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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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31

2018.8
#봄내를 품다
김길소의 그때 그 사건 20
중국민항기 피랍 및 불시착 사건
"국민 여러분! 국민 여러분!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1983년 5월 5일 춘천 캠프페이지에 불시착한 중국민항 B-296기



1983년 5월 5일 어린이날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화창한 날을 맞아 봄내골은 어린이 잔치가 벌어지고 나들이를 즐기는 평온한 모습이었다. 이토록 조용한, 오후 2시께였다. 갑자기 정적을 깨는 요란한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렸다.


라디오와 TV를 틀자 곧바로 “국민 여러분!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는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어서 경보가 발령되고 한가로웠던 ‘아침의 고장’ 봄내골과 전국이 초긴장 상태에 빠져들면서 발칵 뒤집혔다. 첫 소식을 들은 국민들은 “전쟁이 일어났나…?”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첨예한 냉전 상태에서 남북의 잦은 충돌과 미그기 귀순이 있었던 시기였고, 하필 전쟁이 일어난 날이 공휴일이어서 더 그랬다. 6·25전쟁(1950년) 이후 처음으로 중국 민항기가 불쑥 대한민국 영공으로, 그것도 위험을 무릅쓰고 봄내골 미군기지로 불시착한 지 벌써 35년이 지난 아찔한 순간이었다.




옛 캠프페이지에 불시착한 중국민항기 승객들이 창문을 통해 신기한 듯 밖을 내다보고 있다.(1983.5.5)



전 세계 긴장시킨 비행기 피랍사건


사건의 발단은 승객 96명을 태우고 중국 랴오닝성 선양공항을 이륙, 상하이 홍차오공항으로 가려던 중국민항총국 소속 여객기가 하이재킹(hijacking·공중 납치) 당하면서 비롯됐다. 


여객기에 탔던 납치범 9명이 기장에게 권총을 들이대고 대만으로 가자고 협박했다. 그러나 기장은 평양으로 조종간을 돌렸다. 북한은 중국의 혈맹이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이를 눈치챈 납치범들은 총격전을 벌인 끝에 기수를 다시 남쪽으로 돌릴 것을 강요했다.


갑자기 북한 영공에서 날아든 정체불명의 비행체로 급기야 우리 공군에 긴급 출격 명령이 떨어졌다. 공격 모드를 갖추고 발진한 우리 공군조종사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하얀색 영국산 트라이던트(Trident) 여객기에 한자로 ‘中國民航(중국민항)’이 라고 쓴 글씨가 들어왔다. 까딱하면 전투가 벌어질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우리의 영공을 침범한 ‘적기(敵機) 출현’에 따른 공습 경계경보로 발진한 전투기였기 때문이다.


요격태세를 갖춘 전투기를 발견한 민항기는 즉각 날개를 아래위로 흔들었다. 귀순의사를 밝힌 것이다. 이를 공군기지에 보고한 우리 조종사들은 근접비행을 하며 남쪽으로 돌린 기수를 유도, 봄내골에 있었던 미군기지인 캠프페이지(Camp Page, 봄내 2016년 5월호 참조) 비행장으로 길을 터줬다.

커다란 건물 크기만큼 덩치가 큰 민항기가 착륙하기에는 활주로(1,500m)가 턱없이 짧고 규모가 작았다. 이 바람에 중국 민항기는 북쪽 활주로를 50여m나 지나서야 육중한 앞바퀴 2개가 땅 위에 박힌 채 가까스로 불시착할 수 있었다. 위험천만의 아찔 한 착륙이었다.




각 언론사들의 비상 취재반이 열띤 취재경쟁을 벌이고 있는 모습.(1983.5.5)



중국 탑승객, 환대에 감사 연발


민항기가 극적으로 불시착에 성공한 이후에는 즉각 캠프페이지 주변 전역에 이중삼중으로 무장군인을 배치, 철통같이 삼엄한 경비가 이뤄졌다. 상황을 파악하려고 한걸음에 달려온 육군 모군단장까지 통제를 받을 정도였다.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집으로 달려온 시민들로 시내가 온통 벌집 쑤셔놓은 듯 들썩거렸다.


