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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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44

2019.9
#봄내를 품다
김길소의 그때 그 사건 33
궐기대회 잦았던 격동의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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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을 규탄하는 궐기대회 모습으로 중고생 등 많은 시민들이 동원되어 구호를 외치고 있다.(1978.11.3.)



‘온곡溫谷 박영택 보도사진집’을 보고 깜짝 놀랐다. 책 첫머리부터 온통 궐기蹶起 대회 사진이 꽉 들어찼다. 앞부분 행사 섹션에 실린 큼직한 사진 25컷 가운데 22컷이 궐기대회와 다짐대회 관련 흑백사진들이었다.

‘세월의 순간들’이라는 이 보도사진집은 1970년대 이후 도내에서 일어난 굵직한 사건들의 생동감 있는 모습을 274쪽에 걸쳐 낱낱이 담아낸 귀중하고 방대한 자료다. 다른 섹션에도 캠페인과 퍼레이드, 다짐대회 같이 그 시절 이슈에 대한 결기와 기세를 드러내는 행사 사진이 유독 많이 눈에 띄었다.


언론인으로서 평생 강원도 전역에서 일어난 사건의 현장을 지키며 격동의 세월 속의 역사적 사실을 사진에 담아 온 것이다.

‘어제의 우리들 모습이 이랬었구나!’ 하는 회상 속에서 왠지 낯설고 어색한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그리고 국운이 걸린 다급한 명제가 많았던 그 시절을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춘천실내체육관에서 열린 북괴 재침흉계 분쇄 강원도민궐기대회 (1981.6.27.)



도시 전체가 들썩거렸던 궐기대회날


궐기대회가 열리는 날은 언제나 이른 아침부터 부산스러웠다. 중앙에서 갑자기 떨어진 오더order에 맞춰 행사를 꾸려 나가기 위해서다. 여론의 향배를 내다보거나 주춤거릴 틈도 없었다. 각급 기관과 학교 및 사회단체와 동별로 책정된 인원을 당장 최대한 꿰어 맞춰야 했다. 대회가 임박해서는 조용하던 도시 전체가 벌집을 쑤셔놓은 듯 시끌벅적거렸다.


요란한 밴드부를 앞세운 각급 학교 학생들이 메인스트리트인 중앙로를 지나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완장을 찬 규율부장과 학생회 간부들의 지휘 아래 질서정연한 행진이 이루어졌다. 그 뒤를 이어 각급 기관·단체와 주민들이 피켓과 현수막을 앞세우고 행사장으로 몰려들었다. 단골대회장이었던 춘천고 운동장은 갑자기 구름같이 모인 인파로 대회 시작 전부터 금세 뜨거운 열기로 달아올랐다.


재춘 도 단위와 시 단위 기관장들이 본부석에 자리 잡으면 곧바로 대회장에서 나오는 쩌렁쩌렁한 고성능 확성기 소리가 항상 시내 전체를 뒤덮었다. 그리고 말미에는 대회 주제와 성격에 따라 혈서, 삭발, 화형식 같은 극단적인 퍼포먼스가 눈길을 끌었다.



춘천고 운동장에서 열린 6.25 36주년 강원도민 궐기대회(1986.6.25.)



뻑적지근하게 대회를 마친 다음에는 시가지 행진이 펼쳐졌다. 구령에 맞춰 우렁차게 구호를 외치거나 평소 쌓아온 학생들의 통일성 있고 절도 있는 제식훈련 광경은 시민들의 큰 구경거리였다. 이 가운데서도 목총을 든 까까머리 학도호국단 학생들과 교기校旗를 앞세운 여고생들이 교복을 입고 펼치는 늠름한 행진은 궐기대회의 백미를 이뤘다.


꿍꽝거리는 밴드 소리를 듣고 거리 연변으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도 박수를 치고 성원을 보냈다. 열성적이고 적극적인 반응만이 미덕으로 여겨졌다. 앞뒤를 살필 틈도 없이 시가지 전체가 대회 분위기에 빠져들고 활기가 넘쳤다. 바로 밴드왜건bandwagon 효과가 나타나는 순간이다.


겉보기에는 무슨 축제장 같은 분위기가 한 달에 서너 번씩 연출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진풍경은 1950~1970년대에 더 극심했다. 하던 일이나 작업에 지장을 받아야 하는 문제들은 언제나 거센 물결에 묻혀버리기 일쑤였다. 실체적 진실이 이런 모습이었다.


‘어르신’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1950년대 이후 격동의 세월을 살아온 나이 지긋한 세대들이 다시 떠올리는 궐기대회 추억의 단면이다. 시대의 흐름과 가치에 따라 꾸준히 변화돼 왔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어색하고 개운치 못 한 면이 남아 있는 추억이다.




통치 패러다임에 맞춰진 어제의 민낯



춘천기계공고에서 열린 금강산댐 건설 규탄대회(1986.11.6.)



‘세월의 순간들’에 수록된 궐기대회의 실체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강원일보사를 찾았다. 자료조사부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1972년 이후의 보관지를 뒤져 기사를 읽어 나갔다. 세월의 더께를 벗겨본 결과 몇 가지 특징 이 있었다.


