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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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30

2018.7
#봄내를 품다
김길소의 그때 그 사건 19
후평일반산업단지(후평공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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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반세기 동안 많은 사회 변화가 이뤄진 격랑의 시기에 조용한 ‘봄의 고장’ 춘천에서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김길소의 그때 그 사건>은 1970년부터 40여 년간 토박이 언론인으로 이 고장에서 일어난 사건과 변화를 지켜본 필자가 그 당시의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고 숨은 일화와 뒷이야기들을 전하는 코너입니다. <편집자 주>



봄내골 산업화의 꽃망울



봄내골의 진산(鎭山)인 봉의산 너머에 있는 ‘뒤뚜루(현 후평동)’는 1960년대 후반까지 대부분 농경지였다. 야트막한 구릉지가 많아 과수원과 논밭으로 이뤄진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이런 곳에 어느 날 갑자기 대규모 경공업단지가 세워진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정부에서 펼치기 시작한 공업입국(工業立國)의 국가시책에 따라 강원도 중심도시에 산업화의 꽃을 피워 나가겠다는 의지의 표출이었다. 그리고 소양강댐과 춘천댐, 의암댐 건설로 인한 수몰지역과 인근 지역 주민들의 일자리 마련과 소득 증대를 위한 목적이 담겨 있었다.

건설부가 발표한 이 소식(1968년 8월)은 당시로서는 공장 불모지인 봄내골에 충격적인 낭보가 아닐 수 없었다.



1968년 여름, 뒤뚜루 농경지에 대단위 경공업단지가 들어선다는 건설부의 발표는 당시로서는 다소 충격적인 낭보였다. 사진은 1984년의 후평공단 전경 모습




후평공단 AMK 공장에서 컴퓨터 헤드 부품을 조립하고 있는 여성근로자들(1989)



‘소비도시’를 ‘생산도시’로 전환 시도


중앙정부 발표와 함께 공업단지 조성이 초스피드로 추진됐다. 부지 매입 즉시 착공이 이뤄지고 입주할 공장과 기업체 유치에 나섰다. 단지 조성 마무리 단계에 일찌감치 한국앙고라실크와 영일식품 등 굵직한 8개 업체의 입주 신청을 받았다.


정부 보조와 융자금 등 총공사비 3억 4,000만원 (국고 1억 6,000만원, 도비 1억 5,000만원, 시비 1,300만원 등)을 들여 1969년 12월 총면적 49만 3,645㎡에 공장용지 47만 6,725㎡를 완공하기에 앞서 희망업체 가운데 옥석을 가려냈다.


많은 신청업체 가운데 △한국앙고라실크 △영일 식품 △한국하이프로 식품공업 △동아경공업 △대 관령산업 △명성식품 △한국관광물산 △강원곡산 △춘천연유 △한남공사 △춘천금속 △춘천염직 △ 임영성냥 △삼양식품공업 등 14개 업체의 입주를 처음으로 허가했다.


후평공단 1호로 입주한 한국앙고라 실크 공장의 전경 모습이다. 견면사를 생산하는 한국앙고라 실크는 당시 연간 7억여 원의 외화를 벌어들였다.(1979)



이들 업체는 이듬해인 1970년 말까지 총 13억 1,500만원을 들여 완전한 생산시설을 갖추고 유휴 노동력을 무려 5,000명 고용할 다부진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촘촘하게 짜놓은 얼개가 입주와 가동이 시작되는 초기 단계부터 여기저기에서 삐걱거렸다.


부지분양대금을 상환하지 못하거나 자기 자금 투자능력이 턱없이 모자라 정부 융자에 기대려 했다. 더구나 시장 파악 미흡과 재무구조 취약으로 예상과 달리 가동률이 제 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뚝 떨어졌다.