당시 초계중이던 F5전투기가 굉음을 울리고 봄내골 상공을 지나간 후 민항기까지 불시착하자 경보 발령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근화동 철길 뚝방과 캠프페이지 주변에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전 세계는 미국, NATO(북 대서양조약기구), 중국, 러시아가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시기여서 국내와 해외언론들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사태에 관심을 쏟았다.


여객기 문이 열리고 트랩이 설치된 후에는 철저한 보안 속에 한·미 양측의 조사가 이뤄졌다. 바깥 사정이 궁금했던 승객들의 모습이 처음으로 창문에 비쳐 철망 밖에서 망원렌즈로 취재하던 기자들의 카메라에 잡혔다. 신속한 현장수습과 조사를 마치고 밤이 되어서야 탑승객들은 세종호텔 등 시내 호텔에 분산, 수용됐다.


중공 정부 수립과 한국전쟁 참전으로 40여 년간 ‘죽(竹)의 장막’으로 베일에 가려있던 탑승객의 모습은 저마다 초조하고 호기심 어린 눈초리에 인민복과 간편한 옷차림이었다.


경보발령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옛 캠프페이지 끝자락 근화동 철길 뚝방에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1983.5.5)


오랜만에 비친 중국인의 민낯은 당시 항공으로 국내여행을 할 정도이면 상당한 특권층이거나 고위층이었을 터인데도 시민들과 취재진들의 눈에는 무척 검소해 보였다. 식사는 시내 중국 요릿집에 총동원령을 내려 푸짐하게 대접했다. 깔끔한 사건 처리와 편의 제공은 거의 융숭한 환대 수준이었다. 그래서 탑승객들은 한국에 머무는 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연 발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은 국내와 전 세계에서 몰려든 취재진들에 의해 시시콜콜한 것까지 여과 없이 낱낱이 타전됐다. 뉴스에 쏠린 촉각으로 춘천이 전 세계에 알려지고 한국의 브랜드 가치를 한껏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호텔에 투숙한 승객들이 신분증을 잘게 썰어 화장실 변기에 버렸다거나, 중국 최고의 군사기밀을 지닌 미사일 전문가가 탑승하고 있었다는 수수께끼 같은 후일담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얘기이기도 하다.


현장과 취재원 접근이 원천 봉쇄된 가운데 당국의 발표에 의존해 이 사건을 취재했던 필자와 취재 진들은 귀동냥으로 사건의 얼개와 뒷얘기를 그려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밤 7시께가 되어서야 독자들에게 ‘호외’를 돌릴 수 있었다.




중국민항기 납치범 6명은 세종호텔에서 음식대접을 받은 후 사진을 촬영했다. 우측에서 두 번째가 대장격인이고 그 옆이 애인인 고동평이다. (1983.5.6)



사흘 만에 협상…1992년 한중수교로 이어져


외교관계가 전무한 적성국가에서 갑자기 날아와 불시착한 사상 초유의 민항기사건을 두고 5일 오후 5시께 청와대에서 긴급 대책회의가 열렸다. 이때 중국 민항총국장 명의의 전문이 날아왔다. 종전 협정 이후 최초로 “교섭대표단의 특별기 착륙을 허가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정부의 승인을 받은 중국 측은 무려 33명의 대규모 교섭단을 싣고 한걸음에 베이징공항에서 김포공항으로 날아왔다. 사건 이틀 만에 열린 협상에서는 양국의 공식 명칭과 국기 사용 등에 약간의 ‘밀당’이 있었다.


그렇지만 까탈스럽지 않은 우리 측 요구가 거의 일사천리로 받아들여지는 의견 일치를 보았다. 결국 사흘간의 협상 끝에 양측은 사상 최초로 ‘대한민국(The Republic of Korea)’과 ‘중화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China)’이라는 공식 국호가 표기된 최종 합의문을 발표했다.


