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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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28

2018.5
#봄내를 품다
김길소의 그때 그 시절 17
강촌 유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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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반세기 동안 많은 사회변화가 이뤄진 격랑의 시기에 조용한 ‘봄의 고장’ 춘천에서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김길소의 그때 그 사건(시절)>은 1970년부터 40여 년간 토박이 언론인으로 이 고장에서 일어난 사건과 변화를 지켜본 필자가 그 당시의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고 숨은 일화와 뒷이야기들을 전하는 코너입니다. <편집자 주>




경춘선과 함께했던 국민 관광지




봄이면 상춘객들로 가득했던 강촌역사(1995년 4월)



날이 새면 물새들이 시름없이 날고

꽃피고 새가 우는 논밭에 묻혀

씨 뿌려 가꾸면서 땀을 흘리며

냇가에 늘어진 버드나무 아래서

조용히 살고파라 강촌에 살고 싶네


<강촌에 살고 싶네> 노래비에 새겨진 가사 1절



국민적 대중가요 ‘강촌에 살고 싶네(1969)’ 발상지인 춘천시 남산면 강촌유원지의 기념 노래비에 새겨진 가사(1절)다. 설강 김성휘가 강촌의 여인숙에 머물면서 아름다운 풍경에 반해 작사한 노랫말이다. 이를 김학송이 작곡하고 가수 나훈아가 부른 것을 강촌 출신 향토작가인 우안 최영식 동양화가가 비문을 써 강촌문화마당이 2005년에 세웠다.


아름다운 강촌의 정경을 모티브로 세운 노래비만이 온통 젊은이들로 북적거렸던 빛바랜 영화를 쓸쓸히 대변하고 있다. 노래비 앞의 버튼을 누르면 작동됐던 기계도 나이가 들어서인지 아무리 눌러도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출렁다리(등선교)가 있던 시절을 강촌의 호황기라 추억하는 이들이 많다. 1972 년 폭 3.4m에 277m의 길이로 준공한 다리는 북한강의 아름다운 풍광과 어우러져 강촌의 명물로 꼽혔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1981년 새로운 강촌교가 놓이고 기존 출렁다리에 장마로 인한 균열 등 안전문 제가 불거지면서 다리는 1985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옛 강촌역사 앞에 하부 교각 일부가 아직 남아 있다.(1973년 9월)



그 시절 설렘과 낭만의 강촌


도도하게 굽이쳐 흐르는 북한강변에 자리 잡은 강촌유원지는 한때 젊은이들에게 설렘과 낭만의 대명사였다. 암벽을 깎아서 뚫은 경춘선 철길과 간이역은 마치 구라파(유럽)의 어느 협곡을 지나는 것 같은 이국적 분위기를 자아냈다. 증기와 디젤로 경춘선을 누볐던 철마도 70여년의 역사를 마감하고 지금은 옛 철길을 레일바이크에 내어 준 상황이다.


베이비부머 세대 때부터 전국의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찾는 플랫폼으로 각광을 받아온 강촌은 호젓하게 농촌을 찾아 낭만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서울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강촌역에서 내려 봉화산 자락의 구곡폭포까지 이어지는 구간(10km)마다 쉬고 먹고 즐길 곳이 지천이었다. 어디를 가도 낯설지 않고 정겨웠다.


아홉 굽이의 물줄기가 만드는 폭포는 항상 강촌여정의 절정이었다. 안쪽까지 자전거를 타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달려가거나 걷다 보면 상쾌하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때묻지 않은 자연 속에서 자유로움과 일탈을 만끽할 수 있었다.


지금은 철거돼 없어졌지만 지난 1972년 국내 최초로 세워졌던 강촌역 앞 등선출렁다리는 굽 이치는 강줄기와 함께 한껏 매력적인 풍치를 돋웠다. 통칭 ‘강촌유원지’라고 일컫는 남산면 강촌리와 방곡리, 백양리 주변에는 북한강과 계곡을 따라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할 수 있었다.


봉화산(해발 525.8m) 기슭의 문폭(文瀑)은 산꼭대기에서 아홉 번 굽이치다 계곡으로 떨어진다. 그래서 구곡폭포나 구구리폭포로도 불린다. 폭포에서 기암절벽과 무수히 쌓아올린 돌탑이 병풍을 이룬 계곡을 따라 1km 정도 오솔길(물깨말구구리길)을 오르내리다 보면 느닷없이 해 발 350m의 중턱에 널찍한 평지가 펼쳐진다. 워낙 오지라 6·25전쟁이 일어난지도 몰랐던 산골이다.


