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차례 지진을 겪은 데다 태풍이 홋카이도로 접근하는 상황이었지만 여관 측 콘셉트를 받아들여 일단 ‘아무 걱정도 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아무 걱정이 없겠네’라는 티베트 속 담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마음이 편했다면 거짓말이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누르며 책장을 살피다 눈에 띄는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의 말’이라는 문고판 수필집이었다. 저자는 스즈키 히데코(86세)로 성심회 소속 수녀다. 문학요법·심리요법으로 말기 중환자 치료에 오랫동안 기여해 일본 사회에서 꽤 존경받는 분이기도 하다.
책을 뒤적이다 눈길 가는 대로 ‘이즈의 어부’라는 제목의 수필부터 읽었다(이즈伊豆는 지명). 저자 스즈키 씨가 부상으로 입원한 노모를 간병하러 시즈오카현의 병원에서 지낼 때의 일화를 담았다.
그 병원에는 평생 어부로 살다 척추 부상을 당해 말도 못 하고 꼼짝없이 누워 지내는 말기 중환자가 있었다. 그 환자의 하나뿐인 아들도 어부였으나 풍랑에 희생된 지 오래여서 누구 하나 찾는 이도 없었다. 모친이 완쾌해 함께 병원을 떠날 때 스즈키 씨는 중환자인 노인에게 그저 인사치레로 “몇 달 후 봄에 다시 올게요.”라고 말했다.
이듬해 봄 어머니를 보러 시즈오카에 다시 온 스즈키 씨는 불현듯 그 노인이 생각나 병원을 찾았는데, 놀랍게도 그가 아직 살아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눈치라고 병원 관계자들은 말했다. 스즈키 씨가 노인의 병실을 찾아 “저 왔어요.”라며 손을 꼭 쥐어주자 말 못하는 그 노인은 눈물만 주르르 흘렸다고 한다. 노인은 스즈키 씨와 재회한 그날 밤 숨졌다.
이 이야기를 도쿄 종합병원의 아는 의사에게 들려주었더니 의사가 자기 경험을 말해주었다. 1984년 봄 도쿄 종합병원에는 말기 중환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의사의 예측을 뛰어넘어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가는 이들이 많았다. 특히 점심시간이 되면 아연 생기를 되찾곤 했다. 알고 보니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들에게 생기를 찾아준 것은 낮 12시 45분 NHK에서 재방송하는 드라마 <오싱>이었다.
가난한 집 딸 오싱이 숱한 고난을 이겨내고 성공한다는 줄거리의 <오싱>은 당시 일본의 국민 드라마였다. 주인공과 비슷한 시대를 살아온 환자들이 드라마를 통해 울고 웃으며 사는 보람과 희망을 찾았던 것이다. <오싱>이 마지막으로 방영된 날 밤 중환자 4명이 한꺼번에 숨졌고, 그로부터 일주일 사이에 10명이나 더 세상을 떴다고 한다. 사람에게 희망이란, 그리고 간절한 기다림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생명·생기 유지에 중요한 요소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과연 나는,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기다림에 답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