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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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30

2018.7
#봄내를 즐기다
독자에세이
민족의 아픔 6·25 잊지 않기를, 심상봉(76)씨 사연
민족의 아픔 6・25 잊지 않기를


“언니 언니 어디를 가?”

“요 아래까지”

“그래?”

“응!”


낯선 여자 아이가 누나 곁에 와서 말을 건다. 우리 오빠는 국군인데 지금은 어디 있는지도 몰라 한숨을 쉬며 누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그래? 우리 오빠두 경찰인데 나도 소식을 몰라 걱정이야.”

“그렇구나.”


그날 저녁이다. 느닷없이 인민군 한 명이 따발총을 아버지에게 들이대며 따라오라고 한다.

인민군은 총을 들이대며 “동무 아들이 경찰이라는데 지금 어디 있나?”

아버지는 “나는 모른다. 우리 아들은 경찰이 아니다” 라고 했지만 인민군은 다 알고 왔으니까 어디다 숨겨 놓았는지 찾아 놓으라는 거다. 갑자기 인민군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내일 다시 오겠으니 안 찾아 놓으면 각오하라는 것이다. 내 나이 9살 때 얘기다.


아버지와 우리 식구는 그날 저녁 정신없이 짐보따리를 챙겨 정든 온의동을 뒤로하고 광판리로 피난을 갔다. 가는 도중 어둠 속에서 인민군들이 피난민들에게 손바닥 검사를 하겠으니 줄을 서라고 한다. 손바닥을 보고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아버지는 손을 논바닥에다 피가 나도록 문지르고 천으로 손을 감싸서 겨우 통과를 했다.


얼마 후에 국군이 마을로 들어오면서 우리는 다시 온의동으로 돌아왔다. 사실 이곳도 낙원동에서 피난을 온 곳이다. 그 뒤에 집 앞으로 미군 포부대가 들어오면서부터 포 쏘는 소리에 귀가 따가웠고 앞산에서는 포탄이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소리만 들어도 포탄이 어디에 떨어졌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나 많은 날이 지났을까. 갑자기 포부대가 철수를 하면서 얼마 후 중공군이 마차와 함께 꽹과리를 치면서 들이닥쳤다.


온 집안 식구가 당황하고 있는데 중공군이 집으로 들어와서 그들과 함께 나가셨다.

두어 시간이 지났을까 아버지는 숨을 헐떡거리시며 집으로 돌아오셨다. 얼마나 안도의 숨을 쉬었는지 지금 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떨린다.


그때 동네에 조심스러운 말이 돌았다. 밤중에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을 엿들었는데 동네에 있는 방공호에 미군병사 5, 6명이 후퇴를 못 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미군들을 숨겨주었다. 얼굴을 씻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감자와 잡곡으로 끼니를 때우게 하면서 국군이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린 지 수십 일, 드디어 우리 국군이 동네에 입성하면서 동네는 축제로 난리가 났다.


미군 병사가 무사히 군 복귀를 하고 얼마 후 미군트럭 한 대가 짐을 한가득 싣고 동네를 방문했는데 동네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뜻으로 선물을 보내온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C-RATION(C형 전투식량)이다. 그때 내 인생에서 초콜릿을 가장 많이 먹었던 것 같다.


지금은 그 미군 병사들이 살고 있는지, 살면 어디서 사는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어린 시절 겪은 6·25의 참상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신채호 선생님은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게는 미래는 없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북미정상회담으로 평화의 기운이 퍼지고 있지만 역사의 비극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또다시 같은 아픔을 겪지 않는 우리의 자세가 아닐까 싶다.



*이 글은 필자가 9살 때 겪은 6·25 전쟁 실화로 1950년 9·28 서울 수복부터 1951년 1·4 후퇴까지의 사건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