강촌 출신인 구한말 유학자요, 의병장이었던 습재 이소응(1852~1930)이 이상향으로 한시를 읊었던 문배마을이다. 사시사철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곳에서는 10여 가구의 토속음식점이 등산객들의 허기를 달래준다.




봄을 맞아 강촌 유원지를 찾은 그 시절 청춘들이다.(1982년 3월)



‘깡촌’에서 ‘대학생 MT 명소’로 도약


강촌은 지난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치면서 대학생과 젊은이들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갔 다. 경춘선 길목에 있고 산과 강이 잘 어우러진 경관을 가지고 있다는 장점이 어필한 게 아닐까 싶다.


주머니가 빠듯했던 대학생들은 주말과 방학 때가 되면 청바지에 통기타와 배낭을 메고 단층 건물이었던 옛 청량리 역사 시계탑 앞 광장으로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무제한으로 판 입석표로 콩나물시루를 방불케 했던 열차 안은 강촌을 지나면 텅텅 빌 정도였다.


한꺼번에 무더기로 쏟아져 내린 승객들은 강변과 계곡을 거슬러 올라 무리를 이뤄 터를 잡고 젊음과 낭만을 즐겼다. 원색의 물결을 이룬 발길이 부쩍 늘어나 산간오지의 ‘깡촌’이었던 곳에 구멍가게가 늘어나고 민박집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한때는 온천개발(1989년) 투기 붐까지 일어났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계곡의 오솔길과 강변을 따라 자전거 하이킹을 즐길 수 있는 것은 강촌의 하루를 더욱 즐겁게 만드는 큰 매력이었다. 이런 연유로 지난 1980년대부터 자전거 대여업이 성업을 누렸다. 지금도 무려 1,000여대가 비치되어 있다. 그 후 4륜구동의 스쿠터(일명 사발이) 대여업까지 등장, 300여대가 항시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모닥불 앞에 모여 앉아 통기타를 튕기다 막차 시간을 놓치거나 대학생 MT가 당일치기에서 1박으로 바뀌자 대형 민박집과 펜션이 촌락을 이뤄 나갔다. 높이 42m의 고공에서 스릴을 만끽 할 수 있는 번지점프장(1997년) 등 위락시설도 앞다퉈 들어섰다.


덩달아 손두부와 닭백숙, 산 채비빔밥이 주 메뉴였던 식당과 카페들도 손님맞이를 위해 다양하고 대형화로 치달았다. 손님 100여 명씩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닭갈비와 막국수 업소를 비롯, 유흥업소까지 생겨났다.


젊은 무리들로 주말이 되면 불야성을 이룬 강촌은 2000년대 들어서 어느새 춘천판 타임스퀘 어(미국 뉴욕의 불야성을 이루는 명소)로 불릴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대학생들의 MT와 단체 여행지는 물론이요, 전국적으로도 생기가 넘치는 젊음의 앙상블이요, 향연장으로 각광을 받았 다. 이즈음에는 강촌뿐만이 아니었다. 청량리를 떠나 금곡과 마석, 대성리, 청평, 가평, 백양리에 이르는 경춘선 구간에는 어디랄 것 없이 젊은이들이 넘쳐났다.



경춘선 교각 아래 강촌천을 따라 들어선 피서객 텐트. 이제는 볼 수 없는 풍경이 다.(1994년 7월)

경춘선을 타고 몰려든 대학생과 관광객들로 봄부터 가을까지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뤘다.(2000년 3월) 

2016년 9월 경춘선 폐철도 관광자원화사업의 일환으로 강촌천에 폭 2m 길이 58m의 옛 출렁다리를 재현해냈다.




주민들은 영화로웠던 그 시절이 다시 오기를 기대하며 ‘Again1972’라 는 제목으로 거리 사진관도 선보였다.



