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둔 지난 2월, 지구촌 굴지의 전파매체인 미국 뉴스전문채널 CNN이 ‘춘천 닭갈비’를 우리나라 대표 먹거리로 소개해 화제가 되었다. CNN(Travel 채널)의 방영은 미슐랭 가이드 등재 이상의 막강한 파급력을 지녀 벌써부터 세계인의 입맛과 관심을 끌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모으게 한다. ‘한국음식 Best 10’ 가운데 두 번째로 소개된 춘천 닭갈비는 이미 국내뿐만 아니라 교민들이 살고 있는 지구촌 곳곳에서 외식문화를 선도하며 ‘치맥(치킨과 맥주)’과 함께 유명세를 탄지 오래되었다.
1970년대 혜성처럼 등장한 ‘닭갈비’
먹거리가 흔치 않아 보릿고개와 절량농가(絶糧農家·양식이 끊긴 농가)가 있었던 1960년대 이전까지 봄내골에서는 ‘닭갈비’라는 이름조차 생소했다. 전통사회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씨암탉을 잡아 백숙과 삼계탕, 볶음탕으로 먹는 닭고기 조리법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부터 급격히 달라졌다. 입소문과 대중화의 물결을 타고 닭갈비 업소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요즘은 여기저기에서 ‘닭갈비촌’이 성업 중이다. 서너 집 건너 한 집이 닭갈비 업소일 정도로 즐비해졌다. 봄내골 주변에서 닭갈비를 팔고 있는 업소가 무려 500여 곳에 이르고 닭갈비를 포장해 판매하는 제조업체가 40여 곳(닭갈비막국수 축제위 자료)이나 된다.
지난 반세기 동안 누가 시키거나 주도하지 않았는데도 고장에서 차곡차곡 이뤄져 온 이 엄청난 변화의 물결을 가져온 그 시원은 과연 무엇일까. 그동안 걸핏하면 여기저기에서 이를 규명하려는 그럴듯한 이야기가 제기되어 왔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개인적이거나 근거가 불명확하고 단편적인 시각과 주장이 대부분이었다.
어느 향토학자는 신라시대에 닭을 잡아 내장을 빼고 양념을 넣어 닭적을 만들어 제사상에 올린 것이 효시라고 했다. 돼지고기 파동과 군납용 육계생산이 가져온 결과물이라는 주장과 함께 심지어 옛 소양강유원지의 명물이었던 어죽( 민물고기를 닭고기와 함께 삶아 닭고기를 고명으로 얹은 죽)의 대타로 진화한 것이라는 의견까지 백출(百出)했었다. 어쨌거나 지금은 봄내골 대표 향토 음식이요, 미래먹거리 산업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연간 1,000만 명의 관광객과 식도락가들이 이 고장을 찾아 닭갈비를 즐기고 닭갈비축제가 지역 최대 잔치가 되었다. 또 봄내골에서 현금 동원 능력이 가장 큰 곳이 어느 대형닭갈비 업체라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린다. 이와 관련된 지역의 매출고가 얼추 어림잡아도 조 단위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까지 낳고 있다. 더구나 이제는 닭갈비라는 봄내골 식문화와 음식산업을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를 향해 송출하고 있는 상황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중이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끊임없이 진화해 온 대표 향토음식에 관한 뚜렷한 정체성과 실체적 규명 확립이 미흡해 미래 푸드에 관한 체계적이고 꼼꼼한 연구나 대비를 소홀히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한 끼 식사나 안줏감으로 제격…
봄내골 닭갈비는 예부터 전승되어 온 음식이 아니다. 그렇다고 어느 날 뜬금없이 갑자기 만들어지거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도 아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꾸준히 변화를 거듭해 온 봄내골 식문화 발전의 소산이다.
1958년 10월부터 중앙로에서는 닭고기를 잘게 각을 내 양념을 묻혀 불고기처럼 구워 먹거나 닭의 다리나 똥집 같은 부산물을 전문으로 조리하는 업소가 더러 있었다. 그러다 1970년대 초 닭갈비를 판다는 업소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봄내골 메인스트리트인 중앙로변 낙원동 뒷골목이었다.
닭의 갈비는 실낱같이 가늘고 살이 붙어있지 않아 먹어볼 게 별로 없다. 원래 닭갈비를 일컫는 계륵(鷄肋)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그다지 가치는 없으나 버리기 아까운 사물’을 이른다. 또 몸이 몹시 연약함에 비유되기도 한다. 한마디로 탐탁치 못함을 가리 킨다. 이걸 버젓이 음식점 상호에 내걸었으니 우스꽝스럽고 당혹스럽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이런 느낌은 잠시였다. 볼 때마다 손님이 북적거렸고 차례를 기다리는 줄이 찬바람이 부는 겨울철이 되면 더욱 길어졌다. 덩달아 닭갈비 업소가 부쩍 늘어났다.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다 호기심이 생겨 한번 먹어보았다. 감칠맛 나는 식감과 뒷맛까지 그럴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 끼 식사와 안줏감으로도 제격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필자가 근무하던 향토지(강원일보 1970년 10월 1일 자 사회면) ‘일요화제’ 코너 게재를 위해 춘천 닭갈비를 취재해 기사화했다. 기사용 원고지 22매 분량의 최초 언론보도였다. 비교적 열독률이 높은 인기 연재물 이어서 그랬는지 지역 독자들의 반응이 의외로 컸다.
