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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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33

2018.10
#봄내를 만나다
춘천과 문화도시 2
축제가 뿌린 문화도시의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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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천시가 1995년 문화체육부의 ‘올해의 문화도시’에 선정된 배경을 지난달에 이어 연재합니다.




▲ 춘천인형극제 캐릭터로 만든 거리조형물


▲ 1989년 춘천인형극제 창립 시 ㈜바른손팬시 문화사업부장으로 참여했던 함승종 전 (주)바른손팬시 대표




고향 춘천을 위한 ㈜바른손팬시의 사회공헌


KT&G 상상마당 춘천으로 옷을 갈아입은 옛 어린이회관 내 2층 카페에서 만난 함승종(69) 전 ㈜바른손팬시 대표는 인터뷰를 시작하기에 앞서 회상에 잠긴 듯 의암호를 바라보았다. 아침 10시 춘천에서의 인터뷰를 위해 서울 자택에서 8시에 출발했다고 한 그였다. 오면서도 옛 생각을 떠올렸다고 했다. 힘들게 일한 시절이었지만 그만큼 보람도 큰 시절이었다며 그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축제를 만들어 낸 사람 중의 하나였다는 자부심이 있는 듯했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해 인터뷰를 위해 당시 함께 일을 했던 이들과 오랜만에 전화통화를 하기도 했다.” 며 긴장감을 보인 그는 이내 곧 춘천인형극제가 시작했던 30년 전으로 기억을 되돌렸다.


강원도어린이회관(춘천어린이회관을 거쳐 현재는 KT&G 상상마당 춘천)은 김성배 강원도지사 시절인 1980년 5월 24일 개관한 것으로 1979년 세계 아동의 해를 맞고 강원도가 이듬해 열릴 전국소년체전 개최지로 지명되면서 추진된 결과물이었다. 초기 4~5년만 해도 강원도에서 의욕적으로 관리해왔으나 이후에는 위탁운영업체의 잦은 변경과 운영비 부족에 시달렸다. 그러던 중 1989년 4월 ㈜바른손팬시 문화사업부가 어린이회관을 맡게 된다. 함 씨는 어린이회관 운영을 전담한 문화사업부장이었다. 바른손은 5월 5일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이라는 주제로 지역단위로는 제법 큰 어린이축제를 열었고 그해 가을 제1회 춘천인형극제를 시작했다.



▲ 제1회 춘천인형극제 포스터. 당시 ㈜바른손팬시의 정연종 아트디렉터가 디자인했다.


함승종 씨의 회고에 따르면 이렇다.

“춘천 출신인 ㈜바른손팬시 박영춘(80) 회장께 강원도에서 연락이 왔어요. 당시 운영이 어려웠던 어린이회관을 위탁하려 한 것이죠. 당시 바른손은 디자인, 팬시, 카드 중심으로 꾸려 가던 회사였는데 제안을 듣고 망설이긴 했지만 사회 환원 측면에서 미래의 아이들에게 좋은 꿈과 추억을 선물할 수 있겠다 싶어서 수락을 했습니다.


그리고 5월 5일, 어린이날 축제를 크게 열었어요. 행사가 다행히 성공적이었고 강원도와 춘천시에서는 계속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회사 입장에서도 의미 있는 일이었고 이왕이면 제대로 잘 치러보자는 생각이었지요.” 그러나 밖으로 보이는 것과 다르게 기업의 입장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당시 바른손은 팬시뿐만 아니라 식음료 사업도 함께 하고 있었는데 어린이회관이라는 이름 때문에 주류나 담배 판매 등으로 수익을 낼 수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운영상 어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당시 어린이회관이 강원도에서 춘천시로 운영관리주체가 이전되면서 시에 규제를 풀어달라고 수차례 얘기했지만 어렵다고만 말해 아쉽게도 그해 말에 운영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어린이 행사는 포기하기가 어려웠어요.”


여기에는 시 측의 당부가 있었다. “이영래 당시 춘천시장이 어린이회관 운영은 안 하더라도 춘천인형극제는 꼭 바른손에서 맡아주기를 간곡히 요청했어요. 박영춘 회장은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 춘천에서 점점 삭막해져가는 도시의 어린이들에게 꿈과 아름다운 추억을 찾아주자고 생각하고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 1991년 9월 14일자 스포츠서울에 보도된 (주)바른손팬시 박영춘(오른쪽) 회장과 강준혁(왼쪽) 집행위원장. 기사는 “춘천인형극제가 국제적인 행사로 발돋움해 춘천이 보석처럼 빛나는 문화도시가 되기만을 바란다고 입을 모았다” 고 전했다.



