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문화도시는 바로 춘천시!”
1995년 11월, 한국의 대표 문화예술의 도시가 되다
1995년 11월 1일 수요일 오전 10시. 예향 전남 광주의 무등산자락에 위치한 신양파크호텔 연회장에는 전국각지에서 몰려든 200명 이상의 문화행정가들이 빼곡히 자리했다. 그날은 당시 문화체육부가 2박 3일간 주최한 ‘95지역문화행정전문가 대회의 마지막 날이었다.
‘전국의 문화담당 공무원과 문화원장이 모여 세계화 지방화 시대의 지역문화발전을 모색하고 자료 정보 교환’하는 것을 목적으로 문체부가 처음으로 만든 자리였다. 춘천에서는 김정명(2006년 85세로 작고) 당시 춘천문화원장과 홍강인(78) 당시 문화예술담당관이 참석했고 신용철(63) 당시 예술계장이 당일 새벽 4시 춘천을 출발해 호텔 입구에 막 도착하던 차였다.
홍 과장은 이 시간을 내심 기다렸다. 대회 둘째 날인 10월 31일, 문체부 담당자로부터 ‘춘천시가 올해 처음 시행되는 올해의 문화도시에 선정되었으니 대회 마지막 날 수상을 하게 될 것’이라는 언질을 받았기 때문이다. 춘천을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전혀 듣지 못한 얘기였다.
광주까지 버스를 타고 왔다는 얘기를 들은 담당자는 ‘부상으로 꽤 무거운 청동조각상이 나가니 차를 준비하는 게 좋을 것’이라는 조언도 해주었다. 홍 과장은 바로 이명섭(80) 당시 기획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소식을 알렸다. ‘부상이 있으니 차를 광주로 보내달라’는 기별을 함께 보냈다. 배계섭(2018년 3월 82세로 작고) 시장은 ‘춘천의 경사’라고 좋아했다.
저녁 늦게 소식을 들은 신 계장은 배차 신청을 할 수 없어 다음날 새벽 4시, 자신의 차를 끌고 광주로 향했다. 오전 10시까지는 현장에 도착해야한다고 해 부지런히 달렸던 기억뿐이다. 고속도로 중간중간에 낀 살얼음도 얼핏 생각이 났다.
인사말이 끝나자마자 사회자는 ‘올해의 문화자치단체’를 발표하겠다고 했다. 이틀 전 신문 기사에선 이미 광주광역시와 경남 창원시의 수상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당시 경합을 벌인 부천시도 내심 기대했다. 그러나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광역자치단체로는 광주광역시가, 기초자치단체로는 춘천시가 수상의 영광을 안은 것이다. 홍강인 전 국장은 “춘천시를 불렀을 때 터져 나왔던 박수소리와 타 시군 과장들이 무척이나 부러워하던 그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회상했다.
문화도시 디딤돌 놓은 춘천인형극제와 마임축제
1995년 11월 25일자 춘천시보(현 시정소식지 봄내)의 기사를 보면 보다 구체적인 수상 내막을 알 수 있다.
“춘천시가 올해의 문화자치단체로 선정된 이유는 문화예술 공간 활용도와 마임축제, 인형극제, 국제아마추어연극제 등 국제 규모 행사의 성공적 개최와 시민공감대 형성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개발과 문화예술분야에 대한 투자가 일반회계 규모의 3.24%로서 비교적 높은 비율을 점하고 있다는 것 등에 서 높은 평가를 얻어 최종 경기도 부천시와 경합 결과 영예스런 영광을 안게 됐다.” 그러면서 춘천시가 높은 평가를 얻게 된 배경으로 문체부와 한국문화정책개발원이 제공한 자료를 들어 이렇게 설명했다.
