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친구 따라 강남 갔다가 인생이 바뀐 사람들 얘기를 종종 듣는다. 극단 무소의 뿔 대표이자 연출가인 정은경(44) 씨도 그렇다.
“친구 손에 이끌려 혼성이라는 극단에 구경 갔어요. 배우들의 대사 한마디, 눈빛 하나에 완전히 매료돼 그 자리서 단원으로 등록했죠. 내 나이 20대 초반이었어요.”
그날부터 퇴근만 하면 달려가 연극 연습에 매달렸지만 타는 갈증을 풀 수 없었다. 잘 다니던 은행에 사표를 내던지고 영국 유학을 떠난 게 스물일곱. 3년 동안 갖은 고생을 하며 공부 한 피지컬씨어터(physical theater)는 그녀의 연극인생에 큰 자양분이 됐다.
“피지컬씨어터는 말보다 신체와 오브제를 이용한 동작연극이에요. 댄스나 무언극 등을 가리키지요.”
연어가 물살을 거슬러 고향을 찾듯, 춘천으로 돌아온 정 대표는 지역 극단에 소속돼 미친 듯이 연극에 몰두했다. 그즈음 역시 연극에 빠져 살던 연출가 김정훈(현 통통창의력발전소 대표) 씨를 만나 결혼을 해 아이도 태어났다. 낳은 지 한 달도 안 된 딸을 안고 연습실에 나갔다. 설거지하면서도 대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한없이 힘든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든든한 지원군이자 천생배필인 남편 덕분이었다.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한 길을 가던 부부는 서로를 보듬고 채찍질하며 작업에 몰입했다. 2008년, 드디어 일을 냈다. 그녀만의 언어로 재구성 연출한 프랑스 희곡작가 쟝쥬네의 작품 ‘하녀들’ 이 체코 어프스트로프(Apstrof)국제연극제에 초청돼 한국인 최초로 최고작품상을 수상한 것.
이 작품은 2009년 부산국제연극제, 2010년 세계국립극장 페스티벌, 서울연극올림픽 등 국제무대에 잇달아 초청돼 작품성을 널리 인정받았다. 이어 연출한 ‘의자들’ 또한 호응이 높아 헝가리, 인도네시아 극단들과 손잡고 공동 기획, 연출, 공연하는 등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을 보냈다. 독립적으로 극단 「무소의 뿔」을 창단 한 건 2014년. 남이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연극, 내가 하고 싶은 연극을 마음껏 해보고 싶어서였다.
“원시불교 경전에 나오는 시구(詩句)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에서 따온 거예요. 힘들고 외롭더라도 꿋꿋하게 내 길을 가고 싶어서요.”
창단 이듬해인 2015년 무대에 올린 ‘리투아니아_in mirage’는 말을 줄이고 배우들의 움직임과 무대가 뿜어내는 분위기, 음악들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그만의 색깔로 큰 울림을 주었다. 6월 15일(금) 오후 7시 30분 KT&G 상상마당 사운드홀에서 선보이는 작품 ‘보이체크’가 기대되는 이유다.
“요절한 희곡작가 게오르크 뷔히너(독일)의 미완성 유작을 재구성 각색해 음악이 있는 이미지 극으로 만들었습니다. 이탈리아 성악가들의 노래, 대구 그랜드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우리나라 최초의 반도네오니스트 레오 정의 연주, 여섯 명의 배우가 쏟아내는 절제된 대사와 움직임이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종합예술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