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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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61

2021.2
#봄내를 품다
최돈선의 골목이야기 ⑭
사라진 것이 사라진 것이 아님을 알게 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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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화동엔 무궁화가 없다


 근화는 무궁화의 한자 이름이다.

근槿은 무궁화나무요, 화花는 꽃이다. 그러니까 근화동이란 무궁화꽃동네란 뜻이다.

아마 이 동네의 이름을 지을 때 무궁화가 이 동네 어디든지 피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나는 그렇게 상상했다.
 그런데, 없다.
이 동네에서 무궁화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아니 단 한 그루의 무궁화도 나는 본 적이 없다. 이 근화동에선.


 우리의 어린 시절은 무궁화와 함께한 시절이었다.
 나는 무궁화만큼 튼튼하고 무궁화만큼 아름답고 무궁화 만큼 순결한 꽃을 본 적이 없다.

물론 다른 꽃들도 다 제가끔 제 모습으로 아름답고 예쁘다. 하지만 무궁화는 그 붉음처럼 단심丹心이라는 의미가 있다.

100일을 핀다고 하여 장수나무라 지칭하기도 한다. 인내와 다함없는 무궁의 나무요,

또 꺾 꽂이를 해도 잘 자리니 기운찬 생명력으로 건강하게 번식하는 나무임을 알 수 있다.

어느 분은 군자의 기품까지 지녔다고 한다.
 나는 어릴 때 늘 그렇게 들어왔고 또 배웠다.


(좌)근화동 골목, (우)근화동 타일집 풍경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옛날 아이들은 골목에서 이렇게 술래놀이를 하며 놀았다.
무궁화 무궁화 우리나라 꽃 삼천리강산에 우리나라 꽃,
골목은 아이들의 놀이터였으므로 골목에서 이 노랫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들뜨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린 시절엔 다들 이 노래를 부르며 자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국가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을 부를 때면 가슴이 뭉클함을 느끼곤 했다.
 그런 나무였다. 무궁화는.
 그런데 무궁화가 없다. 근화동엔.


 해방이 되고 그 이듬해 1946년, 그때까지 써 오던 전평리가 근화동으로 바뀌었다.

당시 춘천역 근처에 무궁화나무가 꽤 있었다고 한다.
누가 이름을 바꾸었건 근화동은 75년 동안 우리 시민과 함께해 왔다.
골목이 새로워지고 조금씩조금씩 모습을 바꾸면서 근화동 골목은 많이 아름다워졌다.

그럼에도 무궁화는 보이지 않는다. 이제 골목에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라는 술래놀이를 하는 아이도 만날 수 없고,

무궁화 무궁화 우리나라꽃, 이란노래를 부르는 아이도 만날 수 없다.

단지 근화초등학교 아이 들이 등하교하는 골목만이 조금 붐빌 뿐, 그 아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 골목은 물을 끼얹은 듯 썰렁해진다.
조금은 삭막한 이 근화동에 작은 무궁화동산 하나 만들어 보면 어떨까.

집집마다 공터가 있으면 무궁화나무 한 그루 심어놓으면 얼마나 골목이 환해지겠는가.
골목 어귀 곳곳에 무궁화나무를 보게 된다면 정말 무궁화 마을, 무궁화꽃동네란 이름이 자연스레 불리어지지 않을까.


(좌)보물 76호 당간지주, (우)보물 77호 칠층석탑


대체 절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근화동엔 무궁화만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근화동엔 보물이 두 개 있다.
당간지주는 보물 76호이고 칠층석탑은 보물 77호이다. 이 것들은 모두 한 절 안에 있었을 것이다.

보통 당간지주는 절 마당에 세워진다. 많은 대중이 몰려들어 법당에서 법회를 할 수가 없을 때, 절 마당 당간에다 탱화를 걸어놓고 법회를 열었을 것이다.

그리고 칠층석탑은 대웅전 앞에 우뚝 선 보탑이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지금 이 두 보물의 위치로 보아 우린 이 절의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당간지주와 칠층석탑의 직선거리가 600m라 한다. 어느 것도 옮긴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렇다면 사방 지름 1km 이상의 큰 절을 상상할 수 있다. 봉의산을 배후로 하고 앞들엔 강이 흐른다.

자양강과 소양강이 합수하여 만들어진 삼각 주는 중도와 위도가 되었다.

중도는 선사유적지가 있는 곳이 고, 상중도는 고산孤山이란 작은 산이 있어 찾아온 시인묵객 들이 자연에 매료되어 빼어난 시를 많이 남겼다.