“먼저 춘천시의 인형극제, 국제마임축제는 그동안 우리나라의 문화예술자원이 대부분 서울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역단위에서 국제적인 규모의 현대적인 문화예술행사를 개최하는데 어려운 여건임에도 불구하고 국제규모의 문화예술 행사를 연례적으로 지속적으로 개최하여 춘천시를 세계적인 문화도시, 인형의 꿈을 이루는 곳으로 라는 지역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지역사회발전을 도모한 성공적인 국제문화축제라는 평가를 얻었다.
특히 춘천인형극제는 다른 지역의 문화예술제와는 달리 바른손(주)이라는 기업이 적극적으로 사업을 기획하여 국제적인 행사로 육성한 기업이 지역의 문화예술 부문에 투자한 대표적인 사례로 들고 있으며 단일 장르의 문화축제, 지역간·단체간·문화인 간의 문화협동 수범사례로 연륜이 길지 않으면서도 단기간 내에 지역의 대표적인 축제로 정착되어 국제문화교류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되었다.”
이와 관련해서 홍 전 국장은 수상 당시 “춘천시가 무엇보다 인형극제와 마임축제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등 지역에서 현 대예술을 만들고 전파하는 모습이 좋게 보였다는 얘기를 들었던 게 기억난다.”고 술회했다.
인터뷰에 응한 당시 직원들 또한 “올해의 문화도시로 선정되는데 있어서 행정도 많은 정성을 기울였지만 이 모든 것의 바탕에는 인형극제와 마임축제, 연극제 등 축제가 있었다.”며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축제를 만들고 즐기는 등 많은 노력과 애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춘천인형극제의 주춧돌이 된 바른손(주) 기업에 대해서도 언급이 있었지만 이는 다음 시리즈에서 다루기로 하고 행정과 관련된 내용을 마저 정리하고자 한다.
▲ 1989년 10월, 제1회 춘천인형극제 전야제에서 인사말 하는 이영래 당시 춘천시장.
문화행정가들의 노력
1995년 초여름의 어느 날, 한국문화정책개발원에 근무한다는 이흥재 박사(당시 책임연구원, 현 추계예대 문화예술경영 대학원장)가 춘천시를 찾아왔다. 춘천인형극제에 관심이 많아 안내를 받고 싶다고 했다.
담당인 신 계장이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눴다. 춘천인형극제 스탭들과도 가깝게 지냈던 그였기에 축제가 열리는 8월 중순 2박 3일을 함께 숙식하며 축제의 속살을 느끼게 해주었다. 축제 기획자들과도 많은 얘기를 나눈 이 박사는 춘천을 떠나며 9월에 문화도시 만드는 작업을 하게 될 것 같다는 얘기를 신 계장에게 넌지시 전했다.
9월 중순, 문체부 발신의 공문이 도착했다. 전국 230개 지자체를 대상으로 문화도시 선정 작업에 돌입할 것이니 각 담당자들은 자료를 만들어 팩스로 보내라는 지시였다. 선정조사는 한국문화정책개발원에 위임한다고 했다.
예술계 차석 권혁만(현재 춘천시립청소년도서관장), 막내 함인석(현재 시립청소년도서관 주무관)이 보름동안 고생했다. 인터넷이 덜 발달된 시절이었기에 문서 송달은 대부분은 팩스 또는 우편이었다. 급하면 직접 가지고 가는 게 일상인 시절이었다.
하루는 팩스로 문서를 두 시간 동안 보내니 한국문화정책개발원의 한 직원이 전화를 했다. ‘아직 더 보낼 것이 있습니까. 저희가 전화사용을 못하고 있어서요.’ 하나의 선으로 팩스와 전화를 겸용하던 시절이었다. ‘아직 다 못 보냈다’고 하니 ‘그럼 우편으로 보내라’고 했다. ‘그럴게 아니라 직접 찾아 뵙겠다’고 하고 바로 다음날로 관용 차량을 이용해 서울 정동으로 향했다. 당시 문화계장 이시우(64), 차석의 박근순(61) 등 문화예술담당관 소속 직원 10여명은 너나할 것 없이 한 팀으로 도왔다.
