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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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45

2019.10
#봄내를 품다
김길소의 그때 그 사건 34
봄내골 영화관의 옛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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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춘천영화제(이사장 주진형)가 지난 9월 5일부터 나흘간 펼쳐졌다. ‘한국 독립영화의 현주소를 묻다’를 주제로 열린 이번 영화제는 벌써 6회째를 맞았다.

할리우드에 들어 있지 않은 제작자들이 만드는 인디(independent)영화의 소박한 잔치였다. 그러나 그 밑바탕에는 봄내골을 한국영화산업 진흥과 영화제의 중심도시로 탈바꿈시켜 나겠다는 야무진 꿈이 담겨 있다.

첫발을 내딛어 걸음마를 시작한 지 여섯째 해를 맞아 이제는 추억의 뒤안길로 사라진 봄내골 영화관의 옛 모습을 기억의 데이터베이스에서 추려본다.



어린이날을 맞이해 영화를 보기 위해 길게 줄을 선 춘천시민들의 모습(1982. 소양극장)



소양극장(1968.)


개항장으로 밀려들어 온 활동사진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은 1892년 인천에 지은 인부좌仁富座였다. 인천에 살던 일본인들이 부富를 누리겠다는 뜻이 담겨 있는 이름이다.(조선신보 1892년 6월 5일자 보도). 활동사진은 이보다 7년 뒤인 1899년 미국인 여행가 버튼 홈스에 의해 첫선을 보인 것으로 전해진다. 활동사진 제작과 상영 이전부터 극장이 먼저 탄생돼 거꾸로 초기 영화산업의 모태가 되었음을 알려준다.


조선인들도 일본인 극장의 영향을 받아 외래 문물이 밀려 들어오는 개항장을 중심으로 인천, 부산, 군산 등에 옥내·외 극장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이 중에서도 조선인 사업가 정치국丁致國이 국내 최초로 1895년 협률사協律舍라는 극장을 지은 후 당시 대한제국의 수도였던 한성(서울)에 줄줄이 극장이 세워지기 시작했다는 것이 지금까지 학계에 전해지고 있는 정설이다.


그 후 광무대光武台(1907년), 원각사圓覺社(1908년)에 이어 종로2가 탑골공원을 중심으로 단성사團城社(1907년), 장안사長安社(1908년), 우미관優美館(1912년)이 차례로 들어서 훗날 한국영화산업의 메카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무렵은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연거푸 승리한 시기였다. 기세가 등등해진 일본인들은 경성가부키자京城歌舞技座(1907년)를 시발로 남대문로와 명동을 중심으로 10여 개의 극장을 지어 활동사진을 틀었다. 무성영화로 변사의 활약상이 돋보였던 이 시기에는 작품의 언어가 두 갈래여서 여러 방면에서 갈등과 충돌이 자주 빚어졌다. 그리고 마을의 공터나 장터같이 넓은 공간에서 벌어졌던 한말 초기의 연회 무대는 역사적으로 오락물을 공연하는 자리요, 민중이 망국의 한을 달래는 곳으로 기능하였음을 엿보게 한다.




피카디리극장(1987.)


봄내골 최초 극장은 읍애관


봄내골에 극장이 들어선 것은 이보다 훨씬 뒤인 1930년이었다. 첩첩산중에다 밀려 들어오는 외래문물의 괄호 밖에 놓여 있어 그만큼 영화 유입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매일신보 1938년 12월 7일자 4면에는 「춘천 읍애관에서 영화 흥행 실시」라는 기사가 아래와 같이 실렸다.


“춘천읍민의 위안기관으로 단 하나의 존재인 상설극장 읍애관邑愛館에서는 일반고객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야 매월 1일과 15일을 제한 일요일과 축일에는 주간 흥행을 하기로 되어 12월 1일부터 실시하얏다고 한다.”


시골의 공회당公會堂이나 마을회관 수준의 작은 규모였다. 그런데다 필름과 상영시스템 확보가 여의치 못했다. 간헐적으로 날을 잡아 영화를 돌려야 했다. 이 시절 양구에서 태어나 화천댐 건설로 가족이 춘천으로 이주한 한국코미디계의 대가 배삼룡裵三龍(본명 배창순)은 어릴 적 춘천초등학교(당시 본정소학교)를 졸업한 뒤부터 읍애관을 드나들었다.


먹고살기가 힘들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했던 일제강점기와 광복의 기쁨과 6·25전쟁의 아픔이 휘몰아치던 격동의 시기였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도 어린 배삼룡은 읍애관 스크린에 비친 미지의 세계에 큰 감동을 받아 지난 2010년 사망하기 직전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다. (1999년刊 비실이의 자서전 「한 어릿광대의 눈물 젖은 웃음」 참조)


악극단의 희극인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고단한 삶에 웃음을 안겨준 그의 활약상은 훗날 한국 코미디계의 황제로 군림했던 춘천 출신 이주일李周一(본명 鄭周逸)로 맥을 이어 갔다. 하지만 정작 이들의 본고장이었던 봄내골 어디에서도 그들의 족적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어쨌건 초기 일본강점기에는 극장이 전근대 유교문화 속에 놓여있었다. 또 1937년부터는 황국신민화운동 皇國臣民化運動이 대대적으로 펼쳐져 지원병 찬양과 같은 전쟁 준비를 위한 도구로 쓰였던 아픈 역사가 담겨 있다. 또 광복 이후부터 6·25전쟁까지는 큰 혼란기여서 상설보다는 가설극장이 미군부대 주변에서 명멸했던 시기였다.