공교롭게도 당시 본사로부터 자매지인 주간지의 화제기사 발굴을 닦달받아 왔던 중앙지 주재기자들이 즉각 이 기사를 앞다퉈 거의 그대로 되받았다. 그 결과 선데이서울과 주간한국, 주간중앙 등 인기 주간지에 일제히 대서특필돼 그 주간에 전국적인 화젯거리가 되었다.
향토지의 화젯거리 보도가 마중물이 된 언론보도는 활자매체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 뒤 라디오와 TV등 전파매체들도 기회 있을 때마다 화젯거리로 보도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부각 된 닭갈비가 날개 돋친 듯 팔리기 시작하고 업소가 폭증하면서 춘천 닭갈비 소비가 마른 들판에 기름을 부은 것처럼 번져 새 역사를 열어가는 발화점이 되었다.
닭갈비의 여섯 가지 성장 요인
닭갈비라는 이름을 최초로 상호에 쓴 업소의 음식은 지금 대중화의 물결을 타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통닭을 넓적하게 각을 내 고추장과 마늘, 생강, 간장 등 갖은 양념과 버무려 일정 기간 숙성(1일간)시킨 후 숯불에 구워 먹는 ‘닭 불고기’였다.
요즘은 원탁(초기에는 드럼통)에 둥근 번철을 올려놓고 그 밑에 가스나 연탄불을 붙여 뜨겁게 달군 다음 닭고기와 양배추, 고구마, 작은 떡볶이 떡을 넣어 시뻘겋게 버무린 갖은 양념과 지짐질해 익혀 먹는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어느 정도 배가 부른 후에는 밥이나 우동국수를 닭갈비를 익히는 과정에 생긴 기름을 말끔히 걷어내고 골고루 비벼 볶아 먹기도 한다.
언론의 각광을 받은 춘천 닭갈비가 반세기가 넘도록 꾸준히 인기 급상승하여 온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내재돼 있음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첫째 가격이 싸다.
곡식의 절대량이 모자라 분식이 장려되던 시절, 고기는 명절이나 되어야 맛볼 수 있었다. 생선회는 물론이요, 소고기나 돼지고기보다 값이 헐해 싼값에 공급이 가능했다.
둘째 영양학적으로 우수하다.
단백질과 비타민이 풍부하고 칼로리가 낮아 다이어트에 제격이었다. 상추와 깻잎으로 쌈을 싸먹고 제철 채소가 곁들여져 건강에도 좋다. 한국음식의 첨상이었던 소갈비 먹기를 꿈도 꾸기 어려웠던 시절, 닭갈비는 대리만족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셋째 편의성이 크다.
옛날에는 닭을 잡아 목을 따 피를 뽑고 털을 뜯는 번잡한 과정이 뒤따랐다. 노계(老鷄·알을 못 낳는 닭)를 잡아 뼈를 추려내야 하는 과정도 육계(肉鷄·고기를 얻으려고 살지게 기르는 닭)의 집단 사육이 본격화 된 후 사라졌다. 그 뒤에 뼈 없는 연한 닭갈비까지 등장했다. 조리 과정도 이전의 숯불에 굽던 방식에서 번 철을 달구고 재료를 버무려 익히는 과정으로 간편해 졌다. 섬세하게 조리하는 요리가 아니어서 뚝딱 차리기만 하면 된다.
넷째 평등하다.
함께 자리한 사람들이 드럼통과 원탁에 둘러앉으면 상석이 따로 없다. 남녀노소가 모두 동등하고 소주와 맥주, 막걸리 등 무슨 술에도 잘 어울린다. 음식을 앞에 놓고 자리를 정해야 하는 까탈스러운 위계질서나 절차가 생략된다. 그래서 닭갈비를 즐기는 소비계층은 언제나 다양하고 평등하다.
다섯째 푸짐함과 독특함이다.
번철 위에 산더미처럼 올려놓은 시뻘건 재료가 지글지글 소리를 내고 익기 시작하면 누구나 임금님 수랏상이 부럽지 않아진다. 입맛이 짧은 사람들도 순서에 따라 골라먹는 재미로 맛 투정을 할 틈이 없이 포만감을 즐길 수 있다. 부속 반찬과 양념의 비율, 조리 법이 업소마다 다양해 입맛에 맞는 업소를 골라서 즐기는 재미도 쏠쏠하다.
여섯째 관광산업의 급성장이다.