주변 경치가 절경일 뿐만 아니라 완만한 봉의산 자락에 위치한 절은 꽤 유명한 절이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그러나 절의 흔적이라곤 달랑 당간지주와 칠층석탑뿐이다.

화산이 폭발하여 깊이 매몰된 것이 아니라면, 기왓장 한 조각 남아있지 않는 것은 뭔가 이상하지 않는가.
 그런데 딱 한 점의 그릇이 발견되었다.
1632년 현감을 지낸 유정립이란 사람이 낙향하여 소양로2 가 ‘칠층석탑’ 부근에서 집터를 닦다가 ‘충원사忠圓寺’ 라 써진 그릇 한 점을 발굴한다.

그것으로 충원사란 절의 존재가 드러나지만, 충원사가 어떤 모습의 절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고려사>에도 봉의산 서쪽 기슭에서 춘천 근화동 ‘당간지주’까지의 일대가 충원사 절터라는 기록이 있다.


 그만큼 큰 절이라면 아마 우리도 모르는 깊은 곳에 거대한 절의 유적이 잠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의 충원사는 신라시대 암자였던 것을 봉의사로 고쳤고, 다시 충원사라 했다. 그러니까 사라진 절과는 다른 절인 것이다.

다만 옛 충원사의 명맥을 잇는다는 소망에서 개명했다고 한다.
 어찌 생각하면, 사라진 절간이 고려시 대에 몽골의 침입으로 모두 잿더미가 된 것이라는 추정은 가능하다

 그 후의 어떤 기록도 존재하지 않으니, 이 절은 분명 불 가사의한 신비로움으로 아직도 미궁 속에 잠겨 있다.


(좌)미군부대 앞 플라타너스, (우)춘천역사



새로이 생겨난 춘천역과 사라진 춘천역


 경춘철도는 1937년 5월 경성부 성동역과 춘천역을 잇는 93.5㎞의 거리로, 철로 부설에 착수한 지 2년 2개월 만에 1939년 7월 개통하였다.

해방되기 6년 전 일이다.

춘천역은 전평리 들판에 세워졌다. 당시 전평리엔 빈민주 택 127호 800여 주민이 살았다.

이들이 이주할 후보지를 결 정 못 한 손영목 지사는 차일피일 핑계를 대다 마침내 최후의 담화를 한다.
 “빈민들의 철거문제는 실로 가엾은 일이다. 그러나 지방 발전을 위하여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동내면 같은 교외로 나가면 도와주겠다. 시내로 후보지를 정하는 것은 불가하다. 개인적으로 돈이 마련된 사람은 그건 자유다.

교외로도 나갈 수 없고, 시내도 불가능한 자는 만주로 가라. 그곳은 살기 좋은 곳이다.

치안도 안전하고 만주까지 갈 수 있는 여비도 마련해 주겠다. 주택과 자작농지 4정보도 주겠다.

다만 10년 동안 매 년 30원씩 갚아 나가라. 그러면 훌륭한 지주가 될 수 있다.”
손영목 지사의 감언이설엔 이런 뜻이 담겨 있다. 너희는 우리의 주민이 아니다, 라는 것이었다.

그는 절망한 사람들에게 비수를 꽂은 셈이었다.
춘천역은 그런 아픈 원주민의 한이 서린 곳이다.
그런 춘천역이 1950년 6 · 25로 인하여 소실되었다가 1958년 다시 신축하였다.

그것을 2012년 청춘열차 운행 가동으로 종착역이 되었다.
 지금의 유리집인 역사를 새로 짓고 이전의 역사는 허물었다.

아마 옛 춘천역은 드라마 ‘겨울연가’의 한 장면으로 기록되어 남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춘천역이 춘천시민에게 쉽사리 길을 내주지는 않았다.
6 · 25전쟁이 끝나고 몇 년 후 춘천역 앞에 거대한 외인부대가 주둔했다.

미군유도탄기지사령부가 들어선 땅은 축구장 86개가 들어설 넓이였다.

사람들은 철망이 쳐진 담장을 빙 돌아 춘천역으로 가야 했다. 가면서 담장에 써진 표지를 보곤 했다.
 ‘이 구역은 미군의 재산입니다’
그리고 그 미군기지도 떠났다. 우리 시민은 시내에서 직선거리의 춘천역을 자유롭게 오고 갔다.

역사 앞에 춘천대교가 건설되어 중도와도 연결되었다.
그러나 과거의 흔적은 아직도 미궁이다. 중도의 선사유적이 그렇고, 충원사가 그렇고, 눈 씻고 찾을 수도 없는 무궁화가 그렇다.

그러나 사라진 것들은 언젠가 희미한 빛 한 줄기를 우리에게 가느다랗게 던질 것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