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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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30

2018.7
#봄내를 품다
노재현의 한소끔
볼펜과 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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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장희(82·수원대 브레인바이오센터장) 박사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뇌 과학자다. 양전자방출 단층촬영(PET) 기기를 세계 최초로 개발한 분이기도 하다. 그는 서울대 전자공학과 석사과정을 마치고 1962년 스웨덴 웁살라 대학으로 유학갔다. 조 박사의 회고록을 보면 당시 아프리카 가나 수준이던 대한민국 청년이 선진국 스웨덴에서 받은 충격이 생생하다.


엘리베이터, 커피 자판기, 더운 물이 나오는 샤워기… 사람 동작을 감지해 자동으로 불이 켜지는 복도 전등에도 깜짝깜짝 놀랐다. 1960년 한국의 1인당 명목 GDP는 155달러였다. 스웨덴까지 가는 비행기 삯이 550달러였는데, 이런 ‘거액’을 들여 해외로 가려면 국무총리의 출국 결재를 받아야 했다. 조 박사는 대학 강의실에서도 놀라움과 부러움을 금치 못했다. 강의실마다 볼펜 등 필기구가 비치돼 있어 학생들이 공짜로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짐작컨대 80대까지는 아니어도 50대 이상 나이라면 조 박사가 받았을 충격을 어느 정도 헤아릴 것이다. 나는 요즘도 은행이나 식당에 고객 서비스용으로 비치돼 있는 알사탕에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낀다. 저걸 공짜로 가져가도 되나 하는 저어함이다. 어린 시절 동네 가게의 나무판 칸막이, 유리 덮개 진열장 아래 수북한 알사탕을 선망하던 눈빛 이 반세기를 훌쩍 건너 되살아나곤 하는 것이다.


볼펜과 알사탕뿐이랴. 나는 비 오는 날 현관에서 어느 우산을 쓸지 매번 망설인다. 우산이 많아서다. 자그마한 삼단 우산, 이단 우산, 튼튼한 장우산, 예쁜 비닐우산…. 옛날엔 파란 비닐 대나무살 우산이 대부분 이었다. 검정 천에 쇠살을 넣은 박쥐우산을 쓰면 절로 으쓱했다. 그 많던 우산 수리공들, 지금은 다 사라졌다.


2021년까지 플라스틱 빨대와 스틱, 일회용 접시·포크·나이프 사용을 금지하겠다는 유럽연합(EU)의 발표를 접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소비만능, 편리한 일상생활 도구로 각광받던 물건들이 이제 천덕꾸러기다. 전국이 시끄러웠던 비닐제품 수거 대란을 떠올려 보라. 지금 노년 세대는 비닐봉지들을 차곡차곡 접어 보관하다 물건 담을 일 생길 때마다 요긴하게 재활용했다. ‘버리기 위해 난리치는’ 상황이 낯설 수밖에 없다.


일종의 정신질환인 ‘저장 강박증’ 이란 게 있다. 나의 친척 어른 한 분은 치매가 찾아온 뒤 마실 나갈 때마다 비닐봉지, 유리병, 페트병, 철사, 고무줄 같은 것을 잔뜩 챙겨 오셔서 가족이 골머리를 앓았다. 폐품이 방에 잔뜩 쌓이면 어르신이 외출하신 틈을 타 온 식구가 나서서 쓰레기장에 버리곤 했다. 이 이야기를 친구에게 했더니 자기 모친도 돌아가시기 전 몇 년간 그런 행동을 하셨단다. 모든 것이 턱없이 부족했던 시절을 살아오시느라 몸에 밴 근검·절약, 아끼는 습관이 강박증으로 도진 것이라 생각하니 처연하고 안타깝다. 그 세대 덕분에 우리가 이만큼 먹고 살게 됐는데, 지금 우리는 너무 많이 쓰고 너무 많이 버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