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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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27

2018.4
#봄내를 품다
춘천의 기념비 16
강촌역 순의비
의로운 죽음에 대한 단상

젊음과 청춘 그리고 MT와 낭만의 명소로 불리는 강촌. 이곳을 모르는 청춘은 과연 얼마나 될까? 북한강을 거슬러 오르는 경춘선 열차를 타고 간이역인 강촌에서 쏟아져 내리던 수많은 젊은이들. 강촌은 마을 이름이 아닌 젊음의 상징적 아이콘이다. 주말이면 청춘들이 수놓는 북한강가의 자전거 행렬은 언제나 한 폭의 풍경화이다. 비록 청바지와 통기타가 줄고, 역사가 이전되며 열차가 전철로 바뀌면서 여가 패러다임이 변화되고 있지만 아직도 강촌의 명성은 여전하다. 



타인을 위해 희생한 삶을 기리다


새 강촌역 좌측 공간에 있는 작은 비석 하나와 마주 선다. 순의비(殉義碑)라고 한자로 큼직하게 음각된 비석은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하고 숨지거나 불구가 되었던 두 역무원을 기리는 조형물이다. 물질은 풍요로워지고 있으나 이기적이며 개인적 실익만 계산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는 시대이다.


하지만 이런 각박한 세상에서도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친 분들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근년에도 일본 지하철에서 일본인을 구하고 숨진 분도, 세월호 구조작업에서 유명을 달리한 잠수사와 교사도 있었으며, 화재 현장에서 입주민들을 대피시키고 숨진 분도 있다.


안타깝지만 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은 우리의 가슴에 큰 울림을 남겼다. 평생 아픔을 가슴에 묻고 살아갈 그들의 가족에게 우리 모두는 지워지지 않을 큰 빚을 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강촌역 순의비   

남면 출신 철도공무원 이계완·이해철 의인


옷깃을 여미고 행적이 간단하게 기록된 비석 뒷면을 살펴본다. 강촌역과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었지만 두 분 모두 같은 해에 태어난 이 고장 출신의 철도공무원이었다.


이계완 의인은 1928년 남면 서천리에서 태어났다. 1945년에 철도청에 취업하여 1973년 남춘천역장 재직 시 한 노인의 생명을 구하고 자신은 기차에 휘말려 오른쪽 팔과 다리가 절단되고 말았다. 불구의 몸으로 고통과 불편 속에 여생을 보내 다 1997년 6월, 70세로 타계했다.


이해철 의인 역시 1928년 남면 백양리 출신이다. 28세에 철도청에 취업, 가평역에서 근무하던 중 달려오는 열차 앞에 서 있던 초등학생을 밀쳐내 구한 뒤 자신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기차에 휘말려 1971년 43세의 젊은 나이로 안타깝게 생을 마친 분이다.


이 세상에 고귀한 것이 생명이라면 그보다 더 귀한 것이 희생정신이라 하겠다. 위급한 상황에서 남다른 책임감으로 생면부지의 남을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았던 희생정신은 각 본 없는 드라마이자 메마른 대지에 단비처럼 가슴을 적셔주는 감동으로 다가온다.


강촌역 순의비  뒷면


마을 주민들이 직접 건립


비석은 한 독지가의 후원으로 1982년 8월 31일에 면민들 이 세운 것이다. 당초의 건립 위치는 구 강촌역사변에 있었으나 자리가 비좁고 환경이 열악하여 2010년 12월 21일 수도권 복선전철이 개통되면서 새 강촌역사 옆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이 비석은 관청에서 세운 것이 아니다. 이들의 남다른 책임감과 살신성인, 희생봉사 정신에 감동한 독지가와 주민들이 뜻을 모아 자발적으로 세운 비석이기에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다. 다만 고속철도 속도의 뒤안길에서 무관심으로 과거의 산물로 잊혀 가고 있는 현실이 못내 안타깝기만 하다.


지금이라도 비석 주변에 안내판이라도 세워 이들의 넋을 위무(慰撫)하고 의로운 행적을 알려 모든 사람에게 귀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렇게 인간의 한계점을 실천하는 의인들이 있기에 우리 사회는 보다 밝고 건강한 공동체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리라.


“종소리를 더 멀리 보내기 위해서 종은 더 아파야 한다”라 는 어느 시인의 의미심장한 시구가 가슴을 울리지만 그 고통 이 한 사람의 몫이 아니기를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