대부분 ‘안보安保는 생존生存’이라는 논리를 앞세운 것들이었다. 정신무장을 통해 나라의 기틀을 굳건히 다지고 분단국이 안고 있는 비극의 실체를 세계 만방에 알리려 하는 사례들이었다. 그만큼 나라의 안위를 위태롭게 하거나 겁박劫迫하는 일들이 많았다는 것을 일깨워줬다.


현장사진을 리얼하게 실어서 톱이나 중톱기사 이상으로 비중 있게 다룬 것들이었다.

△총력안보를 위한 국민총궐기대회(1972년 춘천고 운동장) △난국극복 안보단합궐기대회(1975년 춘천고 운동장) △땅굴규탄강원도민궐기대회(1978년 강원도 육상경기장) △안보생존권 수호 도민궐기대회(1980년 춘천고 운동장) △귀순 이웅평 용사 환영 및 결의대회(1983년 육림극장) △KAL기 폭파 도민궐기 및 규탄대회(1988년 춘천 체육관) 등이 눈에 띄었다.



혁신도시 법정소송 승리기원 춘천시민 총궐기대회 화형식(2006.7.7.)



대부분 어쩌다 치러야 할 일과성 행사들이 아니었다. 필사즉생必死則生의 다부진 결의를 드러내고 전국 단위에서 도→시·군→읍·면 단위로 전파시켜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봄내골은 도농통합 이전까지 인구가 10만 명을 겨우 넘기는 수준의 작은 도청 소재지였다. 그런데도 도와 시·군 단위의 기념일과 국경일 행사까지 떠맡았다. 설상가상으로 중앙에서 국내외적인 중대 이슈에 대한 향배向背를 예진해보려고 가장 먼저 궐기대회를 개최해야 하는 경우도 잦았다.


훗날 국가주의나 관변가치가 두드러진 접합지역에서 ‘맛을 보고 간을 치자’는 의도가 담겨 있었던 것으로 읽혔던 대목이다.


이런 까닭으로 봄내골은 한때 ‘전국에서 행사가 가장 많은 도시’라는 평을 들어야 했다. ‘가장 모범적인 도시’라고 치켜세우는 말도 들었지만 달갑지 않은 말이었다. 결국 잦은 동원령에 짓눌린 시민들의 대회 참여율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나중에는 ‘군중 모으기 가장 힘든 도시’라는 말을 듣기에 이르렀다.

이런 궐기대회의 민낯들은 나라를 이끄는 통치 패러다임이 낳은 관제행사였다는 시선과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궐기대회 단골 장소였던 춘천고등학교 운동장 전경(2019. 8.)


민주화 물결로 세월의 뒤안길로 밀려나


원래 궐기蹶起는 ‘벌떡 일어난다’는 뜻이다. 이익 단체의 목소리나 기세를 드러내는 데모나 시위와는 다르다.

한반도는 6·25전쟁(1950년)과 휴전협정(1953년), 정부수립에 이은 4·19 민주혁명(1960년), 5·16 군사쿠데타(1961년), 10월 유신 선포(1972년),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1979년)과 육영수 여사 피살사건(1974년), 전두환 신군부 등장과 12·12 군사반란(1979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1980년) 등에 이어 오랫동안 세계 열강들에 둘러싸인 동서냉전 구도 속에 굴곡이 심한 격변의 세월을 견뎌내야 했다.


국민소득이 겨우 몇십 달러 수준에 그쳤던 약소국가로서는 요동쳤던 국제 정세의 파고波高와 소용돌이를 헤쳐 나가기가 버거웠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 시절에는 국가와 정부 차원의 가치나 주장을 대내외에 알릴 수단이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일찍이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는 “자연 상태로부터 자기 보존을 실현해 줄 투쟁 상태를 극복하려고 각자의 권리를 양도해 국가를 탄생시켰다”고 주장했다. 또 “국가의 임무는 투쟁을 막고 평화를 획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당시로서는 개인의 자유가 국가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국가주의적 국가관이 사고思考를 지배하던 시대였음을 깨닫게 만든다. ‘불편한 진실’이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에는 항시 명암明暗이 있기 마련이라고 했던가? 국가지상주의와 권위주의도 더 이상 민주화의 거센 물결을 거스를 수 없었다. 이미 거세게 몰아닥친 민주화의 흐름은 탈脫국가주의와 지방분권화 운동에 탄력을 받아 우리 사회를 수직적인 관계에서 수평적인 관계로 변화시켰다. 경제 발전이라는 공功과 자유와 인권침해라는 과過 가운데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최대한 보장하는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도약한 것이다.


그러나 작금昨今에는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녹록지 않은 문제들이 여럿이다. 북한과 중국 러시아에 앞서 일본과의 통상·외교 문제가 발등의 불이 되고 있다.

어느새 저만큼 멀어진 지나온 세월의 시대상을 돌이켜 보면서 “천하의 흥망에는 필부에게도 책임이 따른다”는 말이 무겁게 가슴을 누른다.







글 김길소(본지 편집위원·한국전래오락연구소장) / 사진 강원일보

춘천 태생. 1970년 강원일보사에 입사해 편집국에서 강원도 전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취재했다.

편집국장, 논설주간, 상무, 전무이사를 지낸 후 언론중재위원회에서 위원과 부위원장으로 언론사와 피해자의 중재 역할을 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