관광 트렌드의 변화


소중한 추억을 간직한 단선 경춘선은 ‘77년 간의 역사’를 마감하고 지난 2010년 복선전철에 바톤을 넘겨줬다. 이 바람에 강변에 있던 강촌역은 직선화에 떠밀려 안쪽으로 옮겨졌다. 또 2012년에는 강촌의 이미지를 본 뜬 ‘ITX청춘’이 라는 국내 최초의 관광열차가 질주하기 시작하고, 2009년에는 봄내골 사람들이 그렇게 열망해 오던 서울춘천고속도로까지 뚫려 주변 인프라가 크게 개선되는 전기를 맞았다. 지난해 말에는 강촌대교라는 이름으로 새로 경춘국도와 강촌을 잇는 다리와 터널이 널찍한 4차선 진입 도로와 함께 뻥 뚫렸다.


북한강변과 인접한 냇가를 말끔히 정비해 텐트촌과 하이킹 코스를 만들었다. 멋진 펜션과 카페가 주변 모습과 함께 관광지 특유의 색채를 한껏 가꿔 나가는 분위기를 이뤘다. 그러나 이런 그럴듯한 겉모습과 속내는 엄청나게 다른 방향으로 바뀌어 갔다. 왕성하던 생기와 상권이 해를 거듭할수록 위축됐다.


강촌문화마당이 2005년 7월에 세운 <강촌에 살고 싶네> 노래비이다. 남산면 강촌로 63에 위치해 있다.


햇살이 따가웠던 어느 평일, 옛 강촌역사 부근에 있는 S카페를 오랜만에 찾았다. 북한강을 굽어볼 수 있는 명소여서 연인들이 많이 찾던 곳이었다. 빛바랜 입구를 지나 문을 열려고 했으나 굳게 잠겨 있었다. 다시 옛 철길 건널목을 지나자 커다란 6층 건물이 나타났다. 건물에는 매매를 알리는 커다란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안쪽으로 들어가는 도로변에는 음식점과 카페 자전거와 사발이 대여 업소가 즐비했다. 하지만 손님이 드물어 한적했다.


산기슭과 골목길에 자리 잡은 펜션과 민박업소들도 마찬가지였다. 산꼭대기에 수십 년째 방치된 휴양콘도미니엄 신축공사장 입간판마저 썰렁한 분위기를 더했다. 곳곳에 폐업한 펜션이 눈에 띄어 왠지 구멍이 숭숭 뚫리고 찬바람이 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관광여건과 패턴의 변화→ 내방객 감소→ 활력 상실→ 경기 침체→ 유원지 기능 퇴화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가 심화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경춘전철과 서울춘천고속도로변의 서종과 설악 등은 물론이요, 팔당댐 상류의 양평과 남양주 덕소, 하남 미사리 등으로 이어진 광범위하고 엄청난 규모의 화려한 변신(유원지화)과 무관치 않음을 읽을 수 있었다.




여름 무더위를 피해 구곡폭포를 찾은 관광객들.(1993년 7월)



쌓아온 명성 위에 새 살 돋아나기를


새 길이 뚫리고 환경이 좋아졌다고 언제나 만사가 형통하는 것만은 아니다. 변화에는 언제나 위기와 기회가 공존하기 마련이다.


남산면 번영회 성낙천 회장은 “이제는 들어오려는 사람보다 떠나려는 사람이 더 많아졌어요. 그만큼 앞날이 어둡다는 얘기죠. 그렇지만 자치단체와 주민들이 합심해 새로운 활로를 열어가고 있어 옛날 영화를 되찾을 수 있을 겁니다.” 남산면 강석길 면장은 “세태의 변화에 눈높이를 맞춰 새로운 변화를 과감하게 추진해 나가게 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실제 자치단체 차원에서 관광지 활성화 방안의 일환으로 △문배마을 개발 △구곡폭포 유수량 확대 △등산로 정비 및 개발과 같은 하드웨어와 함께 △레일바이크 탑승객의 체류화 △자전거 라이딩 코스 개발 △자연 속에 추억 쌓기 등 소프트웨어적인 새로운 대책을 모색하고 있어 눈길을 끌게 하고 있다. 침체의 늪에 빠져 있으면서도 강촌의 매력은 젊은이들을 향해 여전히 반짝반짝 빛나 보였다.


그러나 전성기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다. 해마다 방문객이 줄어들어 밝은 전망이 녹록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한때의 침체를 거울삼아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나가겠다는 몸부림이 전도몽상(顚倒夢想)에 그치지 않게 되기를 고대하게 된다.


서울춘천고속도로 개통 후 403호 선 지방도 확장개설의 일환으로 2009년 착공해 2017년 12월 27일 개통한 강촌대교이다.

다리 뒤 편에 기존의 강촌교와 옛 강촌역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