떴다고 한다. 사람에게 희망이란, 그리고 간절한 기다림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생명·생기 유지에 중요한 요소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과연 나는,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기다림에 답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