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검색 닫기

VOL.330

2018.7
#봄내를 품다
춘천의 기념비 19
사북면 원평리 원당기녑비
호수에 숨은 여울 그리고 연못 하나

이번 호는 5호선 국도를 타고 춘천호 안쪽 깊숙이 숨어 있는 원당(圓塘) 기념비를 찾았다. 소양2교를 건너 회귀본능을 따르는 연어처럼 북한강 물길을 거슬러 오른다. 한적한 국도의 여유로움을 맛보며 춘천댐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너른 춘천호가 함께 가자며 동행한다. 호수변을 따라 굽이굽이 휘어진 길을 돌고 돌다 오월리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뭇 산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호수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 한 폭의 풍경화다. 산과 호수를 초록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싱그러움과 아름다움에 절로 탄성이 나온다.


사북면 원평리에 위치한 원당기념비(원평길 403) 



호수를 벗어나려는 지점에서 저만치 왼쪽 전면에 산 하나가 가로막는다. 지금은 밑으로 터널이 있지만 예전에는 고개를 넘어야 했는데 바로 말고개(馬峴)다. 터널 앞 삼거리 지점 왼쪽 도로변에 ‘여기가 38˚선 입니다’라는 큰 글씨의 조형물이 먼저 눈에 띈다. 한국전쟁 때는 잠시 이북 땅이기도 했었던 수복(收復)지역. 휴전된 지 벌써 70여년이 되어 가지만 아직도 38선은 우리 가슴속에서 분단과 철조망의 이미지로 자리하고 있다.


38선 조형물을 바라보며 삼거리를 지나기 전 우회전하여 작은 다리를 건너면 좁은 마을 길이 이어진다. 길은 다시 왼쪽에 산을 두고 오른쪽은 춘천호와 벗하며 한참 동안 호젓한 2차선 길을 따라 작은 능선을 휘돌아 넘는다.


예전에는 원당리와 마평리로 마을이 구분되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 시 통합되어 원평리가 되었다. 마을 주민들은 1965년 춘천댐 건설로 집과 문전옥답이 모두 호수에 잠겼지만 조상들이 대대로 터 잡고 살던 곳이라 떠나지 못한 채 산기슭의 비탈진 땅을 일구며 지켜 왔다. 전기를 만들기 위해 건설된 댐이 가까이 있었지만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 때문인지 전기조차 허락하지 않던 오지마을이었다.



연못과 원당기념비  



굽이진 마을길을 한참 가다 보면 오른쪽 도로변에 생뚱맞게 서 있는 조형물이 보인다. 바로 원당기념비이다. 둥근 화강암에 한문으로 원당(圓塘)이라고 크게 새긴 기념비 아래에는 그 유래를 나열하였고 기념비 뒤편에 둥근 형태의 작은 못이 하나 있다.


이 못에 대한 실마리를 풀기 위해서는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돌아가야 한다. 원당은 조선시대 문인으로 화천의 곡운서원에 배향된 성규헌(成揆憲·1647~1741)으로부터 비롯된다. 숙종 15년(1689)에 일어난 기사환국으로 파직당한 후 북한강가의 풍광에 매료되어 이곳에 터를 잡았다.


마을 앞의 여울을 명탄이라 불렀는데 성규헌은 이 이름을 따 스스로 호를 명탄(明灘)이라 짓고 집 부근에 둥근 못을 만들었다. 그 못의 이름이 원당이었고 이후 이곳을 원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도로가 개설되고 낚시터로 유명세를 타면서 호수변에 주택들이 들어서 고급스러운 전원마을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북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지곡산 7부 능선에 명탄 성규헌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그가 사랑했던 이곳의 풍광과 여울 그리고 집터와 원당은 모두 물에 잠겨 가뭇없이 사라졌다. 호수에 잠긴 못(圓塘)과 여울 그리고 성규헌을 회억(回憶)하고자 그의 후손들과 주민들이 2007년도에 둥근 못을 만들고 조형물을 세운 것이 바로 원당 기념비이다.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호수 건너편의 금병산은 한쪽 발을 물에 담근 채 여름을 즐기고 있었다.


개인주의가 팽배한 시대, 잊혀가는 이름을 떠올려 소식을 전해보자. 안부를 묻다 보면 분명 관심을 갖고 내 안부를 물 어오는 사람도 늘어나리라.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해 준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행복한 일인지 비석 앞에서 자문자 답해 본다.



지곡산 7부 능선에 위치한 명탄 성규헌 선생 묘소


고갯마루에서 본 물에 잠긴 원평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