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부잣집이나 좀 산다는 집에는 으레 안방이나 사랑방에 병풍이 자리하고 있었다.
병풍은 바람을 막거나 물건 등을 가릴 때 또는 무언가를 꾸미기 위해서 방안에 세워놓은 물건으로
병풍에는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거나 수繡를 놓기도 했다.
병풍에 그리는 그림으로는 모란 포도 십장생 기러기 대나무밭 등이 있는데, 이는 부자가 되거나 신분이 높아지고 싶은 마음,
자식을 많이 낳고 싶거나 오래 살고 싶은 마음, 형제자매 사이의 우애와 화목해지고 싶은 마음 등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인생사에 수복강녕壽福康寧은 사람이면 모두가 바라는 일이기에 비단 병풍이란 뜻을 담고 있는 금병산은
이름만으로도 평안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하다.
김유정 소설의 배경이 된 금병산
춘천은 산으로 둘러쳐져 있는 전형적인 분지 형태로 동쪽으로 대룡산과 금병산에 감싸여 있다.
대룡산과 금병산은 바위가 많지 않고 주로 흙으로만 이루어진 육산肉山으로 사람으로 치면 포근한 품을 내어주는 어머니 같다.
그중 금병산은 춘천의 정동남 방향에 자리하여 춘천을 감싸주는 작은 몸집의 어머니 모습이라 더욱 정겹게 다가온다.
금병산錦屛山은 정병산正屛山 전병산展屛山 진병산 陳兵山 등 꽤 많은 이름으로 불려 왔다.
한자가 다르긴 하지만 네 가지 이름 모두에는 병자가 들어 있으며,
세 가지 지명에는 '둘러친다'라는 뜻의 병屛’ 자가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금병산의 핵심은 이 '병屛' 자에 있다.
'병屛' 자는 빙 둘러쳐 공간을 가려 막을 때 사용되는 병풍을 가리키며,
실제로 금병산은 동내면 학곡리로부터 신동면 팔미리까지 둘러쳐서
산자력에 있는 마을을 병풍처럼 감싸 주고 있어 이름과 내용이 딱 들어맞는다.
금병산은 김유정과 인연이 꽤 깊다. 김유정 소설의 작품 대부분이 금병산을 배경으로 펼쳐지기도 하지만
김유정의 고향 실레마을이 금병산의 품에 감싸여 있어 더욱 친근하게 다가온다.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우리네 춘천 사람을 닮았으니, 특히 '동백꽃'과 '봄 · 봄'의 주인공인 두 점순이는 우리네 일상의 젊은 여인으로
국민가요 ‘소양강 처녀’와는 또 다른 귀엽고 발랄한 말괄량이 소녀로 다가온다.
이렇게 티 없이 맑고 순수한 점순이 뒤에는 금병산이 어머니처럼 보듬어 주고 자라도록 뒷배경으로 있었기 때문이리라.
어머니 품 같은 흙산
금병산의 매력은 육산肉山이 주는 포근함인데 올라갈수록 아늑함과 정겨움에 빠져든다는 점에서 그 이름이 썩 걸맞다.
‘실레이야기길에 등장하는 노란 생강나무(동백꽃)와 들꽃 향기는 코를 간지럽히고,
켜켜이 쌓여 층을 이룬 낙엽송과 나뭇잎에서 퍼지는 내음은 어머니의 땀 냄새를 맡는 듯 풋풋하다.
그렇게 애를 쓰고 힘들이지 않아도 젖을 찾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듯 정상을 내어준다.
금병산 정상 전망대에 올라서면 어머니 품속처럼 아늑하게 춘천을 내려다보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가까이에 안마산으로부터 진산 봉의산이 시야에 들어오고, 소양강과 매강 시이에 중도가 손에 닿을 듯이 놓여 있다.
저 멀리 서쪽 능선이 삼악산으로부터 북배산 몽덕산 화악산 용화산까지 이어져 있으며,
동쪽 능선이 청평산으로부터 마적산 대룡산 연엽산까지 이어져 있다.
이에 금병산이 병풍이 아니고 오히려 사람 사는 도심과 자연경관을 감상하는 여덟 폭 병풍의 조망처임을 알게 된다.
이러한 까닭에 금병산은 멀지도 그렇다고 아주 가깝지도 않은 자리에서 부드럽게 감싸주는 어머니의 품속 같은 산으로 내게 다가선다.
춘천 태생으로 줄곧 춘천에 살아오면서 의미가 풀리지 않는 지명이 있었다.
금병산 남서쪽 끝자락에 있는 '팔미리'라는 지명이 그것이다.
팔미리는 고문헌인 『여지도서』에 팔미리八味里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팔미'를 지금까지도 마을 분들은 발미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발미'의 발은 '앞에 쳐서 가리는 구조물'인 발로서 병풍과 동의어이고 발은 주렴珠簾과도 동의어이다.
발미에서 발은 금병산의 병풍에서 뜻을 취하여 왔고 미는 끝이라는 의미와 마을을 지칭하는 뜻으로 쓰였다.
즉 발미는 금병산의 끝자락 마을이란 뜻이 된다. 팔미에서 팔은 산이란 뜻이고 미는 마을이란 뜻이 있으니, 이는 산골 마을이란 뜻이 된다.
발미와 팔미는 뜻은 같으면서도 어원에 있어서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