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반세기 동안 많은 사회변화가 이뤄진 격랑의 시기에 조용한 ‘봄의 고장’ 춘천에서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김길소의 그때 그 사건>은 1970년부터 40여 년간 토박이 언론인으로 이 고장에서 일어난 사건과 변화를 지켜본 필자가 그 당시의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고 숨은 일화와 뒷이야기들을 전하는 코너입니다. <편집자 주>
얼마 전 금강산에서 남북이산가족 상봉이 재개됐다. 남북의 화해무드를 타고 지난 8월, 2년 10개월 만에 다시 이뤄진 제21차 이산가족 상봉의 발길은 역대급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던 태풍 솔릭(제19호) 소동도 막지 못했다. 1985년 9월 정부차원에서 이산가족 첫 만남이 이뤄진 후 지금까지 21차례나 열린 이 행사의 모태가 바로 당시 세계인의 이목을 끌었던 KBS의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드물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은 다음에도 남북 분단과 냉전 체제가 지속돼 1천만 명에 이르는 이산가족들의 아픔과 상처가 치유되지 못해 왔었다. KBS가 한국전쟁 33주년과 휴전협정(1953년 7월 27일) 30주년을 맞아 특별생방송을 기획하게 된 이유였다. 봄내골 낙원동 옛 청사(1978년 건립) 시절 KBS춘천방송국(현 KBS춘천방송총국)은 강원도를 아우르는 네트워크 지역국의 일원으로 ‘만남의 광장’을 만들어 이 방송에 적극 참여, 큰 반향을 일으켰었다.
감동적인 만남 이어져 방송 연장 출연자 시청자 통곡 속에 눈물
첫 방송은 지금부터 35년 전인 1983년 6월 30일 밤에 방송된 4시간 45분짜리 프로였다. 가슴에 자신의 신상명세서를 적은 메모판을 걸고 공개홀에 입장한 이산가족을 아나운서가 차례로 소개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이 방송을 보고 연락(전화)이 오거나 직접 찾아오면 스튜디오에서 상봉을 주선해 편집 과정 하나 없이 극적인 장면을 그대로 생생하게 전국에 송출했다. 수소문 끝에 나타난 연고자가 지방에 살면 KBS의 해당 지역 국과 연결, 1차로 화상대화를 나눠 확인한 후 만남을 주선했다. 대부분의 출연자들은 만남과 대화가 이뤄지는 과정에 그동안 쌓였던 설움이 벅차오르고 목이 메여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30여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애타게 찾았어도 생사조차 알 수 없었던 혈육을 되찾은 벅찬 기쁨과 떨어져 살아야 했던 서러움이 한꺼번에 복받쳐 뜨거운 박수 속에서 얼싸안고 “엉~ 엉~” 통곡하며 기쁨의 눈물을 쏟았다. 누구나 한 다리 건너면 주위에 이산가족이 없는 사람이 거의 없어 이 장면을 지켜보던 전국 시청자들의 감흥도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 어느 극적인 드라마보다 진한 감동을 안겨줬다. 출연자는 물론이고 시청자들도 함께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첫날 850가족이 출연해 36건의 만남이 주선된 후 이튿날은 기름에 불을 붙인 격이 되었다. 출연하고서도 언제 나타날지 모를 가족을 기다리거나 출연을 신청하려고 한걸음에 달려온 이산가족 인파로 KBS 중앙홀은 순식간에 북새통을 이뤘다.
당초에는 첫 방송이 시작된 날 자정까지 접수된 것만 출연시키기로 했었다. 그러나 방송이 이어지면서 이틀 사이 신청자가 1만여 건에 이르렀다. 전 세계 뉴스매체의 기자와 카메라맨들이 한국에 몰려와 시시각각으로 벌어지는 감동적인 만남의 순간을 취재·보도함으로써 지구촌의 최대 화젯거리가 되었다.
낙원동 옛 청사에 ‘만남의 광장’ 마련 갈수록 애절한 사연과 만남 이어져
이산가족찾기 특별생방송이 온 국민의 관심과 큰 호응을 받자 정부와 지역사회에서도 발 벗고 적극 지원에 나섰다. △이산가족찾기 운동 상설화 △실태와 관련 자료 조사 및 전산화 △등록센터 운영 착수 및 비정규 방송 이외 시간에도 지속적으로 펼쳐 나가기로 하면서 큰 탄력을 받았다.
방송 2주째가 지나면서 출연 신청자 누계가 10만 건을 훌쩍 넘어섰다. 그동안 중앙의 보조적인 역할이었던 KBS춘천방송국도 방송 패턴을 바꿔 지역 신청자를 출연시켜 전국 방송에 실시간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낙원동 옛 청사 앞 잔디밭 광장에 출연자들을 위한 ‘만남의 광장’을 설치(1983년 7월 29일)했다.
터널식 게시판을 ‘ㄷ’ 자 형태로 세워 빨간색 슬레이트로 지붕을 덮고 청사로 올라가는 언덕길에도 벽보판에 비닐을 씌워 비가 내리더라도 젖지 않도록 만들었다.
