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얘깃거리도 없는 사람 얘기를 듣는다고 그래요.”
소양로에서 1976년도부터 자전거포를 해오고 있는 양대운(78) 사장의 첫마디. 40여 년간 소양로의 변화 과정을 직접 봐 왔을 그의 퉁명스러움이 외려 기대로 다가온다.
“양구에서 태어나 18살 때 자전거포에 들어가 일을 시작했어요. 몇 년 후 가게 주인이 춘천으로 나오고 나도 군대 갔다가 오니까 할 줄 아는 게 자전거뿐이었고 또 마침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춘천으로 왔지요. 69년도부터 혼자 가게를 시작했고 지금 자리로는 76년도에 옮겨왔어요.
그때는 자전거를 고쳐가며 쓰던 시절이었고, 질이 좋지 않아 망가지기도 많이 망가졌지요. 자전거 수리로만 한창 때는 5만원까지도 벌어봤고, 연말에는 2만원도 벌었으니 잘 됐죠. 그때는 처음 발령받은 공무원이 월급을 3,500원 인가 받았다고 해요. 아침 8시 전에 나와서 밤 10시, 11시까지 일했으니 오래 일하기도 했지만.”
많은 사람 북적이던 60~70년대 소양로
1960~1970년대 자전거는 요즘으로 치면 짐을 실어 나르고 장사를 할 수 있는 화물차였다. 교사나 의사 같은 몇몇 사람만이 교통수단으로 이용했을 뿐이었다.
“자전거를 사면 기록을 해야 했어요. 경찰들이 다 기록했죠. 누가 얼마에 사고 누가 가지고 있는지. 문제라도 생기면 경찰이 확인해야 하니까요. 기록하는 게 없어진 건 아마 80년도쯤일 거예요.”
양 사장이 기억하는 60년대 소양로에는 자전거포도 7개나 있었고, 정육점, 옷가게, 대포집 등이 즐비한 시장 통이었다. 캠프페이지의 미군들과 그들과 관련된 사람들, 그리고 서면 사람들이 주 소비층이었다.
“미군부대 없어지고 도로가 새로 생기면서 서면 사람들도 이쪽으로 안 오기 시작했어요, 아파트가 많아지면서부터는 이 동네 빈집도 많아졌죠. 그러니 자연히 소양로 경기가 나빠질 수밖에요.”
2005년 한 해에만 254대의 자전거를 팔기도 했지만 같은 해 캠프페이지가 폐쇄되고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면서부터는 더 이상 기록을 하지 않았다.
“1980년대 마이카 시대가 오면서 조금씩 안 되더라고요. 운동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지만 자전거 고장이 별로 없으니 일거리가 많이 줄었죠.”
홀로 남은 가게… 이제 곧 문닫아야
가게 안을 천천히 둘러보니 오래된 가구며 자전거를 고치는 도구들이 눈에 들어온다. ‘어떻게 하면 일을 하면서 편하게 할까를 고심’하면서 직접 용접하고 만든 것이란다. 작업의자에도 수리에 필요한 도구를 넣을 수 있게 서랍이 만들어져 있다. 집안 살림도 큰 고장이 아니고서는 대부분 직접 수리한다고 한다.
가게 구석으로 커다란 바퀴 위에 자전거가 놓여 있어 용도가 궁금했다. 두발로 달리는 것이 아닌 머신 위에서 자전거를 타는 일명 ‘자전거 러닝머신’이란다. 중심 잡기도 힘들 것 같지만 하루 1시간 이상씩 달린다고 하는 그는 사실 산악자전거부터 생활 체육자전거 대회에서 상을 휩쓴 실력자다. 지금은 ‘자전거 러닝머신을 타거나 일과 후 강아지 산책’으로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일곱 개나 있던 소양로 자전거포가 다 없어지고 89년 도부터는 나 혼자 하고 있어요. 내년이면 동네에서 혼자 한지 햇수로 30년짼데 오래됐죠. 무슨 기업이고 혼자 독점한다는 건 경기가 좋지 않으니까 라이벌이 안 생긴다 는 겁니다.”
오랜 터줏대감으로 소양로를 지켜온 양 사장은 ‘소양로 길이 넓어지면 장사를 접을’거라고 한다. 사람들의 발길로 닳았을 가게 문턱이 사람만큼 나이가 들면서 낡아 가고 그들의 이야기는 기억 속에 머물다 점차 사라지고 있는 듯해 아쉽기만 하다. 사람들의 오랜 이야기가 묻히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