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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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33

2018.10
#봄내를 품다
춘천의 기념비 22
남이섬
남이장군 추모비의 진실

북한강 끄트머리쯤에 반달 모양의 섬이 하나 있다. 만국기를 단 커다란 배가 많은 사람들을 싣고 드나들기를 반복하고 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뒤엉켜 왁자함 속에서도 또 다른 고즈넉함을 맛볼 수 있는 섬. 들어서면 발길로는 뭍으로 나올 수 없는 서정성을 간직한 남이섬이다.


이 섬도 한때는 텅 빈 공간이었다. 너무 한적해 외로움에 떨던 무인도의 시절이 있었다. 장마철이면 북한강물이 수시로 침범하던 척박한 땅이었다. 이름조차 춘천의 남쪽에 있는 섬이라 남도(南島)라고 불리며 주목받지 못했다. 북한강을 따라 내려오다 춘천의 남서 쪽 끝에 머물고 있는 남이섬. 주 출입구인 선착장이 가평군 달전리에 있어 많은 사람들이 가평 땅으로 오해하지만 이 섬의 정확한 주소는 춘천시 남산면 방하리다.



남산면 방하리 남이섬 내 선착장 인근에 위치한 남이장군 묘역




농사조차 쉽지 않았던 섬, 그 안의 돌무지 하나


새덕산 줄기 하나가 남서쪽으로 내달리다가 북한강물로 인해 발길을 멈춘다. 그 발끝의 낮은 산기슭이 장마철에 강물이 범람하면 일부가 물에 잠기면서 섬 아닌 섬이 되곤 했다. 섬이 될 운명이었는지 1944년 청평댐이 건설되고 수위가 점점 높아졌다.


갈수기에 겨우 무릎까지 차던 낮은 물길이 깊어지며 완전한 섬의 형태를 갖춘다. 농사조차 쉽지 않았던 이 섬에 돌무지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구전으로 이 돌무지를 훼손하면 집안에 우환이 생긴다며 방기(放棄)되던 일명 남이장군 무덤이었다.


섬이 된 지 22년 만인 1966년 토지주인 경춘관광에서 대대적인 정비를 실시한다. 구전으로 전해지는 돌무지 처리 문제가 애매했다. 사실 남이의 실지 묘소는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에 존재하고 있었다. 정확한 기록은 없었지만 조선시대에 반역죄로 처형당한 경우 묘를 만드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에 이 돌무지가 남이의 묘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당시의 여건이라면 슬쩍 치워버려도 그만이었을 구전 민속자원을 보존하기로 결정한다.




白頭山石摩刀盡(백두산석마도진)

백두산의 바위는 칼을 갈아 다 없애고

豆滿江水飮馬無(두만강수음마무)

두만강 푸른 물은 말에게 다 먹이리라

男兒二十未平國(남아이십미평국)

남아 이십에 나라를 평정치 못하면

後世誰稱大丈夫(후세수칭대장부)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칭하리오



남이, 역모 모함을 받은 장군


남이(南怡·1441∼1468)는 태종의 외손자로 조선 세조 때 17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한 기린아였다. 무관으로 함경도에서 일어난 이시애 난을 진압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또 얼마 후 여진족이 출몰하자 윤필상 휘하의 정벌군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28세의 나이에 지금의 국방장관 격인 정2품 병조판서에 오른다. 그러나 예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시기에 의해 병조판서에서 종2품 겸사복장으로 좌천되는 수난을 당한다. 이어 역모를 꾀했다는 유자광의 고발에 억울하게 극형을 당하니 그의 나이 겨우 28세였다. 이때 역모의 증거로 제시했던 남이의 시가 묘역 앞 자연석에 새겨져 있다.


전장에서 승전한 자신감을 한껏 과시한 시였지만 이 글이 자신을 찌르는 칼로 되돌아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역모의 증거로 그의 한시 3행 ‘男兒二十未平國’의 평평할 평(平) 자를 얻을 득(得) 자로 고쳐 이십의 나이에 나라를 얻어야 한다는 역설로 모함을 한 것이다.




남이장군추모비


이름 없는 섬에 붙은 남이의 이름


1977년에 묘역을 재정비하면서 홍살문을 세우고 안쪽에 추모비를 세웠다. 글은 ‘가고파’ ‘성불사의 밤’을 작사한 노산 이은상에게 받았다. 남이의 생애와 이 묘역을 조성하게 된 사연을 비문으로 새겨 놓았다. 글씨는 서예가 일중 김충현의 서체이다.


대가들의 글과 글씨로 격조 있는 묘역을 조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런 사연으로 남이섬이란 이름과 지금의 남이장군의 묘역이 탄생하게 되었다. 묘역 앞에서 명예와 권력의 허망함과 부질없는 인간의 욕망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한다.


아직도 인터넷상에는 이 섬을 개발한 회사의 상술로 가 묘를 만들고 남이섬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이곳에 남이가 묻혔는지 아닌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만 옛것을 지켜 가는 그 뜻이 아름답지 않은가.


매년 벚꽃이 날리는 봄이면 억울하게 멸문지화를 당한 남이의 넋을 위무하고 모든 이들의 평안과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도당굿이 묘역 앞에서 펼쳐진다. 이 굿은 우리의 전통문화로 남이장군 사당굿 예능보유자인 이명옥 만신이 직접 주관하고 있어 또 하나의 볼거리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