공연기획, 디자인, 건축가, 인형극인 함께 모여 기획


김수근 건축가의 공간사옥에는 소극장 ‘공간사랑’이 있었다. 당시 극장장은 강준혁(2014년 65세로 작고). 1977년부 터 다양한 형태의 공연을 선보여 동종업계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사물놀이가 그곳에서 태어났고 인형극과 마임공연도 이곳에서 기획공연으로 펼쳐졌다. 어린이회관을 강원도로부터 위탁받아 운영을 시작하려던 바른손은 이제 막 스튜디오 메타를 연 강 씨에게 ‘강원도 어린이문화회관 운영방안 및 활성화 연구’용역을 의뢰했다.


연구를 통한 사업성 검토는 크게 두 가지로 이뤄졌다. 하나는 하드웨어로서의 수익모델, 나머지 하나는 어린이회관 특성을 살릴 수 있는 운영프로그램의 개발이었다. 연간 운영 프로그램을 개발하면서 5월과 10월에 어린이회관의 특성을 살린 두 개의 축제를 제안했고 바른손은 이를 수용했다. 그러면서 어린이회관 운영담당자인 함 씨는 공간에서 김수근 건축가가 해당 프로젝트와 관련된 이들을 모두 모아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게 하는 점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공간 팀과 한창 일할 때 저는 30대 초반에 불과했는데 회의를 하는 날이면 김수근 선생이 저까지 불러 함께 회의를 했어요. 그리고 일을 하면 꼭 협업을 하게 했고요. 그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최상의 결과를 얻으려면 최고의 전문가들과 함께 만들어야 하는구나.”


그렇게 컨설팅을 맡았던 강준혁 씨를 필두로 비평, 디자인, 건축가, 인형극인이 모여 집행위원회가 조직됐다. 당시 바른 손의 함승종 부장, 일간스포츠 문화부차장 구희서(필명 구히서) 평론가, 바른손의 아트디렉터 정연종 그래픽 디자이너, 후에 박수근미술관을 설계한 메타 건축의 이종호 건축가, 그리고 인형극인 안정의, 강승균 씨가 그들이었다.





▲ 춘천인형극제가 만들어지고 유지되는데 큰 역할을 했던 (고)강준혁 집행위원장

▲ 춘천인형극제가 만들어지고 유지되는데 큰 역할을 했던 (고)강준혁 집행위원장


이들이 조합된 이유를 이메일을 통 이들이 조합된 이유를 이메일을 통한 인터뷰에서 구희서(80) 씨는 이렇게 회고한다. “춘천인형극제는 기획의도가 분명한 축제로 출발했습니다. 어린이문화에 초점을 맞췄고 서울이 아닌 지역(춘천)이었으며 민간이 주도한다는 틀을 잡은 것이 그것입니다. 이는 종래의 축제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새로운 시도였고 그 취지에 공감했습니다. 인형극제와 인연을 맺은 것은 강 선생의 권유도 있었겠으나 당시 공간사랑을 중심으로 모였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의기투합 되었던 것이 더 강하게 유인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바른손 회사 내부에서는 예산과 인력 지원에 대해 ‘왜 우리가 이렇게까지 해야 되느냐’는 불만도 있었다. 하지만 박영춘 회장은 인형극제와 관련해서는 함 씨에게 모든 일을 위임했다. 기업명은 드러내지 않았다. 일곱 명을 대표해 집행위원장은 강준혁 씨가 맡았고 서울 대학로의 스튜디오 메타 사무실에서 한 달에 한 번씩 회의를 가졌다. 목표는 하나였다. 지속가능한 세계적인 축제를 만들자!




▶ 축제가 가까워지면 일간지부터 보도가 시작됐다. 당시 일간스포츠 기자였던 구희서 씨는 자신이 쓴 기사를 보고 제주도에서 구경 온 가족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1989년 9월, 춘천과 만난 인형극제1989년 9월, 춘천과 만난 인형극제



1989년 9월 30일 해가 진 뒤, 춘천시로 이관된 어린이회관 야외무대에 당시 이영래 춘천시장이 무대에 섰다. 첫 회이고 늦은 저녁이라 관객은 많지 않았지만 제1회 춘천인형극제의 개막을 알리는 자리였다.


“축제 첫 회라 관객이 많지 않았어요. 그때 춘천의 지인들에게 전화를 많이 했죠. 저녁 먹고 슬슬 걸어서 구경들 오시라고. 그래도 자리가 꽤 남았었는데….” 함승종 씨는 ‘저 넓은 객석을 어떻게 채워야 하나….’를 걱정했던 당시를 회고했다.

그러나 걱정은 기우였다. 회를 거치며 전국적인 입소문을 탔다. 무엇보다 언론의 힘이 컸다. 당시 공간사랑을 통해 대부분의 문화부 기자와 연결이 있었던 강준혁 씨의 대 언론 홍보가 빛을 발했다. 중앙 일간지, 특히 당시 구희서 씨가 문화부 기자로 활동하던 일간스포츠는 1989년 9월 24일 제1회 춘천 인형극제 기사를 과감하게 앞세워 축제의 규모감을 드러냈다.