개발연대와 소득수준 향상을 거치면서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관광객이 폭증했다. ‘잠자는 도시’로 불렸던 봄내골도 춘천댐(1965년), 의암댐(1967년), 소양댐(1973년)이 축조되고 교통 인프라가 크게 개선된 후 호반 관광도시가 되었다.
강원대와 한림대의 종합대학 승격 등으로 젊은이들이 많아졌다. 이 과정에 서 자연스럽게 명동의 후미진 뒷골목에 닭갈비타운과 닭갈비축제가 만들어졌다. 볼거리에 먹거리가 접목돼 요즘은 향토음식 즐기기 여행까지 등장하고 있는 추세이다.
이런 시대상황의 변화와 굵직한 요인들 이외에도 양념 식재료의 개발과 같은 자질구레한 요인들이 총 체적으로 어우러져 닭갈비의 진화를 거들었다.
시대변화와 함께 한 우리 고장 대표음식
향토음식에는 그 지방이나 그 나라 특유의 고유한 문화가 흠씬 배어있다. 그래서 요즘 많은 관광객들은 여행을 떠나면서 일상생활과 전혀 다른 경치나 문화와의 만남을 기대한다. 일본은 전통음식이 넘쳐나는 토속축제인 일명 ‘마쓰리(祭·matsuri)’ 붐을 일으켰다. 해마다 400여개의 축제를 열고 전 세계 관광객을 끌어 모으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춘천의 막국수, 속초의 오징어순대와 닭강정, 정선의 콧등치기 국수를 비롯해 전국적으로는 전주의 비빔밥, 안동의 헛제사밥, 부산의 곰장어와 광어회, 마산의 아귀찜, 수원의 갈비, 금산의 인삼어죽, 나주의 곰탕 등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다. 올해에도 봄내골에 서는 오는 8월 28일부터 엿새 동안 닭갈비막국수축제를 열기로 일정이 잡혀 있다.
업소가 부쩍 늘어나고 대형화 추세로 치달아 군웅할거식의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저마다 원조임을 앞세우고 ‘신의 한 수’라고 내세우는 비장의 조리법을 간직하고 있다고 뽐내고 있다. 그러는가 하면 오감으로 즐길 수 있도록 놀이방까지 새로 비치하고 있는 추세이다.
연간 수십억 원씩 매출을 올리는 닭갈비 생산업체(포장용)들도 긴장의 연 속이다. 지난 1999년 춘천 닭갈비 전문생산업체 ㈜오도푸드서비스를 창업해 연간 70억 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이원섭 대표는 “시대의 변화를 제품의 진화에 수용하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는 무한경쟁의 상황”이라며 “이제는 양보다 질을 더 추구하는 사회가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각종 인스턴트식품과 패스트푸드 취급 업소가 늘어나고 향토음식과 ‘먹방(먹는 방송)’등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삶의 중심에 우뚝 서 있음을 엿보게 한다. 주마등 같이 스쳐 간 춘천 닭갈비의 어제와 오늘을 되돌아 본 느낌은 어느새 봄내골이 닭갈비라는 음식산업의 발상지요, 본거지로 도약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더 나은 음식이 더 나은 삶을 만들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준다(Better Food〈 Better Life〈 Better Future)’는 인류의 고민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점이었다.
2004년 시작한 닭갈비축제는 1996년부터 열리고 있던 막국수축제와 통합해 2008년부터 춘천닭갈비막국수로 열리고 있다. 올해는 8월 28일부터 9월 2일까지 춘천역 앞 행사장에서 개최한다. 홀수 해는 막국수닭갈비축제, 짝수 해는 닭갈비막국수축제로 명칭을 번갈아 사용한다.(2008 사진 춘천닭갈비막국수축제 조직위원회)
명동 닭갈비 골목은 춘천의 가장 번화한 상업 중심지인 명동거리에 위치한 대표적인 원조 닭갈비 골목이다. 닭갈비거리는 1970년대 초에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그때는 일반 주택과 함께 몇몇 음식점이 여러 종류의 음식을 팔고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닭갈비였다.
1980년대 닭 갈비를 내세운 전문 음식점들이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닭갈비 골목으로 활성화되었다. 이후 닭갈비 전문점이 20여 개로 늘어나면서 이들만의 자생단체인 ‘계명회’가 구성되었고, 본격적인 입소문과 많은 대중매체의 소개로 인하여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는 화덕을 빨갛게 달구며 연탄불을 지피던 풍경이 무색무취의 도시가스로 대체 되어 사라졌고 점차 지금의 현대적 골목풍경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외식문화의 확산으로 저렴하고 푸짐한 추억의 음식인 닭갈비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외식 메뉴로 자리 잡았고, 2000년대에 들어와 드라마 겨울연가로 인한 한류열풍 이후로 일본, 대만, 중국을 중심으로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춘천 명동을 찾으면서 하나의 관광명소로 발전하게 된 춘천 명동 닭갈비 골목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음식문화거리이다.
(출처 명동닭갈비골목 입구 안내문)