중앙극장(1993.)


극장 전성기에는 10여 극장 성업


봄내골은 군사요충지로 6·25전쟁의 최대 격전지였다. 그만큼 피해가 컸다. 수복 후의 모습은 완전히 황폐화된 잿더미였다. 시가지 변두리와 주변에 국군과 미군부대들이 들어서 도시 재건을 도왔다. 깡통지붕과 ‘하코방’이 대세였던 시절이다.


극장이라야 군부대 천막 조각이나 판자로 차양한 가설극장 수준이었다. 관람석 의자는 가마니를 깔거나 죽데기로 만든 것이 고작이었다. 명동 입구에 있던 시민공회당도 비슷한 수준이었다. 시청광장 주변 공터에 자리 잡았던 가설극장은 이따금 이 고장을 찾아오는 곡마단과 악극단을 비롯한 유랑극단과 서커스단에게 자리를 내어주기도 했다.


봄내골 최초로 세워진 현대식 극장은 리모델링을 거듭해 객석 700석과 자가발전기를 갖춘 소양극장으로 1956년 첫 개관 했다. 옛 제일은행 뒤편에 있던 목조형태의 춘천극장을 현재의 조양동 피카디리극장 자리로 옮기면서 이름을 바꿨다. 그 후 시설을 개조해 아카데미극장(1986년)과 피카디리극장(1987년)이 되었다. 하지만 세태 변화의 격랑에 밀려 지난 2013년 문을 닫고 말았다.


이어 1958년부터 신도극장(소양로), 제일극장(중앙로), 중앙극장(중앙시장 옆), 문화극장(중앙시장 입구) 등이 거의 연차적으로 개관했다. 중간에 봉의산 기슭 기와집골에 동보극장을 비롯, 남부극장, 시민극장 등 소규모 극장들이 영화흥행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오래 견뎌내지 못 했다.



육림극장(2001.)


군인이 많이 주둔해 있는 군도軍都답게 신북면 쌍용극장이 운영되고, 영어를 잘하고 미군부대 출입이 가능했던 사람들이 한때나마 근화동 캠프페이지(Camp Page) 영내에서 스펙터클한 미개봉 미국영화를 볼 수 있었던 것도 이 고장에서만 누려온 특권(?)이었다.


봄내골 영화흥행사업의 전성기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였다. 거의 독주하던 소양극장이 1967년 육림극장(운교동) 개관으로 쌍벽을 이루면서 판도가 확 바뀌었다. 관람석이 962석으로 최대 규모인 데다 웬만한 행사가 모두 이곳에서 열려 컨벤션홀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그 이후에는 소양, 문화, 중앙극장과 함께 개봉관으로 4파전을 이루며 관객들을 끌어 모았던 이 시절이 춘천극장 사업의 최전성기로 기록되고 있다. 도시의 인구와 극장의 몸집이 부쩍 커져 연간 관람자 숫자가 100만 명을 넘어서고 향토일간지에 영화프로광고가 상례화되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아련한 추억이 담긴 극장 풍속도

1950년대 최고의 미남 스타로 이름을 날린 춘천 출신 영화배우 이민이 출연한 영화 <애인>과 <촌색시> 포스터



뉴밀레니엄 시대를 맞아 급변한 영화산업의 환경은 모처럼의 재래식 극장 호황기를 무너트렸다. 오랫동안 관객들에게 문화적 욕구를 채워줬던 재래식 극장들이 모두 문을 닫거나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올드보이들은 지금도 극장과 연관된 아련한 추억들을 가슴에 켜켜이 간직하고 있다.


설날이나 한가위 같은 명절에 극장은 언제나 ‘만원사례’ 였다. 즐길 거리가 마땅치 않아 관객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그래서 으레 암표가 나돌고 이를 단속하려는 경찰의 눈초리가 매서웠다.


머리에는 고깔모자를 쓰고, 목에는 포스터 간판을 걸고 종을 치며 번화가를 맴돌던 선전원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명작의 상영을 알리는 간판이 극장 정면에 걸리기 무섭게 개봉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던 추억이 삼삼하다.


1950년대 후반 국내 톱스타였던 춘천출신 영화배우 이민李敏이 출연한 ‘춘향전’이 개봉되거나, 1960년대 ‘비실이’ 배삼룡이 악극단을 이끌고 고향을 찾는 날이면 항시 극장은 미어터졌다. 속칭 ‘기도木戶’로 일컬었던 검표원의 위세도 등등했다.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공짜 구경을 시켜줄 수 있는 권한은 오히려 뒷전이었다.