‘소비도시’를 ‘생산도시’로 모습을 일신시켜 나가겠다는 강한 의지와 다르게 뛰어넘어야 할 현실의 벽도 너무 높게 가로막았다. 감세(減稅)와 융자(融資) 등 특혜에 군침을 흘려 의욕만 앞섰던 기업들이 입주를 포기하고 초기에 멀쩡하게 잘 돌아가던 기업들 가운데서도 도산하는 업체가 속출했다.


한껏 부풀었던 기대가 쪼그라드는 과정이었다. 향토 출신 인기 소설가인 한수산이 1978년 발표한 소설 ‘안개시정거리’에는 봄내골에서 공단을 부둥켜 안고 개발연대를 살아온 우리의 초상이 그대로 담겨 있기도 하다.





‘규제의 사슬’로 한계 드러낸 활성화

공단 내 기업인 한국라텍스는 중소기업협동 조합을 통해 춘천에서 처음으로 외국인 근로자인 중국 교포 12명을 취업시켰다. 사진은 작업을 배우고 있는 중국 교포들(1994.8)



태생적으로 한계를 지닌 춘천 후평일반산업단지(이하 후평공단) 활성화의 걸림돌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나름대로 선별기준을 거쳤다고 하지만 입주업체 대부분이 영세해 만성적인 원자재 수급과 자금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제품생산과 수송, 판로 개척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정부에서 제시한 제조업과 공업 등에 한정된 입주 제한도 발목을 잡았다.


여기에다 봄내골 성장을 더디게 만들었던 각종 규제의 사슬은 산업단지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수도권 상수원보호구역에 위치한 점이 앞을 가로막았다. 툭하면 터지는 공장폐수와 수은오염 등 후진 국형 공해 문제도 골칫거리였다.


이럴 때마다 검· 경 등 사직 당국의 조사를 받거나 엄격한 규제를 받아야 했다. 이런 제약을 견디다 못해 타지로 옮기는 업체도 생겨났다. 당시 국내 라면시장을 석권하던 삼양 식품 등 몇 개 업체가 타지로 공장을 옮기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입주한 업체가 가동을 멈추고 문을 닫거나 폐업을 선언해도 후속 대책을 세우기가 어려웠다. 공단 조성 10여 년간 30여개 업체가 연쇄 도산했지만 청정산업 유치 고집으로 배턴 터치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제조업 중심의 산업 구조가 쇠퇴하면서 극심한 침체기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후평공단에서 야간 작업을 하고 있는 여성 근로자들 (1988.9)



장기간 이어진 불황과 시가지 팽창으로 공단이 어느새 도시 한가운데 놓이게 되면서부터는 급기야 ‘공단무용론’까지 대두됐다. 국가 정책에 따른 시혜와 관심의 뒷전에 밀려나 잡초만 무성해진 금싸라기 땅을 언제까지 방치할 것이냐는 논리였다. 그래서 잠시나마 부동산 투자가들 사이에 현실과 제도적으로는 거의 회생 불가능한 공단 부지를 매입해 폐쇄된 다음 되팔면 시세차익을 볼 수 있다는 실현 불가능한 엉뚱한 (?) 입소문까지 번졌다.


이 와중에 춘천시의회 조선모 전 산업위원장(1994년 당시) 등 지역의 원로들이 입주업체 애로사항 해결과 공단 활성화에 발 벗고 나섰다. 가장 큰 장벽이었던 제조업에 한정된 입주 제한과 과잉규제를 중앙관계요로에 건의해 완화시키고 도산업체와 입주희망업체를 연결시켜 가동률을 높이는데 앞장섰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자신이 경영하던 업체를 공단으로 이전하고 지난 2001년 이후 현재까지 20년 가까이 후평단 운영협의회장직을 도맡아 ‘공단지킴이’로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산업현장서 숱한 유망기업 명멸


오랜 세월 험한 산고(産苦)와 우여곡절을 겪어 오는 동안 후평공단에 ‘분양률 100% 달성’의 뿌리를 내리 기까지는 숱한 유망기업들이 명멸했다.

공단 개설 초기 봄내골 산업화의 불씨를 지핀 대표적인 업체로는 준공과 함께 가동한 △한국앙고라실크 △영일식품 △춘천주물 △한국라텍스 △삼양식품공업 등이었다.