춘천과 부산 스튜디오를 통해 상봉이 이뤄진 이산가족. 방송을 통해 가족을 찾은 이들은 1만 189건이었다. 출처 KBS아카이브
광장 한복판에는 “용기를 잃지 마세요! 희망을 가지세요”라 는 격려와 함께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는 비원의 경구를 내 걸었다. 6·25전쟁의 참상과 만남의 순간을 담은 사진까지 전시, 가족을 찾는 수천 장의 벽보를 샅샅이 눈여겨 살펴보는 이산가족의 아픈 마음을 달래줬다. 눈에 잘 띄도록 정성 들여 만든 벽보판에는 가슴이 찢어지고 끈적끈적한 눈물이 배어있는 애절한 문구들이 가득 담겨 있어 읽는 사람이면 누구나 눈시울을 적셔야 했다.
1983년 7월 4일 새벽 4시부터 직접 방송을 시작하자 몰려들기 시작한 이산가족 인파의 애절한 사연이 알려지면서 날이 갈수록 더 많아졌다. 강원도가 남북 접합지역인 데다 인구 대비 이산가족이 가장 많은 지역이었던 터라 봄내골 일반 주민들의 관심도 모두 여기에 쏠려있었다. 그래서 방송이 진행되는 기간 방송국 주변은 물론, 중앙로 농협중앙회 강원지역본부 앞길까지 인산인해를 이뤘다.
4개월 넘도록 453시간 방송 세계 방송史에 새 금자탑 쌓아
역사적인 이 방송은 전 국민의 적극적인 참여와 높은 공감을 불러일으킨 가운데 1983년 6월 30일 밤 10시 15분부터 11월 14일 새벽 4시까지 장장 138일 동안 이어져 한여름과 초겨울 밤을 뜨겁게 달궜다. 생방송을 쏟아낸 시간도 무려 453시 간이었다. 세계 방송사에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커다란 업적으로 평가돼 현재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시청률 53.9%(한국갤럽 조사)를 기록한 이 프로를 새벽 1시까지 시청한 적이 있고 눈물을 흘렸다고 응답한 사람은 88.8% 였다. 가히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다”는 표현이 조금도 어색 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 기간 동안 전국에서 이산가족이 10만952건을 신청하고 이 중 절반인 5만 3,536건이 방송에 소개됐다.
상봉이 이뤄진 숫자도 1만189건을 기록했다. TV와 라디오로 동시 생방송하던 공간에서 미주와 유럽 등지의 이산가족과 사연들을 소개, 전파매체의 효용과 기동성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봄내골을 포함한 도내에서는 모두 2,746건이 신청돼 114가족이 꿈에서 그리던 가족을 상봉(KBS춘천방송총국 60년사 참조)하는 커다란 성과를 거뒀다. 그리고 여의도 광장에 서 있었던 강원도민 만남의 날(1983년 10월 18일)에는 1,500명의 도민이 참석, 7가족의 상봉이 이뤄졌다.
성과가 미미해 보일 수 있으나 내면은 그렇지 않았다. 전체가 70명 남짓했던 KBS춘천방송국 직원들의 열과 성의를 다한 방송활동과 뒷바라지도 돋보였다. 33년 동안 떨어져 살다가 극적으로 남동생을 만난 누나 6명(6·25 이전 춘천시 서면 서상리 거주)은 춘천방송총국 앞뜰에 마련했던 만남의 광장에서 남동생을 조랑말과 가마를 태워 구식혼례를 올려주는 등 훈훈한 뒷얘기가 화제의 꼬리를 물었다.
당시 뉴스센터부에 근무했던 허남길 기자는 “빈틈없는 방송과 만남을 위해 전 직원 누구 할 것 없이 모두 매달렸어요. 밤낮없이 철야로 방송이 이어졌지만 대체인력이 모자라 카메라를 잡은 제작진이 흘러내리는 코피를 틀어막으며 중계할 정도였으니까요.”라고 회고했다.
큰 울림 안겨준 민족의 ‘멍울’ 지울 수 있는 항구적 대책 긴요
이산가족찾기 특별생방송은 국내적으로 국민들의 높은 참여와 공감도 속에 진행됐다. 국제적인 관심과 호응도도 이에 못지않았다. 세계 유수의 신문과 방송사를 비롯해 AP, UPI, AFP, 로이터 등 4대 통신사들이 대규모 취재반을 한국에 파견, 자세히 보도해 지구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인도적인 관점을 뛰어넘어 전쟁과 정치적인 갈등이 가져온 참상을 전 세계에 고발하고 보편적 인류애를 고취시킨 것으로 극찬을 받았다. 그러면서 세계 언론사에 새로운 금자탑을 쌓아올린 것으로 평가되자 한때 춘천방송총국 앞뜰의 만남의 광장과 벽보를 이스라엘의 ‘통곡의 벽’이나 독일의 ‘베를린 장벽’처럼 영구 보존하자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었다.
KBS춘천방송총국 조병관 문화사업국장은 “아직도 출연자들이 친필로 적은 대장과 사연판 원본이 중앙에 보관돼 있다.” 며 “미상봉자의 재회와 상봉 가족의 그 후를 살펴보는 사회적 관심이 아쉽다.”고 털어놓았다.
오랜 세월이 흘러 이제는 이산세대의 노령화와 사망으로 상봉에 대한 절실함이 흐려지고 있다. 아물지 않은 전쟁의 상처도 우리 주위에 그대로 마음의 빗장을 걸고 남아 있다. 우리 민족이 이산가족찾기 운동이 안겨준 ‘큰 울림’의 멍울을 지울 수 있는 날은 언제 다가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