중앙 언론의 축제 언급은 춘천을 아름다운 곳, 가고 싶은 곳으로 느끼게 했고 같은 시기 시작한 춘천마임축제와 함께 우리 고장을 ‘문화예술의 도시’로 각인시키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축제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던 인형극인 수백여 명의 열정은 매년 여름 거리퍼레이드를 통해 시각화됐다.


1회 인형극제를 준비하며 “이번 인형극제는 인형극인들에 게도 뜻깊은 행사일 뿐만 아니라 춘천시나 강원도의 문화적 긍지가 될 것입니다”라고 했던 강준혁 집행위원장은 이듬해 두 번째 인형극제를 준비하며 “세계적인 음악제 연극제 영화 제들이 칸 아비뇽 에딘버러 등 한결같이 작은 도시에서 열리고 있듯, 수려한 경관의 호반도시 춘천에서 세계적인 인형극제를 지속적으로 유치해 나갈 계획”이라는 좀 더 구체적인 로드맵을 드러냈다.





세련된 디자인이 돋보인 축제


인형극제는 인형극은 물론, 아이들 참여 프로그램을 점점 더 확대시켜 관람객들의 호응을 높였다. 안숙선의 판소리, 김덕수의 사물놀이 등 당대 유명한 전통문화예술 공연도 저녁마다 무대에 올랐다. 지역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작품이었다.


축제는 자연스레 지역 주민의 이목도 끌었다. 특히 캐릭터가 도드라졌다. 당시 강원일보 문화부 기자였던 유현옥(61) 한국여성수련원장은 “춘천의 공연문화 현장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디자인된 포스터와 플래카드, 전단 그리고 공연장 셋팅 등이 문화부 기자인 제가 봐도 참 세련됐다고 느꼈다.” 고 회상했다.


바른손 아트디렉터로 활동했던 정연종 씨는 롯데 마스코트 현상설계에서 1등 당선안을 받았던 이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던 그래픽 디자이너였다. 그가 디자인한 가로수 배너가 매년 여름마다 공지천을 따라 펄럭이면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춘천인형극제가 시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초기만 해도 지원이 전무 했던 춘천시도 적게나마 지원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시 예술계장이었던 신용철(63) 씨는 “시의 예산 지원은 사실 얼마 되지 않았지만, 축제가 시작되기 며칠 전부터 문화예술과 직원들이 직접 나가 무대 현장에서 일을 많이 도왔다.”며 “매해 인형극제를 통해 춘천을 찾는 관람객들이 늘어나고 아이들이 너무나 좋아하는 걸 보면서 우리도 뿌듯했고, 무엇보다 강준혁 선생을 포함해 모든 스태프들이 시 공무원들도 한 구성원으로 여겨줘 고생도 많았지만 보람도 매우 컸던 시간”이었다고 했다.


강준혁 씨의 생전 어느 인터뷰에도 그와 같은 얘기가 있다. “민관합동이라는 부분은 원래 내 스타일이 그래요. 공무원이냐 아니냐 안 가리고 모두 다 한 식구라고 생각하거든 요. 같이 떠들고 같이 밥 먹고 같이 술 먹고 그러면서 정을 쌓아요. 저는 사람 관계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축제를 진행하는 데 있어서 사실 이게 처음이자 끝입니다.”




▲ 춘천인형극제가 널리 사랑을 받은 데에는 축제를 만들고 참여한 이들의 열정과 헌신이 큰 역할을 했다. 거리퍼레이드에 참가한 아마추어 인형극인들.



올해로 30회 맞은 춘천인형극제


1995년 11월, 문화체육부가 주최한 ’95지역문화행정전문가대회 마지막 날 춘천의 다양한 문화 예술적 자산과 실무자들의 열정으로 얻은 ‘올해의 문화도시’는 이름만이 아니라 국가 예산도 함께 따랐다. 문체부가 첫 회로 시행한 우리나라 대표 문화관광축제에 춘천인형극제가 선정되면서 국비를 받게 된 것이다.

여기에 도비 포함해 28억 원과 시비 46억 원 등 모두 74억 1천여만 원을 들여 1996년 사농동 모진강(북한강)변에 인형극 전용극장을 착공해 2001년 5월 4일 대지 4천 970평에 479석 규모의 실내공연장과 200석의 야외공연장을 짓고 춘천인형극제 조직위원회에 운영을 맡겼다.


축제는 계속되었지만 1997년 외환위기가 닥치며 기업 재정이 어려워지자 바른손은 1998년 축제부터 손을 떼게 된다. 1997년 8월 15일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직원 두 명이 상주하며 축제를 만들고 있다”며 “기업을 하면서도 문화적인 측면에서 사회에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지 않겠느냐”고 했던 한 기업가의 생각은 더 이상 뻗어나가지 못했다. 하지만 춘천인형극제는 공공기금 지원을 통해 2014년 8월 강준혁 씨가 작고한 후로도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고 올해로 30회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