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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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43

2019.8
#봄내를 품다
김길소의 그때 그 사건 32
세월의 뒤안길로 밀려난 노루목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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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반세기 동안 많은 사회 변화가 이뤄진 격랑의 시기에 조용한 ‘봄의 고장’ 춘천에서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김길소의 그때 그 사건>은 1970년부터 40여 년간 토박이 언론인으로 이 고장에서 일어난 사건과 변화를 지켜본 필자가

그 당시의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고 숨은 일화와 뒷이야기들을 전하는 코너입니다. <편집자 주>







동면 장학리 노루목저수지



노루목저수지의 앞날이 봄내골 주민들에게 초미焦眉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환갑의 나이를 지나 제 몫을 끝낸 저수지를 놓고 재개발 방향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하면서 이 고장의 핫이슈로 등장한 것이다.

도시의 급팽창으로 시가지 한복판에 놓이게 된 저수지 매매 가격이 수백억 원에 이른다. 게다가 개발 비용까지 보태면 가히 천문학적인 자금이 투입돼야 하는 굵직한 사업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래서 이 고장의 ‘뜨거운 감자’가 된 지 벌써 9년째 접어들었다.


눈에 밟혀온 풍경의 한 자락이 추억의 무대로 밀려나는 대신 캠프페이지 부지처럼 새로운 봄내골 미래의 모습을 함축할 수 있는 사업이라는 점에서 날이 갈수록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저수지에서 학생들이 스티로폼을 이용해 뱃놀이를 하고 있다.(1993.7.)


봄내골 뒤뚜루의 유일한 젖줄


노루목저수지는 지금부터 62년 전인 1957년에 축조됐다. 그 당시 봄내골 뒤뚜루(후평동)의 농경지는 자갈밭에다 하늘만 바라보고 비가 내리기만을 학수고대해야 하는 천수답이 대부분이었다.

발치에 줄기차게 흐르는 소양강 물줄기를 놓고서도 농업 관개용수灌漑用水가 모자라 논배미를 넓힐 엄두도 내지 못했다.


불모지에 가까웠던 이곳에 번듯한 저수지를 세운 것은 4선의 국회의원을 지낸 고 홍창섭 전 강원 도지사의 역할이 컸다. 노루목저수지를 ‘동면저수지’ 또는 ‘홍창섭저수지’라고 부르게 된 연유도 그가 국회의원으로 농림분과위원장을 맡고 있을 때 이 저수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축구장 10개 크기밖에 되지 않는 10만4,148㎡의 면적에 최대 저수용량이라야 기껏 34만7,000톤밖에 되지 않는다. 제방 둑의 길이도 190m에 높이 10m로 아주 작은 규모다. 하지만 저수지 하류 농경지 80㏊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더불어 뒤뚜루 일대의 유휴 농경지 개발에도 큰 몫을 해냈다. 봄내골 동쪽의 유일한 젖줄이요, ‘가뭄의 단비’같은 귀한 존재였다.


우리나라 농업수리사업의 역사는 길다. 이미 삼국시대 때부터 시작되어 왔었다. 그러나 샘터나 연못, 냇물을 활용하는 소규모 저수지나 보洑 수준에 그쳤다.

그러던 것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달라졌다. 일본 본토를 공업화하고 모자라는 식량을 한국에서 보충한다는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을 본격화하고 전국에 598개의 수리조합을 설립, 몽리면적蒙利面積을 35만 정보町步로 넓혔다.


그 후 8·15 광복과 한국전쟁으로 혼란기를 겪으면서 수리사업水利事業이 일시 중단되는 정체기를 겪었다. 이런 시련기를 이겨내게 만든 것이 농지개혁특별회계법 공포로 받게 된 농지상환금과 미국의 원조였다. 이것을 종잣돈으로 다시 활기를 찾을 수 있었다. 노루목저수지도 바로 이때 세워지게 된 것이다.




저수지 준설 공사(1993.)



주민들의 추억이 서려있는 공원


봄내골의 옛 이름은 맥국貊國이다. 도읍지는 발산拔山으로 토속어로는 ‘바라미’, ‘발뫼’라 불렀다. ‘맑은 산’을 뜻했다. 그리고 옛 궁궐터 아래 저수지를 가리켜 ‘아침못’이 라 불렀다.


동면 감정리를 지나는 잼버리도로(56번 국도)상의 느랏재는 산세가 험하다. 그래서 넘나들기 힘들어 느릿느릿 넘어갈 수밖에 없는 긴 고개라는 뜻에서 ‘느랏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렇다면 노루목저수지라는 이름은 어떻게 해서 지어진 것일까.


우리나라 지명에는 용龍, 범虎, 소牛, 말馬, 노루獐, 기린麒麟 등 짐승 이름이 유난히 많다.

‘노루목’이라는 이름은 바로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뿔이 달리고 영민한 노루가 많이 노니는 길목이라는 뜻이다. 노루목저수지 앞자락에 버티고 있는 장학리獐鶴里는 노루와 학이 함께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노루목저수지는 ‘동면저수지’, ‘홍창섭저수지’ 외에도 ‘후평저수지’, ‘뒤뚜루저수지’, ‘장학저수지’등으로 다양하게 불렸다.


