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눈부시다. 이번 달에는 남면 가정리 마을 입구를 지키고 있는 비석을 찾아 떠난다. 산모롱이마다 생강나무 노란 꽃과 벚꽃, 진달래가 만개한 아름다운 시골길의 정경이 못내 아름답다.
403번 지방 도를 따라 강촌과 구곡폭포를 지나 소주고개를 넘고 굽이진 길을 돌고 돌아 내려가자 만나는 맑게 흐르는 홍천강. 이 물줄기가 시·군 경계를 가르니 강을 건너면 홍천군 서면 마곡리요, 건너지 않고 오른편으로 돌아 들어가면 오늘의 목적지인 남면 가정리이다.
작은 빗돌에 적힌 ‘고흥류씨분산동구’
강변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제법 너른 골짜기 사이에 다소곳하게 터 잡은 가정리. 이 마을 입구에 위치한 강원학생교육원 정문 왼쪽 산기슭에서 비석 하나가 고개를 삐죽이 내밀고 길손을 반긴다. 빗돌에는 고흥류씨분산동구(高興柳氏墳山洞口)라고 한자 8자(字)가 새겨져 있다.
높이라야 불과 1m 정도이고 전면 이외 3면에는 아무런 글자가 없다. 누가, 언제 세웠는지 기록도 없이 방치된 듯 무심하게 서 있다. 글씨체도 비석에 많이 쓰는 해서체가 아닌 전서와 예서 중간서체로 불리는 팔분체(八分體·후한시대 널리 쓰이던 실용서체)이다.
소박한 빗돌의 모습과 서체 특유의 투박한 획이 고졸하고 중후한 맛을 풍기며 잔잔한 여운과 신성한 기운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마을 입구를 알리는 비석이라면 그저 동구비(洞口碑)라고 하면 될 텐데 비문에 ‘묘를 쓴 산’임을 알리는 분산(墳山)이란 글자를 넣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가정리 마을 주민 70%가 고흥 류씨
먼저 마을의 분위기를 파악하고자 이 마을의 원로인 류연오(84·류인석 선생과 함께 의병에 참여한 류중악 선생의 고손) 옹에게 귀동냥한 내용을 나열해 본다.
이곳 가정리는 본래 남산외일작면 사동(寺洞) 절골로 불렸다. 이후 갈나무 고목 아래 정자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가정 자로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변경 시 가정리(柯亭里)가 되었다. 아직도 고흥 류씨가 70%를 차지하는 보기 드문 집성촌으로 이들이 이 지역에 정착한 것은 400여 년 전인 조선조 광해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부제학, 병조참판 등의 관직에 올랐던 고흥 류씨 17세손 류숙(柳潚·1564~1636)이 1608년(선조41)에 강원도관찰사에 부임한 게 춘천과 처음으로 맺은 인연이다.
이 비석은 조선 말 유학자로서 13도의군 도총재로 을미의병을 이끈 의암 류인석의 스승인 성재 류중교(柳重敎·1832~1893)의 글씨로 전해진다. 성재 선생의 활동기인 1800년대 중·후 반기에 세워진 비석이라 추정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비석을 세운 특별한 사연은 알 수 없다. 한국전쟁 시 총탄에 의해 일부 한자가 훼손되고 비석 아래가 손상된 상태지만 작은 빗 돌은 아무 말이 없다.
동그라미 안에 고흥류씨분산동구비가 있다. 강원학생교육원(춘천시 남면 가정리 833-1) 입구 버스정류장 표식 바로 뒤편이다
씨족공동체 마을을 상징하다
조선사회는 16세기 이후 성리학 이념을 바탕으로 종족 의식이 강화되면서 사대부가는 물론 서민들도 가문을 중요시하고 숭조(崇祖) 사업에 진력(盡力)하였다. 문중마다 조상의 유 택(幽宅)을 마련코자 풍수설에 따라 명당을 찾거나 마을 주변에 종중산(宗中山)을 조성하였다.
결론적으로 이 비석은 고흥 류씨 가의 분묘가 대대로 이어지는 마을임을 확인시키는 표지물이다. 선산의 개념보다는 더 넓은 의미로 마을 전체가 고흥 류씨 선조들과 함께 사는 곳이라는 증표 성격이다. 마을 입구에 이 비석을 세워 문중의 세력을 과시하는 한편 다른 문중의 분묘 조성을 방지하는 의미에서 세운 것이라 추정해 본다.
가정리는 한말 의병의 태동지로 류인석과 류홍석, 류중악, 류중락, 윤희순 등을 배출한 충의의 고장이다.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는 이 비석은 개인 비석이 아닌 마을 공동체의 의미가 담긴 가정리 마을의 중요하고 특별한 유물 중 하나이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유일한 비석이기에 조금 더 나은 환경으로 개선하고 안내판도 만들어 전통마을의 자존심을 지켜나가면 좋을 듯하다.
비석의 글씨는 의암 류인석의 스승 성재 류중교가 쓴 것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