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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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31

2018.8
#봄내를 품다
춘천의 기념비 20
조선의 임금 숙종·영조·현종의 글씨
임금의 글씨

청풍부원군 김우명 묘역의 숙종 어필비

(서면 안보1리 능골 소재)


예로부터 왕이 직접 지은 글은 보편적으로 어제(御製)라 하고 손수 쓴 글씨는 어필(御筆), 어서(御書)라 했다. 임금의 글을 사용하는 경우 그것이 국왕의 글씨임을 알게 하고자 그 옆에 작은 글씨로 표기를 하였다. 친필글씨를 받을 수 없는 경우에는 왕의 글씨를 책자 등에서 선별하여 필요한 글자를 뽑아다 사용하는데 이를 집자(集字)라 한다.


한학과 서예가 기본이었던 역대 임금들은 모두 붓글씨를 잘 썼다. 어려서부터 서예, 문장수련 등 특별교육을 받기도 했지만 글씨는 남다른 재능이 있어야 했다. 조선의 임금 중 문종 (5대) 성종(9대) 선조(14대) 효종(17대) 숙종(19대) 영조(21대)의 글씨가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그러한 이유로 역대 임금들은 그 시기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서예가이기도 했다.


사람마다 생김새와 성격이 다르듯 글씨 또한 그러하다. 글씨의 주인공이 누구이건 필체에는 무의식적으로 그 사람의 성격과 특징, 기질, 또 학식과 정신적 수준은 물론 품성까지 담겨있다고 한다. 그러하기에 글씨의 크기·모양·간격·기울기·필압 등으로 성격을 분석하는 필적학도 존재하는 것이다.


과연 춘천은 어느 왕, 어느 대통령의 글씨와 인연을 맺었을까? 최고의 위치에 있던 그들의 글씨를 만나본다. 결론적으로 춘천에는 숙종, 영조, 헌종 세분의 임금과 네 분의 대통령 휘호가 확인되고 있다.





먼저 조선 19대 임금인 숙종과의 만남이다. 서면 안보리에 있는 숙종의 외할아버지 충익공 김우명 묘역으로 달려갔다. 감히 풍수지리를 몰라도 좌청룡우백호를 떠올리게 하는 명당임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묘소 앞의 묘비가 바로 숙종의 글씨로 새긴 어필비이다. 숙종은 장인인 김우명이 사망하자 친히 비문을 쓰고 장지와 상여까지 제작해 하사했다. 비석에는 ‘국구청풍부원군(國舅淸風府院 君) 시충익김공지묘(諡忠翼金公之墓) 덕은부부인송씨 부좌(德恩府夫人宋氏祔左)’라고 쓰여 있다. 왕의 장인이자 왕비의 아버지인 충익공 김우명과 부인 송씨가 합장된 묘라는 뜻이다.


현재 묘역은 지방기념물 제20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고, 상여는 국가 중요민속자료 제120호로 국립춘천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비록 묘비 글씨지만 조선 후기 임금 가운데 가장 글씨를 잘 썼다고 평가받을 만했다. 선조 이후 선대왕들이 구사했던 강하고 근엄한 느낌의 서체와는 달리 송설체(松雪體)에 바탕을 둔 유려하고 기품 있는 글씨로 부드러우면서도 당당하여 살아 움직이는 듯 생동감이 넘치는 듯했다.


두 번째는 신북읍 지내리 연못 뒤편 개명골에 있는 풍은부원군 조만영의 묘소이다. 조만영은 조선 24대 헌종의 아버지인 익종의 장인이자 왕비(신정왕후/조대비)의 아버지로 헌종의 외할아버지가 된다. 묘역은 세도가이자 왕실의 외가답게 잘 정돈된 모습을 갖추고 있다.



풍은부원군 조만영 묘역의 현종 어필비와 보호각(신북읍 지내리 개명골 소재)




낙애공 김환에게 내린 영조의 시를 후손이 새긴 비석

(남산면 수동리 나가지 소재)


묘역 입구 신도비 뒤편 보호각에 보존되고 있는 헌종의 어필묘비를 만난다. 검은 돌비석 앞면에는 한자로 ‘朝鮮 領敦寧府事(조선영돈녕부사) 豊恩府院君(풍은부원군) 贈(증) 議政府領議政忠敬趙公萬永之墓(의정부영의정 충경조공만영지묘) 配(배) 贈(증) 德安府夫人恩津宋氏 祔左(덕안부부인은진송씨부좌)’라고 음각되어있고 비석의 뒷면은 헌종의 하교에 의해 동생 인영이 짓고 조카 병기가 쓴 글로 외조부에 대한 헌종의 애틋함이 진득하게 담긴 내용이 새겨져 있다. 23살의 젊은 나이에 붕어(崩御)했지만 헌종은 학문을 좋아해 상당한 문화적 업적을 남겼으며 글씨 또한 우아하고 깨끗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임금이다.


세 번째로 남산면 수동리의 나가지에 있는 조선 21대 영조의 어제시를 찾았다. 자연부락명 나가지는 조선시대에 94세까지 장수했던 낙애(樂厓) 김환(金鍰)이 살던 땅 이라 해서 부르던 낙애지가 나가지(羅加池)로 되었다는 설과 기러기가 떨어진 고개 낙안현(落雁峴) 이름이 변형되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낙애공은 1691년 증광시(增廣試·임시과거) 문과에 급제하였다. 관직은 현감·지사·군수 등을 역임하고, 정2품인 지중추부사에까지 이른 분이다. 영조의 총애가 대단해 호랑이 가죽을 하사받기도 했고 어시를 내리기도 했다. 후손들은 어필각을 짓고 돌에 새겨 보호각 안에 보존하였다. 비석 전면에 영조임금께서 지은 어시가 새겨 져 있다.


我朝三百年來也(아조삼백년래야)

우리 조선조 개국이 3백여 년 되었는데

今卿父子半乎哉(금경부자반호재)

이제 경과 부친의 나이가 절반이나 되었구려

特命陞超有意在(특명승초유의재)

특별히 명을 내리니 뜻이 있다면 관직에 오르시오

耆府宜謝朱門開(기부의사주문개)

나라에서 마땅히 벼슬로 사례하리라



비석의 뒷면에는 낙애공의 이력과 보존하던 어필이 한국전쟁으로 멸실되어 1980년 어제시를 새겨 보호각에 보존한 내역을 적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비각마저 허물어져 버리고 그저 비신만 후손 자택 마당에 방치되듯 보존되고 있을 뿐이었다. 잊히고 사라지는 세월의 뒤편에서 문득 돌아본 한때의 영화는 그저 그런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