막무가내로 입장하겠다고 덤비거나 꼬장을 부리는 자칭 기관원들과 깡패들을 최일선에서 맞닥트려야 하는 극장의 파수꾼이요, 얼굴이었다. 그래서 검표원은 깡다구가 있거나 힘 깨나 쓸 줄 아는 사람들의 몫이었다. 몇 푼 안 되는 입장료 앞에서 자존심을 건 쓰잘 데 없는 시비와 싸움판이 벌어지는 사태가 잦았다. 어느 극장이고 관람석에 별도의 임검석을 두어 경찰이 상주했던 것도 다 이런 이유가 있었다.



(위) 춘천MBC 창사 26주년 기념 극단 「가교」의 악극 「번지 없는 주막」 (1994.)

(아래) 영어를 잘하고 미군부대 출입이 가능했던 사람들은 캠프페이지 영내에서 미개봉 미국영화를 볼 수 있었다.



입장권에 좌석이 지정되기 이전까지는 뒷골목 꼬맹이들의 속칭 빠방틀기(극장을 무임관람하려고 몰래 들어가는 행위)가 극성을 부리기도 하였다.

미국영화 ‘센’과 ‘OK목장의 결투’ 같은 목가적인 서부극은 아메리칸 드림을 안겨줬다. 방화 ‘춘향전’이나 ‘장화홍련전’은 해학과 함께 권선징악을 일깨웠다. 이런 영화를 보다 클라이막스에 이르러 정의의 사도(?)가 사태를 반전시킬 때 관객들은 스크린을 향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초창기 1960년대까지는 영사기가 고장나고 필름이 자주 끊어지거나 발전기가 멈추는 일도 잦았다. 필름이 너무 낡아 스크린에 비친 화면에 비가 쏟아지는 모습이 연출되기도 했다. 어린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극장 출입은 엄격하게 통제됐다. 1960년대 초반까지 극장에 들어갔다 규율선생에게 적발되면 학칙에 따라 정학처분과 벌을 받았다.


영화 상영은 5공화국 이전까지 언제나 공보부에서 만든 ‘대한뉴우스’ 관람부터 시작됐다. 한때는 애국가가 담긴 화면을 보고 난 후에 본 영화를 관람했던 적도 있었다. 영화 줄거리와 내용의 사전 심의가 틀을 잡고 있었던 국가주의와 엄숙주의가 사고思考를 지배하고 있었던 시대상의 단면이기도 하다.

도시의 학력 수준이 높아 춘천에서는 좋은 영화만 들어오면 다른 도시보다 월등하게 언제나 공전의 히트를 쳤다. 영화 한 편의 상영주기가 보통 3~4일, 길어야 10일 정도였지만 서울의 개봉관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동시 개봉하는 경우도 많았다.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책가방을 메고 영화를 보러 나온 학생들의 모습(1983.)


기대되는 춘천영화제의 앞날


극장은 단순히 흥행물을 공연하는 공간만이 아니었다. 하늘天과 땅地, 사람人이 한곳에서 만나 조화를 엮어내는 곳이었다. 고단하고 아린 상처를 부둥켜안고 살아왔던 우리네 삶에 위안과 희망을 안겨줬던 대표적인 문화공간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이렇게 오랫동안 자리매김해 온 정겨운 극장이 알게 모르는 사이에 하나둘씩 우리 곁을 떠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흑백과 컬러TV 출현과 영상과학기술의 급격한 발달이 영상흥행산업의 환경을 하루가 다르게 바꿔놓고 있는 중이다. 지난 1998년 국내 최초로 멀티플렉스(multiplex 극장, 식당, 오락, 쇼핑시설 따위를 합쳐 놓은 복합공간)가 선보인 후 명동 브라운상가에 현대식 시설을 갖춘 프리머스(지금의 명동CGV)가 등장했다. 그 뒤를 이어 퇴계동 CGV와 온의동 메가박스가 둥지를 틀었다.


시장 논리를 앞세운 거대 자본의 위세에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관객 1,000만 명 수준이 넘는 블록 버스터(block buster)영화 시대가 열렸다. 관객들은 인터넷과 모바일로 예매를 한 후 넓고 푹신한 관람석에 앉아 팝콘과 음료를 마시며 편안하게 영화를 즐긴다. 더불어 방화邦畫의 국제시장 호평으로 한국영화산업의 스펙트럼(spectrum)이 부쩍 커졌다. 세계무대는 놔두더라도 현재 국내에서 번듯한 영화축제를 갖고 싶어 하는 자치단체가 무려 30곳이 넘는다. 각도角度와 온도 차가 있지만 도내에서도 여럿이 함께 뛰고 있다. 과연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춘천영화제의 예후豫後가 어떻게 비칠까? 그 모습이 자못 궁금하다. 소박한 꿈이 벅찬 감동으로 다가올 날을 그려본다.






글 김길소(본지 편집위원·한국전래오락연구소장) / 사진 강원일보

춘천 태생. 1970년 강원일보사에 입사해 편집국에서 강원도 전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취재했다.

편집국장, 논설주간, 상무, 전무이사를 지낸 후 언론중재위원회에서 위원과 부위원장으로 언론사와 피해자의 중재 역할을 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