이처럼 좋은 산세山勢와 풍광을 지녔는데 호수까지 생겼으니 철 따라 삽상한 바람이 감도는 노루목저수지에 봄내골 주민들의 반세기가 넘는 아련한 추억이 숱하게 서려 있다.

어릴 적 물장구를 치고 미역을 감으며 물놀이를 즐겼던 곳이요, 소풍을 가거나 사생대회, 야외학습을 갔던 곳이다. 커서는 수변을 산책하거나 아예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며 자연을 즐겼던 자연공원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지금으로 치면 워터파크와 같은 노릇을 했던 셈이다.


또 어족자원이 풍부하고 입질이 잦아 봄철 산란기에는 이 고장뿐만 아니라 전국의 낚시꾼들이 몰려들었다. 조황釣況이 좋아 명당으로 손꼽혔던 시절에는 낮과 밤을 가릴 것 없이 저수지 주변이 온통 낚시꾼으로 들어찼던 추억이 담겨 있다.



동면행정복지센터에서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노루목저수지 개발방향에 대한 토론회를 개최했다.(2019.6.10.)


용도 폐기로 애물단지로 전락


축조 반세기를 지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후평동에 대규모 경공업단지가 들어선 후 시가지가 뒤뚜루 변두리로 뻗어 나갔다. 그만큼 농업용지는 해마다 줄어들었다. 그렇게 많았던 양잠농가와 만군부락의 한우사육 농가도 모두 없어졌다. 일반주택과 함께 각급 학교들이 하나둘씩 둥지를 틀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인근 도로 확충과 함께 대규모 아파트단지까지 앞다퉈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럴 때마다 농사기반 시설의 본래 기능이 점점 위축돼 존치 목적과 기능이 퇴색될 수밖에 없었다.

한림성심대와 강원고 등 각급 학교와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생기고 공공기관의 신설 및 이전도 계속 이루어졌다. 이런 시대적 주변 상황 변화 속에서 노루목저수지의 존재 가치는 옅어져만 갔다.


결국에는 이런 겨룸 속에 ‘기울기 시작한 운동장’이 완전히 폐기되는 쪽으로 결론이 나고 말았다. 여기저기에서 ‘물을 대야 할 논이나 밭이 한 평도 남아있지 않다’는 지적과 함께 ‘존치할 경우 수해와 안전 사고 우려가 크다’는 용도폐지론이 강하게 제기됐다. 장마와 집중호우시 침수와 붕괴 위험이 있는 데다 익사 사고와 악취, 모기 서식, 꽃가루 날림으로 인한 환경 피해 주장이 잇따랐다. 결국 지난 2017년 6월에는 이런 ‘불편한 동거’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용도폐기 조치가 이뤄졌다.


그동안 주변 상황 변화의 추이推移를 예의주시하며 군침을 흘리던 대형건설사와 부동산개발회사들은 ‘이때다’ 싶어 매입에 관심을 보이다 천문학적인 투자금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한 발 물러서는 형국이 빚어졌다.

대신 지역사회의 여론과 자체 개발 검토 후 매각 쪽으로 가닥을 잡은 농어촌공사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춘천시가 카운트 파트너로 나서 적극 협의를 벌이고 있어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상태다.



동면 장학리 노루목저수지 전경(2012.3.)


장학교차로(2019.7)


화려한 개발 방향과 의견 백출


사실상 저수지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려 자체 개발을 검토해 온 농어촌공사는 최근 내부적으로 매각절차를 밟고 춘천시와 구체적인 협의를 벌이고 있다.


여의치 않을 경우 일반 공개 매각에 나설 계획이어서 춘천시는 서둘러 동면을 중심으로 한 지역 주민들의 광범위한 의견 수렴에 나서고 있는 중이다. 여러 차례에 걸친 주민간담회와 토론회에서는 각양각색의 의견이 도출됐다. 우선 ‘매립’과 ‘보존’이라는 문제부터 의견이 분분했다. 이를 절충시켜 개발하자는 주장도 제기됐다.


구체적인 개발 방향으로는 △생태공원 조성 △공기업 유치 △영상산업 유치 △주택단지 조성 △문화지역 육 성 △연구개발 지역 조성 등 갖가지 의견이 백출百出 해 눈길을 끌었다.

쌍방 6차선의 번듯한 도시순환도로가 뚫려 도심과 한 층 가까워졌으나 구체적인 활용계획 추진에 관계기관 간의 온도 차이가 여전한 상황이다.


동상이몽 同床異夢 의 안개 속에 놓여 있는 노루목저수지의 번듯한 미래 모습을 가늠하면서 가까운 구봉산 카페촌과 연계될 자연공원 조성을 그려본다. 황홀한 저 석양 너머에 과연 어떤 모습이 기다리고 있을까 자못 궁금하다.

하루속히 링반데룽(독일어 Ringwanderung, 같은 장소에서 주위를 맴돌며 방황하는 것)을 벗어나 한데 모아진 주민들의 의견과 바람이 실현될 수 있는 날이 오기 바란다.







글 김길소(본지 편집위원·한국전래오락연구소장) / 사진 강원일보

춘천 태생. 1970년 강원일보사에 입사해 편집국에서 강원도 전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취재했다.

편집국장, 논설주간, 상무, 전무이사를 지낸 후 언론중재위원회에서 위원과 부위원장으로 언론사와 피해자의 중재 역할을 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