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사진 앞줄 가운데) 씨 가족이 현충일에 고 김창명 씨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서울 동작동 현충원에 모였다.
“나라 없는 백성이 있을 수 있나요? 대한민국 남자라면 당연히 군대 가서 나라를 지켜야지요.” 지난 2월 병역명문가로 선정된 김성근(78) 씨의 첫마디다. 김 씨 가족은 3대에 걸쳐 9명이 병역 의무를 마쳤다. 병역명문가는 3대(조부와 그 손자까지의 직계비속)가 모두 현역 복무 등을 성실히 마친 가문을 말한다. 김 씨의 아버지 고 김창명 씨는 1946년 공산정권이 들어선 고향 평안북도 철산군을 떠나 서울에 정착했다.
철도청에 근무하며 가정생활이 자리 잡혀 가는 듯 했으나 6·25전쟁이 터지면서 다시 부산으로 터를 옮겼다. 그곳에서 성근 씨의 아버지는 부인과 어린 자녀들을 남기고 입대했다. 하지만 입대하고 3개월이 지나 미7사단과 함께 참전한 함경도 장진전투에서 전사했다. 성근 씨의 어머니는 부산국제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어린 자녀들을 키웠다. 어려운 살림 속에도 성근 씨 3형제는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전사한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국방의 의무를 다했다. 성근 씨는 군 복무 중 맹장수술을 받고 다시 최전방 근무를 자원할 만큼 군 생활을 투철히 해냈다. 고 김창명 씨의 손자 5명도 모두 성실하게 군복무를 마쳤다.
성근 씨에게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우리 집안 장손인 원경이가 제대 15개월 후에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는데 이 녀석이 군 복무를 하지 않았다면 우리 집안은 병역명문가가 되지 못했겠지요.” 성근 씨의 딸 김초록 씨가 말했다.
현충일이면 전국에서 성근 씨를 포함한 3남 1녀 형제와 그의 자손들은 서울 동작동 현충원에 모인다. 나라사랑의 마음으로 국가를 위해 싸우다 목숨을 바친 고 김창명 씨를 기리기 위해서다. 성근 씨는 “아버지가 전사하신 함경도 장진은 북한 땅이라서 전쟁 후에도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어요. 이곳 국립묘지에는 아버지 위패만 모셔져 있어요. 아버지가 전사한 지 69년이 지났지만 유골도 찾지 못한 채 낯선 땅에서, 제대로 묻히지도 못하고 외롭게 방황하고 있을 아버지의 혼백을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 없다”며 “눈을 감기 전에 통일이 되어 아버지의 유골을 편히 모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성근 씨의 딸 초록 씨는 “보훈 가족을 넘어서 병역명문가로 발돋움한 우리 집안에서 잘 성장하고 있는 4대와 그 후손들도 기꺼이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건강하고 성실한 국민으로 자라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성근 씨는 현재 후평동에서 부인과 함께 손자, 손녀를 돌보는 재미로 소일을 하며 즐거운 생활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