신 전 춘천시 부시장은 “수상한 뒤에야 한국문화정책개발원 담당자에게서 지역문화예술축제에 행정이 적극 참여하고 지원하는 시군은 춘천시가 유일하다고 들었다.”며 “전국 각 시군 중에서 춘천시만큼 충실하게 자료를 보낸 곳도 없었는데 이 점을 매우 고맙게 생각하더라.”고 회상했다. 춘천인형극제에서 시간을 함께 보낸 이흥재 박사는 ‘95지역문화행정전문가대회 첫날 <우리나라 지역문화 활동의 현주소>를 주제로 한 세미나에서 ‘춘천인형극제를 사례로 문화행사가 지역발전에 미치는 효과’를 발표해 전국에서 모여든 문화행정가들에게 춘천시를 인상 깊게 해 주었다.
논문의 서언은 이랬다. “춘천인형극제는 전통에 바탕을 두지 않고 새롭게 창조된 개별 장르의 문화예술 지역축제다. 이는 지난 7년간에 상당한 지역 사회 문화적 파급효과를 미쳐오고 춘천의 지역 이미지를 제고시키는데 크게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지역 경제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평가된다. 춘천인형극제를 사례로 한 연구의 결과는 앞으로 지방의 수많은 지역문화예술행사를 평가하는 모델로 응용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지방자치단체들이 문화에 바탕을 둔 지역 활성화의 전략을 수립하는 데에 참고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국제적인 축제’를 꿈꾼 춘천인형극제
1995년 올해의 문화도시 선정과 관련해 당시 시 담당 직원들과의 인터뷰에서 꼭 들어가는 두 가지 키워드가 있었다. ‘춘천인형극제’와 ‘마임축제’이다.
우선 춘천인형극제.
1989년 9월 29일 호반의 도시 춘천에서 세계적인 규모의 제1회 춘천인형극제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중앙지를 중심으로 보도되기 시작했다. 춘천시와 한국인형극제협의회가 공동주최하는 축제로 전국의 인형극단 18개 단체 공연과 일본 미노무 시인형극단, 남사당꼭두각시놀음 등의 특별공연이 10월 4일까지 춘천어린이회관에서 펼쳐진다는 게 골자였다.
1989년 1회부터 2013년까지 춘천인형극제에서 집행위원장을 맡아 온 공연기획자 강준혁(2014년 65세로 작고) 씨는 제1회 춘천인형극제 개막일 당시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인형극제가 칸, 아비뇽, 에든버러의 축제와 버금가는 페스티벌을 만들기 위해 인형극인 심포지엄 등 국제적인 축제로서 갖추어야 할 행사를 기획했다.”며 서울이 아닌 춘천을 장소로 한 배경에 대해서는 “춘천은 서울에서 한 시간 남짓한 거리에 위치하였으면서도 국내의 어느 도시보다 아름다운 자연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어 세계적인 문화예술축제의 도시로 뻗어 갈 수 있다.”고 했다.
축제는 그의 말대로 승승장구했다. 당대 유명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어린이회관의 공간적 미감이 인형극과 한 몸이 돼 이곳만의 예술적 아우라를 만들어냈고 전국 각지, 특히 수도권 관광객이 줄이었다. 6년 만인 1994년에는 해외 5개 팀을 포함한 43개 극단이 참여하고 관람객도 첫해 7,500여 명에서 2만 5,000여 명으로 늘어나는 등 국내 최대 규모의 공연예술축제로 거듭났다. 언론의 관심도 집중됐다. 춘천인형극제를 항상 마임축제와 함께 언급하며 호반의 도시 춘천이 이제는 문화예술의 도시로 불리어도 손색이 없다고 추켜세웠다.
그렇다면 춘천인형극제는 어떻게 시작됐을까.
<다음 달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