이 중 한국앙고라실크는 여직원 9명을 선발, 일본에 파견해 일본어와 생산기술을 습득시켜 지역에서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었다. 숙련된 후에는 여공 800명을 고용하고 방적기를 대폭 확충, 1,500명을 고용할 다부진 계획을 추진했었다. 그러나 자금난으로 몇 년 후 문을 닫고 말았다.

고성능 자동제빵기를 설치, 여공 320여 명이 군납용 건빵을 주로 생산하던 한일 합작회사인 영일식품도 가동 5년 만에 일본의 자금줄이 끊겨 가동을 중단했다.


고향의 발전을 위해 세계 최고의 컴퓨터 부품 회사인 한국아프라이드 매그네틱스(AMK) 공장을 유치했던 춘천 출신 한명수(작고) 한이남(현재 캐나다 거주) 형제의 미거(美擧)는 지금까지도 지역에 안겨준 고용과 부가가치로 경제적 효과가 가장 컸던 공장으로 꼽히고 있다.


모회사가 전 세계 컴퓨터 부품시장의 68%를 점유했던 이 회사는 1987년 입주해 1,000여 명의 직원이 좋은 복지시설을 갖춘 공장에서 일해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었다. 세월이 지나면서는 자금과 임금의 압박에 밀려 이 회사도 6년여 만에 결국 타국으로 이전하고 말았다.

독립문표 메리야스 등 의류를 연간 수십억 원어치씩 만들었던 평안섬유도 입주 9년 만인 1982년 경영난으로 갑자기 문을 닫아 460명의 종업원이 한꺼번에 실직, 지역에 충격을 안겨줬다.


시대의 흐름이 순탄하지 못하자 입주조건을 완화해 ‘굴뚝형 제조업’에서 벗어나 산업 성장의 원동력이 될 기술 인력 양성을 위해 춘천기계공고 등 공업계 학교 유치에 나서기도 했다. 교훈이 ‘참된 기술인’인 춘천기계공고는 지금도 21세기를 짊어질 기능인재 양성에 주력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도시가스공사 등이 입주한 후에는 현재까지 89개 업체가 입주해 분양률 100%를 이룬 가운데 고용인원 835명이 일하는 터전이 되었다.

뒤늦게 1990년에 조성된 퇴계농공단지를 비롯한 농공단지 및 산업단지와 함께 ‘봄내골 산업화’의 꽃을 피워 나가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난제가 앞에 놓여 있다.





기반시설 확충, 공단활성화 꿈틀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

침체기를 어렵게 극복한 후평공단이 최근 들어 잇따른 교통 인프라 개선 효과로 새롭게 각광을 받으면서 활성화를 재촉하고 있는 중이다. 이에 따라 시는 도심 지역화된 공업단지의 모습을 새롭게 가꿀 계획을 서두르고 있다.


춘천시 기업과장은 “후평공단 도로가 협소하고 주차장과 공원이 부족해 288억 원의 예산을 들여 기반시설을 대폭 확충, 변화에 대응해 나갈 계획” 이라고 밝혔다. 후평공단의 조선모 운영협의회장은 “새롭게 꿈틀거리고 있는 공단 활성화를 위해 입주업체들과 머리를 맞대고 보다 과감하게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고민하고 개선해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봄내골 산업화의 허브(중심)로 가꾸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바야흐로 세계는 지금 정보통신기술(ICT)이 이룬 3차 산업혁명을 넘어 서서 첨단 통신기술이 경제 산업 전반에 융합되어 혁신적인 발전을 이뤄 나가는 4차 산업혁명의 혁명을 눈앞에 두고 있다. 모든 생산 과정의 최적화가 산업화로 치닫고 있는 이 시대에 개발과 침체 속에 성장을 거듭해 온 후평공단은 반백년 역사 속에서도 새 패러다임 마련과 실현의 필요성이 여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