강원일보 1983년 5월 6일자 기사


피랍승객과 승무원 항공기는 조속히 송환하고 부상자는 치료 후 출국시키기로 했다. 무장납치범들은 한국 법에 따라 처벌키로 합의해 재판을 받고 4~6년 형이 선고됐다. 그러나 1년 복역 후 대만 추방형식으로 망명해 그곳에서 귀순한 ‘망명투사’로 열렬한 환영을 받고 막대한 정착금까지 받았으나 말년이 모두 불운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봄내골을 떠나 5월 16일까지 서울에 머물렀던 중국 탑승객들은 완전 귀국하기 이전까지 우리 정부가 베푼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이때 중국본토 국민들과 탑승객들이 협상 과정에서 놀란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중국의 어느 대도시보다 화려하고 발전된 서울과 대한민국의 모습에 “한성(서울)은 전깃불이 안 들어오고 거지들이 우글거린다”는 인식을 불식시킬 수 있었다.


또 적성국가이었음에도 어디를 가든 환한 미소를 띠고 극진히 환대하는 우리 국민들을 보고 놀라움과 감사함을 표시하는 화해무드가 한때 봇물을 이뤘다. 훗날 이러한 분위기는 앞으로 티격태격 싸우고 적대시할 것이 아니라 다정한 이웃으로 사이좋게 지내자는 진의로 전해졌다. 그리고 한중관계는 물론 세계 정치 지형에 엄청나고 어마어마한 변화를 가져오게 만드는 단초가 되었다.


한중수교(1992년)가 이뤄진 후 두 나라의 경제교류가 급속도로 늘어났다. 교역의존도가 한국에 중국이 세계 1위이고 중국에 한국이 세계 3위일 정도로 크게 확대되고 국민들이 서로 자기 나라 드나들 듯 친밀해졌다. 그러나 지금은 사드 배치 문제 이후 한국을 뜨악하게 보는 시선(항장무검(項莊舞劍)의 관계:칼춤을 추는 의도는 유방을 죽이려는 데 있다는 뜻) 등에 가로막혀 시련을 겪고 있다.



봉의산 아래 세종호텔에서 1박한 중국민항기 승무원들이 서울로 출발하기 위해 호텔계 단을 내려오고 있다.(1983.5.6.)

환송객에게 감사인사를 보내는 중국민항총국장 (1983.5.10.)



캠프페이지에 불시 착한 중국민항기의 안전 이륙과 주민대피를 위해 춘천시청에 마련된 상황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근화동 일대 주민들을 위해 소개령을 내렸다. (1983.5.14.)



민항기박물관 건립의견 제기


봄내골 미군기지에 불시착한 민항기는 협상 타결 즉시 김포공항으로 옮겨졌다. 이륙하는 데 활주로가 너무 짧아 무게를 줄일 수 있는 장비를 모두 뜯어내 육로로 날랐다. 항공유도 김포공항까지 비행할 수 있을 만큼만 넣었다.


그리고 사건 발생 열흘만인 15일 오전 7시 30분, 만일의 사태를 우려해 이륙하는 방향의 근화동 일대 주민들을 긴급 반상회까지 열어 사전에 모두 소개(疏開, 대피)시킨 뒤 간신히 띄워 보냈다. 주민들의 관심과 시선이 모두 미군 기지 이륙현장에 쏠렸던 날이었다.


전 세계의 관심과 긴장 속에 피랍·불시착사건이 전광석화처럼 빠르고 깔끔하게 수습되고 여객기마저 고막이 찢어질 듯한 굉음을 남기고 훌쩍 날아가 버리자 역사의 현장을 지켜봤던 주민들에게는 안도와 보람과 아쉬움이 함께 교차했다. 그래서 미군기지 반환과 개발 일정에 맞춰 ‘중국민항기 불시착 박물관’을 만들자는 구상이 여기저기서 제기되었다. 하지만 가물가물 잊혀지고 있는 망각 속에 아직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피랍 중국민항기

영국 호커 시들리사가 개발한 중형 트라이던트(Trident) 삼발이 여객기이다. 1960년대 초반 미국 보잉 727과 경쟁에 나섰으나 낮은 인지도와 엔진 문제로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다. 미국과 소련제 Tu 154 삼발이 여객기에도 뒤져 117대만 만든 후 단종 됐다.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난 트라이던트기는 영국에 아직 몇 대가 남아있는 것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